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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 숙종 Jan 09. 2019

15. 올리브나무

      

 골목길에 올리브 나뭇가지가 내려와 있다. 나뭇잎이 머리에 닿을까봐 보도를 내려와 차도로 걸어 다녔다. 오늘은 그냥 지나갔다. 올리브 잎이 머리를 툭툭 스쳤다.     


 ‘몸이 가볍다.’ 

 피곤하면 몸이 무거워야 할 텐데 아니다. 온몸이 가벼워서 땅을 딛는 발바닥 중력이 약하다. 주말 이틀을 쉬었는데도 출근길이 멀다. 20분전에 집을 나와 걸으면 출근 시간에 정확히 일터에 도착하는데 늦었다. 퇴근하면서 마트에 들러 소고기를 샀다. 혼자 살아도 식사를 거르지 않지만 몸에 뭔가를 더 채워야 할 것 같다.   

 

 다음날도 몸은 가벼웠다. 고기를 많이 먹어 몸이 무거워야 되는데, 그 다음날도 가벼웠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어렵고 병원에 가서 의사한테 설명하기도 애매한 증상이다. 그저 몸 에너지가 10% 정도 빠져나간 것 같다. 빠진 에너지는 가감 없이 3주 동안 이어졌다. 요르단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며 2년 넘도록 생활했지만 처음 겪는 지루한 무기력이다. 영화장비를 차에 싣고 오지 아이들을 찾아가 영화를 보여주는 일을 해왔다. ‘시네마천국’이라는 협력활동으로 요르단 전역을 돌아다녀야 하기에 많은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지금 몸 상태로는 다음 예정된 활동조차 아득하다. 일보다 내 몸이 더 걱정이다.   

  

 퇴근길, 노곤한 몸은 햇빛으로 더 쳐져 한걸음 집으로 오기 힘들었다. 길가 올리브나무 그늘 아래 앉았다. 손가락만한 올리브 나뭇잎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맥없이 앉아있는 내 앞으로 차들이 시끄럽게 지나치고, 히잡을 쓴 여자가 아이 손을 잡고 길을 건너온다. 나뭇잎새 사이로 가지에 단단히 매달린 올리브가 보였다. 다시 아버지가 생각났다. 나처럼 기력 없이 걸어 다니시던 아버지 모습이 작은 잎새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사실 지난주부터 내 몸 상태가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지만 몸서리치며 고개를 흔들곤 했다. 더 이상 떨칠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 나이와 내 나이를 계산해 봤다. ‘아! 벌써 내가?’     


 아버지는 ‘루게릭병’으로 77세에 돌아가셨다. 근육 활동이 정지 하면서 몸에 있는 에너지를 몽땅 빼버리는 병.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한때 뉴욕 양키스 4번 타자였던 ‘루게릭’이 앓은 ‘루게릭병’이었다. 10만 명 중 1명 발병하며 길어야 5년을 넘기기 힘들다는 병. 한마디로 ‘루게릭병’은 뇌와 척수에 있는 운동 신경원이 손상되는 질환이다.     


 “‘루게릭병’ 유전인가요?”   

  

 그때, 아버지보다 내가 걱정되어 절박하게 의사한테 물어본 기억이 난다. 의사는 유전은 아니라고 나를 안심 시켰다. 그런데 내 몸 상태는 그때 아버지 모습 그대로다. 아버진 집으로 오는 언덕길 한가운데 털썩 앉았다. 얼른 일어나야 하는데 마주 오는 차를 보고서도 그냥 가만히 앉아 계셨다. 이웃 주민이 지나다 아버지를 일으켜 세워 집으로 모셔왔다. 술 때문이라고 나는 잔소리를 해댔다. 같은 일이 여러 번 이어지자 아버진 아예 밖을 나가지 않으셨다. 늘 방안에 누워 계셨다. 난 그런 무기력한 아버지를 무던히 책망했다. 

 “집에만 계시니까 기력이 없는 거예요!”    


