삼다수가 집에 매일매일 쌓이기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마트에 갈 때마다 남편은 무거운 삼다수 묶음을 사 왔다. 어두워진 전등은 새것으로 갈아 끼고 아직 덜 채워진 쓰레기통도 비웠다. 식탁 위 봉투에는 쌍화탕 5개, 까스활명수 5개씩, 냉장고에는 요즘 즐겨 마시는 맥주가 채워져 있다. 기름이 떨어진 차에 한가득 주유하고 세차까지 마친 남편. “주유해 뒀어.” 짧은 한마디에 진한 마음이 묻어났다. 육지로 다시 올라갔던 남편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제주에 내려와 하루, 이틀가량 짧게 머물고 다시 떠났다. 헤어짐은 늘 아쉽고 슬펐지만, 가족에 대한 마음과 배려가 곳곳에 가득 채워져 우리도 씩씩하게 견뎠다. 그의 다정함 덕분인지 얼마 전 새로 갈아 낀 전등은 유난히 더 환하게 비친다.
아이의 병원 진료 예약으로 서울에 도착하던 날. 공항에는 남편이 나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리움과 반가움이 뒤엉켜 한꺼번에 솟구쳤다. 눈물 한 스푼을 삼키고 아이들에게 아빠 품을 양보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빠가 반가워 폴짝 뛰어들며 신나게 재잘거리는 아이들. 그 모습을 보니 괜스레 애잔해졌다가 어느새 웃음이 났다. 떨어져 지낸 시간은 결핍으로만 남지 않았다. 아빠의 빈자리로 염려되었던 마음은 가족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이 바로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어느새, 약속된 시간이 되었다. 이제는 우리가 모두 다시 육지로 돌아갈 시간. 제주살이의 끝자락에서 나는 서우봉 해안 길을 걸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바다는 더 또렷하고 선명해졌다. 해안 둘레길 끝까지 가는 내내 아무도 없었다. 요란하게 지나가는 태풍 덕분에, 요란한 내 마음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황혼 무렵, 태양은 더 크고 강렬하게 빛났다. 멀리까지 물 빠진 해변 위로는 잔잔한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그 파도처럼, 이별을 앞둔 마음도 조용히 일렁였다.
싱크대 앞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세수도 안 한 쓰리 전 씨들. 딱풀처럼 붙어 앉아 낄낄거리는 모습을 보면 나는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 제주에서는 산과 들과 바다가 내 ‘찰나의 행복’이었다면 이곳에서 ‘찰나의 행복’은 주로 집에 있다. 설거지하던 나는 문득 평화로움을 느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길어진 햇살을 따라 평온함이, 행복이, 깊숙이 들어왔다. 물론 이 행복한 마음은 아이들의 투덕거림과 함께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에 사라져 버리지만 이 또한 반짝이는 행복이라는 걸 나는 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용기를 가지고 싶었던 사자처럼, 긴 여행이 끝날 무렵 나는 용감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익숙한 것들을 떠나 낯선 섬에서 보낸 시간은 우리를 더 촘촘하게, 더 단단하게 엮어주었다. 변덕스러운 제주 날씨에도 우리는 그 모든 날을 함께 흘려보내고 견뎌냈다. 함께한 그곳이 제주라 좋았다. 함께라면 어떤 계절이 와도 괜찮다. 지금, 내 옆엔 우리 가족이 있다.
완전체가 된 우리 가족,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