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 영화 속의 낭만 밖에 모르는 남자들
정말 갑자기 잡힌 2박 4일 일정의 뉴욕 출장을 다녀왔다. 부랴부랴 짐을 싸서 비행기를 탔는데, 비행시간이 15시간이 넘는데 비행기에 보고 싶은 영화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뉴욕을 가는 김에 우디 앨런 감독의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을 틀었다.
나는 원래 우디 앨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감독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감독으로서는 약간 홍상수 감독에 대한 감정과 비슷한데, 확고한 마니아 층이 있고 평론가들이 사랑하지만, 막상 필모 중 내가 재밌게 본 영화는 거의 없다. 사실 홍상수 감독도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러고 보니까 둘 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닮았는데, 우디 앨런은 어나더레벨이다. 영화계에서 로만 폴란스키나 하비 와인스틴 정도 빼고는 최악 아닐까?
개인적인 호불호와는 별개로 우디 앨런은 거의 모든 영화가 뉴욕이 배경일 정도로 뉴욕을 사랑하는 찐 뉴요커로 유명하다. 또 다른 유명 뉴욕 러버로는 마틴 스콜세이지(Martin Scorsese; 본인은 본인 이름을 스콜쎄씨라 읽지만 대중적으로는 다 스콜세이지라 읽는 게 웃긴) 감독이 있는데, 아쉽게도 나의 고향 LA를 앨런이나 스콜세이지 같이 사랑하는 거장은 아직 없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LA를 배경으로 한 영화 중에 LA가 아주 근사하게 나온 영화도 <라라랜드> 정도밖에 없는 것 같은데, 짐 캐리, 조이 데샤넬 주연의 <예스맨>도 LA를 예쁘게 찍은 거 같아서 주위에 적극 추천하곤 한다.
사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을 보기 전에 이걸 먼저 봐서 그냥 한번 언급해 봤는데, 영화 자체도 꽤나 재미있고 조이 데샤넬이 <500일의 썸머>와는 완전 다른 매력으로 예쁘게 나와서 혹시 아직 안 보신 분들이 있다면 한번 보시길 추천한다. 반대로 LA의 위험한 동네들을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으로 담아낸 작품들 중엔 덴젤 워싱턴, 에단 호크 주연의 <트레이닝 데이>와 톰 크루즈 주연의 <콜래트럴>, 그리고 <분노의 질주 1> 정도가 있겠다.
그나저나 앨런의 60년 넘는 감독 인생에서 재밌게 본 영화가 없었는데, 의외로 상대적으로 최근에 나온 두 작품은 내 맘에 들었다. 바로 <레이니 데이 인 뉴욕>과 <미드나잇 인 파리>인데, <미드나잇 인 파리>는 오늘 글의 메인 주제라 조금 나중에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예정이고, <레이니 데이 인 뉴욕>에 대해서 조금만 먼저 이야기해보겠다. 사실 우디 앨런의 후기 작품들 중에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평가가 좋은 건 <블루 재스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 차력쇼(?)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고, 그만큼 연기가 뛰어났다는 이야기니 그냥 가볍게 무시해 주셔도 좋다.
어쨌거나 앨런은 일단 뉴욕, 파리, 샌프란시스코든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도시를 아름답게 찍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사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각본이나 배우들의 연기나 딱히 대단한 부분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취향을 저격한 이유는 딱 두 가지이다. 멋들어진 뉴요커 패션의 티모시 샬라메가 주구장창 쳐대는 근사한 피아노 음악,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J.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과의 유사점이다.
극 중 (캐릭터 이름도 참 적절하게 잘 지은) 개츠비는 로맨틱한 것들에 집착하는 대책 없는 "낭만" 밖에 모르는 바보인데, 왠지 어린아이들의 순수함에 집착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이 생각나게 한다. 개츠비와 홀든 모두 명문 사립학교를 나온 뉴욕 토박이 부잣집 아들인 것도 비슷하고, <레이니 데이 인 뉴욕>과 <호밀밭의 파수꾼> 둘 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일종의 성장 이야기(영어로는 coming of age story라 한다)인 부분도 동일하다.