 ‘루게릭병’은 에너지가 몸에서 빠져 내린다. 마치 예정되어 있는 스케줄처럼. 몸은 감각을 매일 잃어가는 중이다. 빼앗기고, 또 빼앗긴다. 쉼 없이 조금씩 진행되기에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게 한다. 그리곤 한 가닥 숨까지 끊는다. 16년 전 내 아버지도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하셨다. ‘루게릭병’이라는 것을 아버지도 몰랐고 나도 몰랐다. “몸이 이상하니 병원에 가자.”고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기력이 떨어진 줄만 알았다. 화장실에서 넘어져 척추를 다쳐 병원에 가서야 알았다. 평생을 아버지와 함께 산 나는 보호자였고, 방관자였다. 치료약이 없는 희귀 질병이어서 가족은 망연히 지켜볼 뿐이다. 설령 이 병을 미리 알았더라도 치료가 되지 않으니 서로의 고통만 길었을 뿐이겠지만.    


 아버지 근육은 하루에 하나씩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에서 가장 먼 곳부터 가까운 쪽으로 근육은 조금씩 조금씩 죽어갔다. 발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로. 남은 감각이 몇 개 없었다. 급기야 인공호흡기 없이는 스스로 숨 쉴 수 없는 상태까지 왔다. 아버진 산소 호수를 코에 꽂은 채 면회 온 나에게 목소리 없는 말씀을 하셨다.

 “지금까지 병원비가 얼마냐?”

 “산소 호흡기를 가지고 집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

 평생을 아끼면서 사신 분이라 숨이 멈출 때가지도 병원비를 걱정하시는 것이다.    

 

 ‘루게릭병’은 아버지의 남은 시간을 빠르게 돌렸다. 손가락으로 시침을 휙휙 돌리듯이. 그 시계에 어머니도 함께 휩쓸렸다. 어머닌 ‘간경화증’을 가지고 계셨다. 어머니를 진료하시던 의사는 간이 이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서울 변두리에서 중앙대학병원까지 매일 오가며 아버지를 숨 가쁘게 간호하시다 쓰러지셨다. 내가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을 때 어머니를 중환자실로 옮겼다는 연락을 받았다. 부모님은 같은 병원 중환자실에 계셨던 것이다. 회사에서 잠시 빠져나와 어머니를 봤다. 나보고 너무 아프다며 수면제를 달라고 하셨다. 아침에 퇴근해서 다시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돌아섰다. 너무 이상해서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가 모로 누워 맑은 눈으로 나를 보고 계셨다. 회사에 돌아오자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큰 근육부터 마비되어 목소리조차 낼 수 없다가 급기야 호흡을 멈추게 하는 병. 인공호흡기를 달면 정신이 살아나기에 타인이 당신의 숨결을 이였다 붙였다 하는 병. 결국 아버지는 어머니가 가신 겨울 끝자락에 기나긴 투병을 완수하셨다. 중환자실에서만 2년을 버티시다가 명료한 정신으로 호흡만 멈춘 채 세상을 비우셨다.   

  

 ‘루게릭병 일까?’


 나는 초조했다. 옆에서 지켜봤던 아버지 증상과 지금 내 몸 상태를 하루하루 계산했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닐 것이다.’라는 위안도 했다. ‘이제 어떡하나?’ 해외봉사 활동이고 뭐고 빨리 집으로 돌아 오랄까봐 가족한테 증상을 숨기고 있었다. 아버지와 같은 병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나와 가족을 위해서 올바른 일일 것이다. 그러나 돌아 갈 수도, 남아 있을 수도 없게 됐다. 요르단 국경 ‘조우페’마을 봉사활동이 다음 달에 예정되어있다. 300명 아이들이 우리 팀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미 막대한 예산도 풀렸다. 이젠 무기력 증상이 끝나주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집을 나섰다. 아침인데도 골목은 햇볕으로 뜨거웠다. 몸이 바람에 밀리듯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 같다. 터덕터덕 걷는 내 모습이 흡사 아버지다. 

 ‘그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왜 가족한테 몸이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으셨을까?’  

 골목길에 지나는 올리브나무를 올려다봤다. 나무는 아버지와 닮았다. 두 계절이 지나도록 비 한번 오지 않는 메마른 땅에서 쓸쓸하게 견디며 열매를 단다. 결코 비를 기다리는 것 같지 않다. 그저 푸르게 서있다.    


 내 아버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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