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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 대한 이야기

쉽게 해소되지 않는 내면의 깊은 외로움

by 마잌

이전 글에 영감 충전(?)이 됐다고 조만간 새로운 글로 돌아오겠다고 큰 소리를 뻥뻥 쳤었는데, 또다시 2주가 넘게 걸렸다. 그런데 이번엔 평소처럼 바쁘고 게을러서 늦은 건 아니다. 사실 바로 글을 쓰기 시작하긴 했는데, 막상 쓰다 보니 하나의 글에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많은 내용과 주제들을 모두 자연스럽게 연결해서 담기가 꽤 어려웠다. 내가 꽤나 좋아하는 영화이다 보니 최대한 잘 써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생각만큼 잘 나오지 못한 것 같아서 조금 속상하다. 어쨌든 이 글은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나는 이 영화의 제목을 그냥 영문 원제목 그대로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으로 뒀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하 <로인트>로 지칭하겠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왕 영문 원제목을 언급한 김에 "lost in translation"이라는 표현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자면,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번역/통역 과정에서 원래 전하고자 했던 말의 의미나 뉘앙스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번역/통역이라고 하니 뭔가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 모국어가 다른 사람들끼리 대화를 할 때 언어적 장벽으로 인해 주파수가 살짝 안 맞는 느낌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나는 <Lost In Translation>이라는 원제는 표현하고 싶은 감정과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 아쉬움, 그리고 100% 연결 및 공감이 되지 않는 아쉬움에서 발생하는 외로움에 포커스를 맞춘 정말 잘 지은 제목이라 생각한다.

"Everyone wants to be found." 내가 가장 좋아하는 포스터 버전이다.

즉,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소통의 부재 및 어려움이 만드는 내면의 깊은 외로움에 대한 영화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한글 제목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면 안 됐다고 생각한다. 영화 포스터에도 ”누가 나를 알아봐 줬으면, 나의 속마음을 이해해 줬으면 “ 같은 느낌의 Everyone wants to be found."라고 적혀있는데, 만약 정말 이 영화가 "사랑"에 대한, 사랑이 메인 주제인 영화였다면 "Everyone wants to be loved.“ 같은 문구가 적혀있지 않았을까? 하튼 국내 배급사에서 이 훌륭한 영화에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수준 낮은 제목(특히 저 물음표가 안 좋은 쪽으로 화룡점정을 찍는다)을 붙이는 바람에 뭔가 유치한 양산형 로맨틱 코미디 영화 느낌이 나버려서 매우 아쉽다.

저 하트 모양 물음표가 매우 킹받는다.

외로운 두 사람의 애매모호한 관계


<로인트>는 혼자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샬롯” 역의 스칼렛 요한슨(미국인이고 본인 포함 모든 매체에서 조핸슨이라 읽는데 굳이 덴마크 식으로 읽는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은 참 신기하다)의 팬티를 클로즈업으로 -그것도 꽤 오래- 잡으며 시작한다. 샬롯은 사진작가인 남편을 따라 잠깐 일본에 와 있는데, 남편은 늘 일로 바쁘고 샬롯은 하루의 대부분을 무료하게 혼자 보낸다. 말도 안 통하고 전혀 모르는 곳에 있다 보니 외로움과 따분함이 더욱 배가된 부분은 있지만, 사실 일본에 오기 전부터 이미 남편과의 관계가 썩 좋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포인트들이 많다.

임팩트 있는 오프닝

빌 머레이가 분한 “밥”은 왕년의 유명 배우인데, (아마도) 미국 현지에서는 이미 한물 간 상태라 머나먼 일본까지 산토리 히비키 광고로 돈을 벌러 온 것으로 보인다. 광고 출연료로 무려 20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건 야마자키나 히비키 같은 일본 위스키들의 인기가 많아지기 전인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예전에 <헤어질 결심> 글에서 한물갔다는 표현으로 “washed up”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비슷한 표현으로는 “he/she is a has-been.”이 있다. 한때 잘 나가고 유명했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은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인데, 밥은 has-been이라고 해도 몸값이 매우 비싸다.


