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어느 날의 카페, 내가 앉은자리에서 멀찍이 세 명이 앉아있었다. 이태원 참사 후 몇 주가 지난 때였다. 그들의 대화가 의도치 않게 들렸다. '세월호처럼 장사를 하려고 한다'는 말.
나는 2015년경부터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을 했고 세월호를 취재하던 피디님과 일하게 되면서 세월호와 관련된 띄엄띄엄 서로 연결되지 않는 현장들에 계속해서 찾아갔다. 단원고에서 목포에서 광화문에서 유가족을 만났다. 세월호 인양선 바로 앞에서 작은 어선을 타고 인양선에 타지 못한 유가족들과 인근을 맴돌기도 했다. 배를 집어삼킨 바다는 새카맣고 거칠었다. 나는 그 시절을 떳떳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유가족들과 자주 만나면서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들을 위로가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나는 내 위로의 방법이 어설플 거라 걱정했다. 작은 실수라도 할까 봐 잔뜩 몸을 사렸다. 영상에 필요한 질문만 하고, 카메라를 켜지 않을 때면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관찰했다. 가끔 유가족들이 주는 음식과 관심에는 가능한 큰 미소와 함께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손님의 행동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카메라는 항상 그들과 멀었다.
목포에서 세월호 인양이 진행될 때가 기억난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게 나의 마지막 세월호 관련 촬영이었다. 목포신항, 철조망이 쳐져있는 구역에서 파란색 컨테이너를 두 개 놓고 유가족들이 모여 인양선에서 들려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유가족들과 조금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었다. 날씨가 쌀쌀했고 바닷바람이 계속 불어왔다. 유가족 아버지 한 분이 나를 보며 말했다.
이쪽으로 와. 그렇게 하지 말고.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따뜻한 곳으로 다가와 가까이 앉으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이 나의 실패를 증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엉덩이를 들어 조금 더 다가갔으나 끝내 섞여 앉지는 못했다. 이런 마음으로. 이런 몸으로는 무엇도 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두자. 그렇게 결심하고 세월호와 점점 멀어졌고, 2017년 말에는 다른 일을 하게 되면서 세월호 현장에 더는 가지 않게 되었다.
다시 2022년 카페에서 나는 생각했다. 저들은 저렇게 쉽게 이야기하는데 나는 왜 참사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가. 그것이 나에게 질문으로 남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일을 했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을 뿐 애도를 한 적은 없는 것 같다고. 불현듯 떠오른 기억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포로 내려갔다. 세월호가 인양되어 지상에 놓이고는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곳. 내비게이션에 나오지 않는 세월호의 위치를 찾아 헤매다가 파란색 컨테이너 두 개를 발견했다. 위치가 반대쪽으로 옮겨졌을 뿐 과거에 보았던 그때의 컨테이너였다. 철조망에는 여전히 노란색 리본들이 매달려 있었다. 멀리 보이는 세월호 선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음이 들끓었다. 저렇게 큰 배였구나. 바닥에 쓰러져 있던 붉은 영역과 불법 중축된 객실, 큰 프로펠러, 세월이라고 쓰여있는 낡은 글씨. 많은 게 지난 것 같아도 그리 변한 것 같지 않기도 했다.
세월호에 비하면 이태원 참사는 나에게서 거리가 더 멀었다. 이태원을 평소에 잘 찾지 않았고, 핼러윈이라는 문화도 낯설었다. 참사 당시 나는 집에 있었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같이 게임을 하는 익명의 상대방들이 채팅으로 말했다. 지금 이태원에 무슨 일이 난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을 눈으로 담아두고 계속 게임을 했다. 게임을 끝내고 나서야 웹에 접속해 뉴스를 봤고,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지금 어디에 있냐고.
그러나 2014년부터 이어진 마음들, 세월호부터 이태원까지, 그간 떠돌던 마음들은 조금씩 연결되었다. 나는 이제 조금이나마 애도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애도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그 모든 위로의 시도는 실패할 거라는 것. 내 위로는 정확한 위로와는 분명한 격차가 존재하리라. 중요한 건 정확함 그 자체가 아니라 정확함의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격차를 인정하며 좁혀나가려는 시도, 그렇게 가닿으려는 노력, 어떤 방법으로도 그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아가기였다.
나는 그렇게 불확실한 애도를 다시 시도한다. 재난을 기억하자는 말이 어느덧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세월호 참사는 10주기를 지났고 이태원 참사도 2주기를 앞두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죽음이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새롭게 말할 수 있을까. 이것 또한 또 다른 되풀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인간의 뇌는 가혹하리만치 지루한 것을 금방 잊는다. 정말 중요하고, 아름답고, 새로웠던 것들도 잊힌다. 지고지순한 연인관계도 지루해지면 끝이 난다.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순식간에 지루해지고 잊히는 것들에 맞서며 무언가를 기억하고 되풀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 안에 들어있는 메시지는 수차례, 수백 번 혹은 수천 년 동안 반복되었던 것일지라도 그렇게 다시 이야기하고, 쓰고, 말하고, 중얼거리고, 건네는 동안 지루한 것이 새로운 것이 된다. 다시 기억이 된다. 304 낭독회에서 들은 이야기다. 한 작가 분이 오랜만에 유가족을 만나 이렇게 물었다고 했다.
저희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그분은 이렇게 답했다.
저희가 뭘 하고 있는지 지켜봐 주세요.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태도로. 0에서 1로. 침묵에서 발화로. 무에서 유로. 정확한 위로에 다가가기. 실패한 지점에서 다시 나아가기. 그럼 다짐을 되풀이한다.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의 <캠페인즈>에 함께 업로드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