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비 Sep 16. 2020

모스코우1

그저 말하는 겁니다

최후진술? 글쎄요.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백이라 부를 수도 없을 거 같군요. 이미 물어보셨던 것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뭐냐고요? 글쎄요... 저도 이것을 뭐라고 할지 어렵습니다만... 굳이 말하자면 혼잣말이라고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아직 마지막이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혼자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리면서도 누군가가 들어줬으면 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이것도 그런 거와 비슷합니다. 저를 변호하기엔 한없이 부족하지만 그냥 넘기기도 뭐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의 시간을 뺏는 것에 지나지 않는 그런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꼭 말해야만 하는, 아니 말해야만 할 거 같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한다고 무엇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행여 저의 상황에 공감하고 심신 미약이라든가 그런 배려를 해주신다면 더 바랄 건 없겠지요. 솔직히 이것으로 저에 대한 판단이 바뀔 거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이건 혼잣말입니다. 그냥 안 듣고 계셔도 되고 듣는 척만 해도 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전에 한번 A(에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을 겁니다. 제가 그 사람을 A라고 부르는 건 이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아무개겠지요. 굳이 제가 A라고 부르는 건 그 사람을 프랑스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검은 게 동양 혈통인가 싶으면서도 기름진 곱슬머리였습니다. 아마 안 씻어서 그런 거겠지요. 엄청 길지는 않았고 귀를 살짝 덮은 남자치곤 길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눈동자는 어딘가 푸르고 코랑 턱이 굉장히 오뚝한 것이, 그리고 어쨌든 불어인지 영어인지 외국말을 쓰는 듯했습니다. 제가 가정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정확히 그가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중얼거리는 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어도 모르고 불어도 몰랐으니까요. 어쨌든 그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고 있었고 또 외국에서 만난 외국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별 뜻 없이 영어 A로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를 처음 만나 건 3년 전입니다. 그날만큼은 똑똑히 기억합니다. 3년 전 9월 초로 한국은 굉장히 더웠습니다. 태풍 하나가 지나가고 이제 좀 선선해지나 싶었는데 웬걸 더 푹푹 찌는 때였습니다. 되레 태풍이 끌고 온 습기 때문인지 견디기 힘든 무더위가 이어지던 때입니다. 제가 이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태어나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 친구 하나가 영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다시 생가해보니 교환학생이었습니다. 뭐, 그것도 유학이라면 유학이겠지요. 아무튼 그 친구는 이미 영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은지 1년 되었고 한국으로 들어오기 직전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작은 중소기업 한 곳에서 이제 막 취직이 결정되던 때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일하기까지 2주 정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취직 소식을 알렸고, 그때 다른 친구들이 축하와 함께 시간도 있으니 이 기회에 영국이나 한번 가보라고 하더군요.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해외여행에 로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해서 기대보단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음엔 반은 농담, 반은 지나가는 말로 영국 여행을 던진 친구들이 점점 더 진지해졌습니다. 이럴 때 아니면 니가 언제 외국을 가보냐, 그래도 걔가 있을 때 가는 게 좋지 않겠냐, 맨체스터 들려서 박지성 레플리카 사와라 - 이것도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등.  그런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저도 점점 솔깃해졌습니다. 그러게 생각도 안 하던 영국 여행을 떠나게 됐습니다.


비행기 값은 제 생각보다 비쌌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다른 곳을 거쳐서 가는 티켓이 바로 가는 것보다 싸더군요. 사실 한 곳을 더 들렀다 가는 건데 가격은 왜 더 싼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그런 큰돈을 한 번에 쓰는 건 처음인지라 직항은 안 되겠고 경유하는 것을 알아봤습니다. 아마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 크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그게 비행기 티켓을 살 때 조금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경유하는 도시들이 어딘지 몰랐기 때문에 어디를 거쳤다 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냥 비행기를 타면 되니까 그 도시들을 알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생판 처음 듣는 곳을 혼자서, 그것도 말도 안 통하는 상황에서 간다는 건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걔 중에는 이스탄불,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같이 한 번쯤은 들어본 곳도 있었고, 헬싱키나 바르샤바처럼 알듯 말듯한 곳도 있었습니다. 정말 진지하게 이것 때문에 직항을 살까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때 파리 경유 티켓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실 파리도 모르는 건 매한가지만 다른 곳들에 비해서는 굉장히 익숙했습니다. 프랜차이즈 빵집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유명한 도시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파리 경유 런던행 비행기 티켓을 샀습니다. 



비행 일정을 보니 파리에서 8시간을 대기해야 했습니다. 외국 나가는 게 처음이다 보니 공항에서 대기한다는 것 자체를 아예 생각도 못했습니다. 티켓 예약을 마치고 영국에 있는 친구한테 일정을 알려줬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군요. 진작 말했으면 자기도 파리로 가고 거기서 며칠 보내고 영국으로 같이 들어왔을 건데 하고 말이지요. 제가 그런 걸 알았겠습니까? 그냥 영국을 가야 했고 그래서 영국 가는 티켓을 샀을 뿐인데요. 친구 반응에 뭔가 짜증이 났습니다.


