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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Aug 10. 2019

누가 지옥문을 열었을까

범인은 이 안에 있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
-김전일, <소년탐정 김전일>
갓 도착한 파리의 인상은 청량하면서 추웠다.


프랑스 파리. 이곳에 온 지 벌써 1년 하고 6개월이 지났다. 한국을 떠나던 순간의 감흥, 파리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느낌, 지난한 어학시험에 한숨을 푸욱 쉬고 학교 지원에 또 두통을 느꼈다. 그래도 중간중간 이곳에 놀러 온 친구들과 반가움의 포옹을 하며 추억도 만들었다. 나의 프랑스어 실력을 기대하는 그들의 눈치를 느끼면서. 친구들아, 미안해...


정말 눈 깜짝할 새 시간이 흘렀다. 예전에 동사무소(요즘 말로 주민자치센터)에서 공익을 했다. 그 당시 내 주임무 중 하나는 매일 시청을 오가며 각종 서류와 통장 정리, 비품 챙겨 오기였다. 어느 날 같은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한 직원분과 시청을 가게 됐다. 이미 중년을 넘어선 그분은 조수석에 앉아 정면만을 응시한 채 한마디를 했다. 


시간의 흐름은 나이에 비례해


"1년이 지날수록 속도가 더 붙으면서 그러다 보면 어느덧 이 나이가 된다." 그때도 어렴풋이 무슨 말인지 알듯 했다. 나 역시 꼬꼬마 시절에는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나 싶었는데 그때만 해도 뭔가 빨리 지나가고 있다는 걸 느꼈으니까. 지금은 그때보다도 저 말이 너무나 잘 와 닿는다. 아직 나이가 많다고 할 정도는 아니나, 어쨌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켜켜이 쌓이는 시간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1년 반 동안 뭐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언제 여기까지 왔지? 


꼴레쥬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를 보며 두근거려하기도 했다. 


얼렁뚱땅 시간이 흘렀나 싶지만 그 와중 뭔가 하기는 했나 보다. 드디어 진짜 파리 생활이, 유학 생활이 시작된다. 이러쿵저러쿵하다 보니 올해부터 학교에 다니게 됐다. 합격 통보를 받은 순간은 역시나 짜릿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할 기회를 갖게 됐을 뿐 아니라, 이제야 내가 한국을 떠난 이유가 공식적으로 정당화되기도 하니까. 이 소식을 나 못지않게 좋아한 사람이 바로 부모님이다. 당신들도 이젠 당당히 주위에 아들의 근황을 알릴 수 있게 됐으니. 그저 "일 그만두고 하고 싶은 거 하러 갔어"가 아니라 "어디서 무슨 공부하고 있어"라는 디테일의 추가.


기쁨도 잠시. 기어코 지옥문을 열고 만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인 것이 지난 1년 반은 그 어느 때와 비교해도 정말로 멋진 한량 생활을 했다. 공부와 어학 스트레스와는 별개로 오전 10시쯤 조깅을 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고,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밤늦도록 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한가로이 오후 4시쯤 센느 강변에 나가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했다.


파리에서 살 집을 구하기 전 잠시 머물렀던 호텔. 둘이서 저 짐들을 다 들고 왔었다...


아무도 없는 낮 2시께 상영관을 독점하다시피 영화를 보기도 하고, 온갖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니는 것은 물론, 시기와 때에 상관없이 프랑스 안와 바깥 구경을 잘도 다녔다. 그때그때마다 돈의 압박을 받긴 했지만, 시간의 압박은 없었다. 의사소통의 한계는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 우리는 외국인 여행객, 어떻게든 말하고 들으면 됐다. 이런 호사가 어딨으며 또 언제 누릴까?


하지만 이제 정말이지, 파리와 유학이 내 현실이 되고 있다. 아무리 파라다이스도 현실이 되면 지옥이 되는 거 아닌가? 더군다나 이젠 물러날 곳도 없이 프랑스어를 갖고 토론을 하고 논문을 쓰고 수업을 듣고 소통을 해야 한다. 그저 한 두 마디로 빵을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일 텐데.


몽블랑(Mont Blanc)도 갔다 왔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으면 안 됐던 것처럼, 나 역시 현실의 지옥문을 열어 버린 것은 아닐까? 아직도 시작도 안 한 와중에 지레 겁부터 먹는 건 아닐지 싶으면서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고난의 행군을 생각하니 숨이 턱 막힌다. 아직 문밖에 있지만, 지옥문이자 고생문으로 예상되는 문을 연 사람은 누굴까? 범인은 바로 이 안에 있다. 


바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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