하튼 나는 개츠비가 여자친구 없이 보낸 하루동안 겪고 느낀 많은 일로 인해 뉴욕에 남겠다고 결정하는 결말이 아주 맘에 들었다. 개츠비는 확실히 시골에 있는 야들리 대학교나 예쁘지만 머릿속은 텅 빈 금발 미녀 여친과는 안 어울린다. 뉴욕에서 낭만을 쫓는 자유로운 영혼이 딱이지.
어쨌든 고령의 나이에도 본인의 스타일을 바꿔서 이런 괜찮은 영화들을 만들어 내는 걸 보면, 우디 앨런 감독은 (인간성과는 별개로) 확실히 난 놈이긴 한 것 같다.
그럼 이제 드디어 오늘의 메인 주제인 우디 앨런 감독의 2011년 작 <미드나잇 인 파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사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포인트로 꼽는 파리의 아름다운 모습이나 (물론 아름답긴 하다) 좋은 배우들이 정말 잘 재현해 낸 20세기 초의 예술가들과 어울리는 스토리보다는 주인공인 길에게 여러모로 공감이 많이 가서 이 영화를 참 좋아한다 (물론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의 주인공 이름인 “개츠비“가 나온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살바도르 달리, 파블로 피카소 등 과거의 거장들과 교류하는 스토리라인은 N성향이 엄청나게 강한 나로서는 정말 흥미롭고 매력적인 설정이긴 하다).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인 길은 헐리우드에서 꽤나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지만 돈이나 성공보단 “낭만”을 더 중요시하는, 비 오는 파리를 걸을 수만 있어도 행복한, 자기가 좋아하는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시나리오 대신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데, 쓰고 있는 소설도 빈티지 골동품 등을 파는 노스탤지어 샵에서 일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정말 과거를 동경하는 사람스럽다.
반면 길의 약혼자인 이네즈는 길과는 정반대의 성향이다. 길이 소설 쓰는 것을 응원하기는커녕, 길이 집필이 잘 안돼서 고뇌하고 있으면 본인이 잘하는 시나리오나 쓰라는 초치는 소리만 한다. 그리고 한껏 얕고 엉터리 지식만 늘어놓는 허세쟁이 교수 폴을 엄청 멋지다고 생각하고 끌려한다. 폴은 진짜 보면 볼수록 ㅂㅅ 같은 캐릭터인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로댕, 모네, 와인 등 모든 분야에서 아는 체를 하고, 전문가인 가이드한테도 자기가 맞다고 우길 정도의 고집과 오만함은 덤이다.
참고로 영어로 폴 같이 쥐뿔도 모르면서 헛소리만 늘어놓는 사람을 표현할 땐 주로 “he is full
of shit”, 혹은 ”he just talks out of his ass”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편이다. 한국어로는 “개똥 같은 소리만 한다”, 혹은 “말이야 방구야?” 같은 느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네즈는 뭔가 폴을 되게 흠모하고, 맨날 길 앞에서 폴 편만 든다. 특히 폴이 헛소리를 해서 길이 제대로 알려주려고 하면 폴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조용히 하라고 할 땐 보는 내가 다 짜증이 난다. 아마도 그래서 길이 아드리아나에게 더욱 빠져든 게 아닐까? 그리고 초반부터 꾸준히 떡밥을 뿌려놓더니 결국 이네즈가 폴과 바람을 피는 결말로 이어진다.
사실 길도 본인과 이네즈가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드리아나에게 약혼자가 있다고 이야기하며, 이네즈와 사소한 것들은 잘 맞는데 정작 중요한 것들이 안 맞는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잘 맞는다고 예시를 든 것들이 둘 다 피타 브레드를 좋아한다는 등의 정말 사소하고 짜친 것들이라 웃긴다. 그리고 달리에게도 결혼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며, 아드리아나에게 끌리지만 자기는 이네즈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하는데, 바로 이어서 결혼을 할 거라면 당연히 사랑해야지… 이런 식으로 자기 최면을 걸듯이 혼잣말을 하는 게 누가 봐도 진짜 사랑하는지 확신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중에 길은 예전에 폴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르치려 들었던 가이드를 다시 찾아가 로댕이 부인과 정부를 동시에 사랑했다고 했는데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게 실제로 가능하냐고 물어보는데, 이때 가이드의 답변이 아주 재미있다. 길은 아마도 그는 실제로는 아드리아나만 사랑하고 이네즈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고 싶어서 물어본 거 같은데, 가이드는 예상과 달리 두 명을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면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사고방식이 참 열려있는 것 같다. 보법이 다르다고나 할까?
