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서 피사체의 중요성
최근 2-3주 동안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마라톤 시청했다. 처음 보는 작품, 예전에 본 작품을 다시 본 것까지 다 세어보니 총 13편 정도 본 것 같은데, 홍상수 감독이 매년 작품을 최소 하나 이상 내는 허슬러다 보니 아직도 그의 필모에서 보지 못한 영화들이 꽤나 많다. 도덕성은 몰라도 적어도 성실성 관련해선 홍상수 감독을 비난하기 어려울 것 같다.
사실 예전 글 (https://brunch.co.kr/@mchoi31/23)에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썼던 내가 왜 뜬금없이 홍상수 감독 작품을 몰아서 시청했는지 궁금해하실 분들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보게 된 계기는 매우 단순하다. 나는 별다른 외부 저녁 일정이 없는 날은 무조건 영화 1편은 보고 자려고 하는 편인데, 주로 운동 및 샤워 등을 마치면 대충 10시 반에서 11시 정도가 된다. 그런데 나는 영화를 보다 중간에 끊었다가 다시 보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고, 새벽 늦게까지 영화를 보고 자면 다음날 아침에 출근할 때 너무 힘들다. 그러다 보니 끝까지 다 봐도 12시 반쯤에는 잘 수 있는 100분 미만의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들을 찾게 되었는데, 홍상수 감독의 최근 작품들 중에 100분 언저리의 러닝타임을 가진 작품들이 많았다.
그래서 101분짜리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시작으로, 91분짜리 <그 후>와 92분짜리 <소설가의 영화>를 연이어 보게 되었는데, 내가 알던 예전의 홍상수 감독 영화들과 뭔가 느낌이 많이 달라져있었다. 사실 홍상수 감독이 안티가 많은 이유는 그의 영화들은 거의 다 "남녀가 만나서 술을 진탕 먹으며 주구장창 선문답스러운 대화를 하다가 허름한 여관에 가서 섹스하는 이야기"로 요약 가능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는데, 심지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주연으로 출연했던 유지태 배우마저 그러한 비판을 한 적이 있다.
그 외에도 매번 반복되는 설정이 많은데, 주요 캐릭터들은 대부분 다 배우, 작가, 시인, 화가, 평론가 등 예술계(주로 영화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남자 주인공은 거의 항상 영화감독이거나 교수(아니면 감독 겸 교수)에 미혼의 여성(주로 제자)과 불륜 관계인 유부남이다. 그리고 찌질하고 비겁한 남주는 어떻게든 여자와 한번 자보려고 매번 "예쁘다", "매력적이다", "아름답다" 류의 칭찬이나 사랑한다는 고백의 말을 늘어놓는데, 특히 비좁은 술자리에 2-4명의 배우들이 소주/막걸리병으로 빽빽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길게 대화하는 장면은 거의 홍상수 감독의 전매특허라 봐도 무방하다.
Q: 연기나 연출에서는 그 부분이 힘들지 않나? 이번 작품 경우에도 실제 경험이 영화에 많이 투영된 것 같았다.
A: 투영되어 있겠지만 다는 아닌 것 같다. 자기 이야기만 하는 건 별로 재미가 없다. 홍상수 감독처럼. 이제 별로 기대도 안돼(웃음).
Q: 홍상수의 스타일이 별로인가?
A: 저예산으로 찍더라도 좀 발전하거나 다른 형태의 접근을 했으면 좋겠는데, 왜 같은 이야기를 장소만 바꿔서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Q: 그러나 어떤 소설가는 예술가는 평생 동안 한 가지 테마를 변주한다고 말했다.
A: 변주를 해야지. 변주를 안 하면서 계속 똑같으니까.
-유지태 배우와 GQ 매거진의 2008년 인터뷰
하지만 이번에 본 비교적 최근에 나온 작품에는 예전에 늘 보던 술자리에서 싸구려 여관방에서의 베드신으로 이어지는 전개가 없었고, 막상 보니까 생각보다 괜찮았다. 특히 미스터리 한 검은 옷 남자가 등장해 초현실적인 느낌이 들고, 김민희 배우가 정말 예쁘게 나온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인상 깊었는데, 그러다 보니 김민희라는 연인/내연녀의 등장으로 인해 홍상수 감독의 스타일이 변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김민희 배우가 처음으로 홍상수 감독 영화에 출연했던 작품인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121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이어서 시청하게 됐는데, 이 영화를 보니 홍상수 감독의 변화를 확연히 눈치챌 수 있었다.
