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인현 Oct 30. 2020

030_끝과 시작

한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때 세상은
서로 꼭 맞잡은 두 손에 들어갈 수 있으리 만치 작았다.
웃으면서 묘사할 수 있을 만큼 간단했다.
기도문에 나오는 해묵은 진실의 메아리처럼 평범했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한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中



우리의 삶이 극적으로 변하게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건 의지로 오는 게 아니라 세계에서 날아오는 것이고, 그것에 맞게 되는 사람들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나는 대형 크레인 옆과 높게 올라간 공사장과 흔들 다리를 싫어한다. 그것들은 내게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위험이 될 것만 같다. 


나는 여름과 나의 미래를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한 명의 부재를 떠올린다. 내가 없고, 여름만 남겨졌을 때. 내가 있고, 여름이 없어졌을 때. 무엇이 더 끝에 가까운 순간일지 나는 모르겠다. 그 순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쓸수록 그 생각이 나를 붙잡는다. 대비할 수도, 준비할 수도 없는데도 언젠가는 그런 순간이 올 것만 같아 나는 두렵다.


우리의 세상은 아주 작다. 각자 세상에 나가 많은 일을 하지만 우리에게 진정한 세상이란 2억 전세로 얻은 15평 투룸 그뿐이다. 이러저러한 스케줄로 아주 늦게 집에 갈 때면 우리는 잔뜩 건조해진 언어로 서로를 찾는다. 그날의 수업과 그날의 일과 그날의 사람들에 대한 말을 늘어놓고, 그날의 감정도 슬쩍 옆에 놓는다. 우리는 그 감정이 가장 소중한 것이란 걸 알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물을 주고 싶어서 이야기한다. 오늘, 너는 그랬었구나.


사랑에 대해 쓰려다가 여름을 쓰게 되었고, 지나 보니 꽤 많은 시간이 쌓여있다. 30개의 글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건 우리가 맞잡은 손에 들어갈 만큼 작은 세계다. 세상에는 우리의 일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다. 누군가 태어나고 죽고, 슬퍼하고 기뻐할 일들이 넘쳐난다. 그럼에도 내게 무엇보다 소중한 건 내 손안에 있는 작은 세계다. 그래서 작은 흔적들을 여기에라도 남겨보고 싶었다. 


여기까지 우리의 세계를 기록하고 잠시 쉬어가려고 한다. 물론 언제든 다시 시작할 것이다. 글이 멈추더라도 우리의 삶은 전혀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했던 이 시간들을 누군가가 사랑하길 바라는 마음이 조금 든다.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기를 영원히 바란다.


+

여름에는 오직 여름만 생각하게 된다. 여름이란 계절은 어떤 시절이고, 잠시 머물다 사라지지만 다시 찾아온다. 괴로워하면서도 늘 설렌다. 여름을 통과하고 나면 한 해의 가장 빛나던 시절이 사라진 느낌이 든다. 여름은 바다와 함께다. 두려우면서도 뛰쳐들어가게 만들고, 끝이 없이 무한해 보여서 내가 닿을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조금이다


여름은 부모님에게 받은 이름이 아니라 여름이 스스로 선택한 이름이다. 어째서 여름이 여름인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이전 29화 029_'사랑해' 라는 말을 다시 썼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