하튼 밥 역시 와이프와의 관계에서 매우 뿌리 깊고 오래된 권태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외로움의 주된 원인이 남편에 대한 권태감 및 실망감인 샬롯과 달리, 한때 잘 나가던 스타의 위치에 있던 밥은 일본까지 와서 우스꽝스러운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해야 하는 사실에 대한 현타? 상실감? 영광의 시절에 대한 향수? 등 추가적인 외로움을 느끼게 만드는 복합적인 요소들이 많다. 그리고 마치 <화양연화> 속 모운과 려진의 배우자들처럼 목소리로만 수차례 등장하며 정말 의미 없고 짜친 질문들로 밥을 피곤하게 만드는 밥의 부인도 한몫하는 것 같다.


비좁은 엘리베이터 안 키가 작은 일본인 회사원들 사이 혼자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모든 면에서 너무나 다른 밥, 대화와 소통의 단절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이는 불투명한 우산을 쓰고 있는 영화 포스터 속의 샬롯을 보면 <로인트>는 분명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나는 샬롯과 밥 중 더 외로운 사람은 밥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키가 제일 큰 것뿐인데 왠지 모르게 외로워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밥은 정말 시니컬한 캐릭터이다. 그가 하는 거의 모든 말이 다 sarcastic 하다. 한국어로는 빈정대는? 비꼬는? 투 정도로 표현할 텐데, sarcastic도 뭔가 딱 들어맞는 한국어 표현이 없는 단어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호텔 바에서 만난 밥과 샬롯은 서로의 외로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의외로 쉽게 가까워진다.


얼마 전 우리 팀 막내(2000년 생)와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이 영화의 주제는 외로움이다라는 점에 공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친구와 내가 공통으로 이야기한 게 나를 아껴주고 챙겨주는 누군가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연인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느껴지는 쉽게 해소되지 않는 내면의 깊은 외로움이라는 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알아채 주고,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대책 없이 빠져들게 된다. 아마도 밥과 샬롯도 그렇게 서로에게 빠져든 게 아닐까?

"For relaxing times, make it Suntory time."

나는 지금까지 이 영화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주구장창 주장해 왔는데, 그건 밥과 샬롯의 "사랑"이 메인 주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이지, 두 주인공 간에 이성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호감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가 애정인지 우정인지, 만약 둘 다라면 각각의 비율이 어느 정도 되는지 역시 익숙하지 않은 일본이란 나라와 문화 속에서 살짝 "lost in translation" 되어 버린 게 이 영화의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아마 밥과 샬롯 본인도 자기가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대방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100%는 이해하지 못한 채 헤어졌을 것이라 본다.

이럴 때는 연인 같고
이럴 땐 또 친구 같다

샬롯은 밥과 처음으로 대화를 했을 때 밥이 결혼한 지 25년이나 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바로 포르쉐를 샀냐고 묻는데, 미국에선 midlife crisis(영화에선 중년의 위기로 번역된)를 겪는 아저씨들이 빨간 스포츠카 (주로 포르쉐)를 사는 것으로 그것을 해소하는 게 어느 정도 밈화 되어 있다. 사실 인생의 절반 가까이 지난 나이까지 쉴 틈 없이 달려오며 지치고 현타가 온 남자들에게 활력소가 되어줄 만한 것은 별로 없다. 포르쉐가 아니라 그보다 몇 배는 더 비싼 슈퍼카인 부가티, 한남 나인원 펜트하우스를 사더라도 그 공허함을 채워주진 못한다. 경제적 자유와 인생 후반기의 편안한 삶을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정작 그렇게 모은 돈이 딱히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이 더더욱 midlife crisis를 극복하기 힘들게 만드는 것 같다.


샬롯은 영화 막바지에 밥에게 미국에 돌아가면 꼭 빨간 스포츠카를 사라고 이야기하는데, 내 생각에 밥은 더 이상 스포츠카가 필요 없다. 샬롯과의 일본에서의 즐거운 추억들로 인해, 그리고 샬롯이 그의 내면의 깊은 외로움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줌으로써 이미 그의 midlife crisis는 치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샬롯 역시 밥으로 인해 많은 치유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용기를 얻었기 때문에, 사실 마지막 작별 장면에서 밥이 샬롯에게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그래서 소피아 코폴라 감독도 일부러 제대로 안 들리게 찍고 마무리한 게 아닐까 싶다.

근데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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