정확히 글로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설정은 여전히 불륜인 경우가 많지만, 예전 작품들은 어느 한쪽도 포기할 용기는 없지만 내연녀를 떠나보내긴 싫은 남자 주인공의 비겁함과 찌질함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최근 작품들은 뭔가 시간과 기억, 그리고 행동과 선택의 인과관계 같은 주제를, 그것도 여자 주인공의 시점에서 다루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예전에는 우디 앨런에 가까웠다면 요새는 약간 찰리 카우프먼과 비슷하게 진화했달까? 그리고 나는 이 진화의 촉매제는 무조건 김민희 배우라고 생각한다.
일단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 배우가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의 모든 영화에 김민희 배우가 나오기 시작했고, 김민희 배우는 모든 영화에서 너무 예쁘게 나온다. 물론 원래도 예쁜 배우지만, 촬영된 영상에서 감독의 피사체에 대한 강한 애정이 느껴져서 더욱 예뻐 보인다. 그녀는 말 그대로 홍상수 감독의 "뮤즈"로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 스타일을 통째로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좀 더 나가면, 홍상수 감독의 커리어는 김상경 배우를 자신의 자전적인 캐릭터로 자주 사용했던 찌질한 남주 관점의 영화 위주였던 "김상경 시기"와 김민희 배우와 만난 후 여성의 시선/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 "김민희 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만큼 영화라는 예술에서 피사체의 중요성과 영향력은 엄청난 것 같다. 홍상수 감독처럼 해외 영화제 수상 경력도 화려하고 (대중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의 작품관에도 이렇게나 영향을 미칠 정도로.
하튼 "김민희 시기"의 작품들을 보니 이동진 평론가가 가장 좋아하는 -"김상경 시기"와 "김민희 시기" 사이에 나온-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에도 관심이 생겨 <북촌방향>, <옥희의 영화>, <하하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연이어 시청했다. 이쯤부터는 러닝타임은 더 이상 고려사항이 아니었고 순수하게 홍상수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한 관심이 생겨버렸다. 그리고 이 시기의 작품들 역시 내가 예전에 알고 있던, 그리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홍상수 감독의 초기작과는 달랐고, 다 꽤 재밌게 시청했는데, 그중에서는 나는 <옥희의 영화>가 가장 좋았다.
그러다 보니 홍상수 감독 영화에 재미를 붙인 지금, 예전에 별로라 생각했던 초기작들을 다시 보면 혹시 예전과 다른 느낌을 받을까 싶어서 <오! 수정>,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을 연이어 시청했다. 그런데 다시 봐도 예전과 똑같은 이유와 느낌으로 전부 그저 그랬다. "극장傳"과 "극장前"으로 나뉜 구성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극장전> 빼고는. 홍상수 영화 중에 내가 별점 4점을 준 영화가 딱 2개 있는데, 그게 바로 <극장전>과 <극장전>과 비슷하게 1부는 "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 2부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로 구성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인데, 아무래도 나는 뭔가 구성이 기발하고 특이한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아 사족으로 김상경 배우가 많이 출연한 홍상수 감독의 초기작들을 보다 보니, 문득 김상경 배우와 현빈 배우, 그리고 이동준 배우가 되게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동준 배우가 현빈의 미래 모습이라는 소리는 예전부터 유명했지만, 조금 찾아보니 김상경 배우도 예전에 현빈 사촌형으로 오해받은 적이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 것을 보면 셋이 뭔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막내 동생과 큰 형, 그리고 작은 아버지 같아 보인다고 느끼는 게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다.
사실 최근에 그렇게 홍상수 감독 영화를 많이 봤는데, 대부분의 작품은 (아무 의미도 없는 나의 개인적인 별점이지만) 3에서 3.5점 수준이었다. 심지어 2.5점을 준 작품도 두어 개 있다. 근데 그런데도 뭔가 다른 작품을 계속 찾아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특히 최근작들은.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까? 어렸을 때 본 초기작들이 그리 와닿지 않았던 것처럼, 최근작들도 내가 어렸을 때 봤더라면 별로라 생각했을지 궁금하긴 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홍상수 영화는 성인들을 위한 영화라는 것이다. 어차피 홍상수 감독이 상업적 흥행을 노리고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아니긴 하지만, 원한다면 충분히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처음부터 청불 등급을 신청하는 이유가 납득이 간다. 어느새 이런 소신? 강단? 마저 멋지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내가 확실히 홍며들긴한 것 같다.
예전부터 늘 청소년은 내 영화를 안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청소년이 제 영화를 봐야 뭘 느끼겠어요? 제 영화는 인생의 한 사이클을 산 사람, 20대 후반은 돼야 볼 수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죠. 제가 청소년들을 무시해서가 절대 아니다. 제 영화를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인생 경험과 연륜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려면 최소한 겪어야 할 일들이 있지 않나. 그런 걸 고려해 제가 영등위에 등급 신청할 때 처음부터 청소년 관람불가로 요청했다.
-홍상수 감독의 2012년 인터뷰 내용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