어쨌든 길 스스로도 본인과 이네즈는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고, 우연히 구한 아드리아나의 일기장에서 그녀도 그를 좋아한다고 쓴 걸 읽고 나서는 아드리아나에게 직진하려 하지만, 아드리아나도 길처럼 예술과 낭만 밖에 모르고, 과거를 동경하는 사람이다 보니, 길에게는 황금기인 1920년대가 현재인 그녀는 그녀의 현재는 따분하다며 혼자 벨 에포크 시대에 남아버린다. 낭만과 과거에 대한 동경이란 공통점으로 서로에게 끌렸지만, 같은 이유로 결국 이어지지 못하는 게 참 역설적인데, 역시 아무도 본인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현재를 황금기라 생각하지 않고, 지나간 과거는 늘 미화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게 바로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것 같다.
비록 길은 낭만 타령만 하다가 엄청난 부자에 예쁘기까지 한 약혼자를 놓쳐버렸지만, 나는 솔직히 길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취향이 비슷해 낭만과 예술에 대해 밤새 이야기 해도 질리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고 축복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최근에 영감을 주는 사람이 생겼는지, 오랫동안 안 쓰던, 쓰고 싶다는 마음도 안 들던 글이 갑자기 술술 써지고 글 쓰고 싶은 주제나 영화들이 막 떠오른다. 딱히 대단한 게 아니라 공통된 관심사나 비슷한 취향, 아니면 취향이 다르더라도 서로 진지하게 서로의 의견이나 느낀 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영감이 생긴다. 그만큼 인간관계에서 취향이나 관심사가 중요한 것 같다.
진짜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긴 하지만 (영어로는 아마 고장 난 음반처럼 같은 노래만 계속 반복 재생한다는 표현인 “I know I sound like a broken record…”라고 쓸 것 같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변호사란 직업이랑 잘 안 맞는 것 같다. 벌써 10년이 넘게 해 왔지만 아직도 한 번도 일에 대해서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누구에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딱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지금보다 돈을 못 벌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일상에 대한 글을 쓰거나, 노래 가사를 작사해보거나, 영화 시나리오를 써보거나… 뭔가 창의적이고, 내 안에 있는 열정 넘치는 아이를 깨우는 일을 해보고 싶다. 만약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나도 길처럼 선뜻 그 클래식 푸조에 올라타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길은 약혼자인 이네즈도 잃고 아드리아나도 놓쳐버렸지만, 역시 영화는 영화라 그런지 그게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다. 영화 중간에 길처럼 콜 포터를 좋아하는, 그리고 길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골동품 가게에서 일하는 파리 출신 아가씨를 만나는 장면이 잠깐 나오는데, 사실 그녀야말로 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영화 마지막에 우연히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갑자기 비가 오자, 비 오는 거리가 낭만적이니까 좀 걷자고 하니 똥 씹은 표정으로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바로 차에 타버렸던 (전)약혼녀와 예비 장모와 달리, 자기는 비에 젖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파리는 비 올 때 가장 예쁘다고 말해주는 가브리엘과 비 오는 파리를 걸으며 끝나는 엔딩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그리고 이 영화의 제목을 괜히 어색하게 <파리에서의 시간 여행> 뭐 이딴 이상한 한국어로 의역하지 않은 것도 좋다. 아직도 생각하기만 해도 빡치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같은 제목이 안 붙어서 다행이다. 아 그냥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으로만 뒀어도 참 좋았을 텐데…
하튼 오랜만에 받은 영감이 사라지기 전에 조만간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 글로 돌아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