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하늘나라에 간 지도 어느새 1년이 됐다. 그 사이 우리 집에는 새 생명이 태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의 삶은 끝나고 누군가의 삶은 시작되는 가운데에 내가 있다. 임신사실을 알게 된 건 언니가 죽은 지 3개월째였다. 언니의 선물인 건가. 아니 어쩌면 언니가 환생을 한 걸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언니는 뇌성마비 지체장애인이었다. 세상에 한껏 자신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사는 동안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었던 나를 참 좋아했고 엄마에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곧잘 나에게 털어놨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도 함께한 건 엄마가 아닌 나였다. 언니가 숨이 멎어가던 작년 1월에 엄마는 담석증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 엄마 없이 언니를 보내야 하면 어쩌지라며 내가 상상했던 최악이 현실이 됐다.
언니는 한때 걸었다. 그러다 앉았다. 그리고 누워서 생활해야 했다. 혼자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갈 수 있었지만 어느 날부터 그 모든 걸 할 수 없게 됐다. 기저귀를 차고 시설생활을 한다는 건 24시간 간병인이 붙어있지 않는 한 감염에 취약해진다. 요로감염이 잦아지더니 결국 패혈증이 왔다. 마지막통화에서 숨이 차 겁에 질린 것 같던 언니에게 괜찮을 거라고 병원에 가있으면 곧 가겠다고 했다. “어”라고 힘겹게 대답했던 언니는 가보니 의식이 희미해져 갔다.
차라리 큰 병원에 있을 때 숨을 거뒀더라면. 살아있을 때 엄마와 서약해 뒀다던 연명치료거부는 무용지물이다. 결국은 보호자의 선택이다. “연명치료는 안 하겠습니다 “ 정말 그럴까. 혹시라도 언니가 더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면 어쩌지. 죄책감 비슷한 게 나를 누른다. 처음 삼일째까지 장애로 발음도 힘들었던 언니가 온 힘을 다해 밤새도록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섬망 비슷한 거였다) “엄마 나 좀 살려줘. 나 이제 어떡해. 너무 무서워 “
가망은 없었지만 얕은 숨은 쉬었다. 산소를 들이마시고 내뱉을 힘이 없어 체내에 이산화탄소가 쌓였다. 병원에서는 더 해줄 게 없다고 했다. 요양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코마상태의 환자가 들어찬 남양주의 어느 요양병원. 가장 안쪽 베드에 언니가 누웠다. 마치 죽음의 문턱에서 대기표를 받은 사람처럼… 다음날 아침 전화가 왔다. 심장이 멎어가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전화였다. 그리고 3분 정도 지났을까, 돌아가셨으니 조심해서
오라는 전화를 다시 받았다.
언니가 죽었다. 마지막 통화 이후 열흘동안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이렇게 외롭게 보내려던 건 아니었다. 남편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창백한 얼굴에 푸르스름해져 가는 입술의 언니는 자는 듯 누워있었다. 어제와 다른 건 숨만 쉬지 않을 뿐이구나. 가엾게 가엾게… 그렇게 가버린 언니를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 미안해
엄마는 병원에 있었다. 평생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언니는 엄마에게 더 이상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나 보다. 엄마는 언니에게 ‘엄마 없을 때 누가 너를 책임져줄 수 있겠냐’며 엄마 앞서 네가 먼저 가야지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그렇게 언니는 마지막까지 엄마말을
잘 듣는 딸이 됐다.
언니를 바다로 보내주었다. 처음엔 아빠가 있는 제주도로 가서 묻어주면 덜 외롭지 않을까 했지만 화장시간과 제주 가는 시간이 맞지 않아 포기했다. 평생을 휠체어에 앉아 방안에서만 생활했으니 또 가둬두는 것 같은 납골당은 싫었다. 바다에 흘러 흘러 세계일주라도 자유로이 했으면 하는 마음에 바다장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인천연안부두에서 멀지 않은 곳, 영종대교 중간즈음에서 언니는 꽃과 흙과 함께 1월의 겨울바다로 흘러갔다. 누구보다 순수한 삶이었으니 천사를 만나 자유롭기를…
1년이 지나 그때의 언니를 다시 기억한다. 죽음이라는 건 기억하고 추억하지 않으면 존재했단 사실마저도 희미해지는 것 같아 마지막의 언니를 기록한다. 우리가 함께 한집에서 살았던 날들의 기억은 아득하지만 그래도 우리 자매,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특별하고 애틋했다. 비록 매 순간 친절하지는 못했던 동생이었던 나를 용서해 주길. 지나고 보니 짜증 내며 받았던 전화 한 통, 먹고 싶어 했던 걸 못산다준 어느 하루가 후회로 사무친다. 그나마 언니에 대한 나의 마음을 담은 글을 책으로 남겨뒀다는 건 참 다행이다.
나는 처음으로 언니가 없는 1년을 보냈다. 언니가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이었다. 엄마는 여전히 아프고 나는 아이들을 키우고 회사를 다녔다. 달라진 점이라면 유일하게 언니가 보지 못한 조카가 생겼다는 것. 내 아이들이 부르던 아야이모는 더 이상 세상에 없지만 아야이 모의 선물이라 여기는 막둥이가 세상에 나와 함께한다. 부디 그곳에서 잘 지켜봐 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