친구가 8시간 동안 뭐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물론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공항에 있어야지요. 그랬더니 친구가 파리 시내라도 갔다 오라더군요. 8시간 대기이니 에펠탑이라도 보고 오라더군요. 그런데 관심 없는 거 알지만 막상 보면 생각보다 괜찮다면서요. 솔깃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안될 일이었습니다. 티켓 사기 전에 친구한테 먼저 말할걸 하며 후회가 되더군요.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습니다. 저는 친구에게 생각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제 짐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여름인지라 챙기는 옷들도 부피가 작았고, 친구가 영국은 오후 이후부터는 생각보다 쌀쌀할 수 있다고 해서 얇은 바람막이 하나 같이 챙겼습니다. 혹시 물이 안 맞을 수 있으니 소화제나 위장약 같은 것도 챙기라고 해서 그런 비상약도 좀 넣었고, 슬리퍼도 하나 가져오라더군요. 그 외에 선글라스랑 패드 그 정도뿐이었습니다. 혹시 친구가 원하는 한국 식재료나 인스턴트라도 좀 챙기려 했는데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지금 한식당에서 알바해서 한국음식을 매일 먹고 있고 되레 자기도 현지 음식 먹을 일이 적다고 했습니다. 자기 집에 식당에서 받은 라면이나 3분 카레 같은 것도 있고 고추장이나 간장 같은 것도 다 있으니 와서 먹으라더군요. 여차하면 한인마트에서 사도 되는데 아무래도 가격이 비싸니 혹시 제가 먹고 싶을 만한 게 있으면 챙겨 오라더군요. 저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서 아무것도 안 챙겼습니다. 우선 해외여행 자체가 처음이라 제가 무엇을 먹고 싶어 할지 몰랐습니다. 



1. 공항 안


무식하면 용감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전 그러지 못했습니다. 모든 게 무서웠습니다. 여러분들은 고도 수천 미터 상공을 몇 시간이고 시속 수백 킬로미터로 달린다는 게 아무렇지도 않으신가요? 단 1미리의 틈도 없이 밀폐된 공간에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수 백 명과 몇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아무 걱정도 안 되시던가요? 거기다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손발이 벌벌 떨렸습니다. 제 옆자리에 외국인이라도 타면 어떻게 해야 할지... 혹시 저에게 말을 걸어온다면요?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버버 거리는 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괜히 런던을 간다는 후회가 솟구쳤습니다. 괜히 그 친구가 런던에서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비싼 돈 내고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니.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 때문에 공항 리무진 안에서 한숨도 못 잘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공항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자 제 걱정은 한숨 나아졌습니다. 모두 저처럼 커다란 캐리어 하나씩은 밀고 있었고, 등 뒤에는 빵빵한 백팩을 메고 있더군요. 개중에는 캐리어 세, 네 개씩 갖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고, 무슨 촬영을 가는 건지 아님 이사라도 가는 건지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인 상자 여러 개를 싣는 사람들도 보이더군요. 그 광경이 제게 왜 위안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아마 군중 속에 숨을 수 있기 때문이라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다들 비슷한 차림에 어딘가로 비행기를 타고 간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이니까요. 저도 그중 한 명이었고요. 물론 그 속에는 떠나는 누군가에게 작별 인사만 하고 돌아서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많아야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리고 그때만 해도 제 눈에는 캐리어를 들들 끌고 가는 사람들만 보였으니까요. 또 당연히 외국인들도 보였습니다. 많은 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한, 아니 걱정한 것보단 그렇게 많지 않더군요. 세계 제일의 국제공항이니 어쩌니 하는 소리에 당연히 외국인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더군요.


조금 잠잠해지나 싶던 제 걱정과 스트레스는 체크인을 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 합류하면서 다시 일었습니다. 제가 타는 비행기가 외국 - 아마 프랑스 겠지요 - 항공사라 처리하는 사람이 외국인이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혹시 몰라 제 이름을 소개하고,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가려고 한다, 여행하려고 간다와 같은 입국심사용 답변도 영어로 달달 외우고 혹시나 싶어 적어 오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 봤자 상대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을 텐데 무슨 소용일까 싶네요. 아무튼 그렇게까지 나름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데스크 상단 모니터에 적힌 'France'라는 단어를 보고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준비했어야 하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왜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설명하긴 어려운데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전 그때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제 앞뒤로 줄 서있는 사람들이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준비했던 말들을 계속 속으로 되새길 뿐이었습니다. 어느덧 제 앞에 두 사람만 남았고 곧 제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My name is... I'm going to London... blabla. 


매거진의 이전글 무용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