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비 Jul 02. 2019

먹자는 거 먹지도 않을 거면서

이것은 치밀하고 긴장감 넘치는 심리게임

우리의 음식 취향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억울하다. 물론 우리 둘 사이에 있어 취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우리는 크게 가리는 음식은 없다. 굳이 나눠보자면 그녀는 족발과 닭발 같은 재료 본연의 모습이 유지된 음식에는 약간 거부감이 있다. 나는 그녀에 비해 채소류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청국장과 된장을 선호하는 반면 난 굳이 스스로 그 음식들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우리 둘 다 조금 꺼리는 게 있더라도 있으면 또 있는대로 잘 먹는다.


우리에게 있어 메뉴 선택, 특히 저녁 메뉴를 정하는 것은 일종의 놀이 같으면서도 긴장감이 서린 미묘한 눈치게임이자 심리게임이기도 하다. 오늘 먹을 메뉴를 위해 지난 며칠간 먹은 것들을 다시 정리한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미묘하게 변주를 해야 한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뭔가(결국 서로가 먹고 싶은 것)를 제시하며 상대를 유인하는 거다. 예를 들어


 : 엊그제는 샐러드 먹었고, 어제는 김치찌개 먹었으니까… 오늘은 카레?!(눈치)

그녀 : 얼마 전에 먹지 않았어??

 : 한 이 주 전?(설마 이게 최근이라는 것일까…?)

그녀 : 아닌 거 같은데…


이것도... 좀 그런 거 같다.


사실 그녀가 카레를 얼마 전에 먹었다는 착각(?)이 드는 이유(내 관점에서)는 내가 너무 자주 제시하기 때문이다. 한 5번 제시하면 1번 먹었다고나 할까? 실제 먹은 횟수는 얼마 안 되는데 원최 자주 이야기를 들으니 그렇게 느끼는 듯하다.


여기서 나의 본격적인 억울함이 나온다. 다시 저녁 메뉴를 골라야 하는 순간으로 돌아가 보자. 그녀가 묻는다 “뭐 먹을까?” 그럼 난 먹고 싶은 것을 이야기할 뿐이다! 카레! 닭갈비! 피자! 케밥! 


흠…


이런 반응이 나왔다면 알아서 눈치껏 물러서야 한다. 그녀는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이미 온 표정과 온몸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그거 먹을까?(싫어!)” 


찰나의 순간, 본격적인 눈치게임과 심리게임으로 돌입한다. 재빨리 다음 메뉴, 즉 상대의 마음에도 들고 나도 수용할만한 것을 찾아야 한다. 


 : 그냥 파스타 먹을까? 집에 새우 남은 거 있을 텐데

그녀 : 아냐, 아까 말한 닭갈비 먹자!


이렇게 잘 먹고 좋아하면서!


다시 그녀의 동공을 주시해야 한다. 과연 정말 닭갈비를 먹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날 배려하는 것인가? 이 확률은 대개 5대 5다. 그러니 정말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판단을 잘못해서, 그러니까 진심으로 그것을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날 저녁은 한동안 긴장 상태가 된다. 말은 안 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거 같은데…”하는 메시지의 아우라가 가득하다.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룰루랄라 거리며 장을 보다 보면 참다못한 그녀가 다시 입을 연다. 


근데 닭갈비 좀 번거롭지 않아? 그냥 간단하게 빨리 해먹을 만한 거 먹을까...?


나도 모르게 기운이 푸욱 빠진다. 이미 내 머릿속은 이날의 예상되는 저녁 메뉴(카레나 닭갈비 혹은 미역국 등)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재료를 사서 어떤 순서로 준비해서 조리한 뒤 음미하는 것까지! 모든 일련의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 기쁨이 최고조에 다다른 순간, 그녀가 모든 게임을 뒤집는 조커를 꺼내는 것처럼 한마디를 하면 난 이미 풀썩 주저앉고 만다. 진작 뭐가 먹고 싶은지 말해주면 좋았을 텐데.


우리의 지난한 저녁 메뉴 선정의 과정들, 때로는 긴박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시간들. 그럼에도 가끔 서로가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정작 본인은 그렇게 내키지 않다고 온전히 상대를 위해 소중한 한 번의 기회를 포기하는 것. 가끔 그녀가 먼저 “오늘은 카레 먹자!”라고 손수 나서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내가 프랑스어 시험을 보기 위해 아침 6시에 나가 저녁 9시에 들어오는 날이라든가, 왠지 모르게 내 기분이 처졌다는 것을 느끼는 날들에.


나 역시 이런저런 이유로 그녀의 기분이 다운된 것을 느끼면 “오늘은 상큼하게 탄수화물 없이 샐러드를 먹자!”라고 한다. 가끔은 수만 번 내뱉는 위로의 말보다, 등을 토닥여 주는 것 외에 상대를 위한 저녁을 마련하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니까.


긴 여행 중 얼큰함에 목말랐던 나를 위해 찾아간 브뤼셀의 어느 중국음식점


어떤 면에서 그저 식사 한 끼로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간이자 일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단순한 친구나 연인이 아니라, 함께 식탁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소소한 행복을 나누는 식구, 가족이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카레 닭갈비 먹을까?!


* 이 글은 아내가 쓴 글 <결국 또 같은 소리, 뭐 먹고 싶어?>에 대한 답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국은 또 같은 소리, 뭐 먹고 싶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