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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맛아재 Jun 09. 2020

카드 해지하던 날

나에게 오늘 할 일은 4년 동안 가지고 있던 L카드를 해지하는 일이었다. 어제 해지하려다가 깜빡하고 못해서 와이프한테 잔소리 얻어터지고 오늘은 무조건 해지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출근했다.

3년 전. 지금은 장식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피아노를  120만 원 넘게 구입하고 매달 30만 원씩 L카드를 사용하게 되면 2만 원씩 청구 할인되는 방식이었다. 만들고 싶진 않았지만 30만 원만 쓰면 2만 원 할인되고 또 집 근처에 L마트도 있어서 포인트 쌓기도 쉽고 해서 잘 사용했었는데 드디어 작년에 3년을 다 채웠다. 해지를 해야 했지만 귀찮았다. 이유는 별거 없다.

항상 고객센터 번호 누르고 비밀번호 눌러야 하고 본인 맞는지 확인해야 하고 하는 절차야 그냥 그러려니 하겠는데 늘 해지를 하려고 하면 착한 상담사와의 통화가 불편하다.

그래서 1년을 그냥 해지 안 하고 있다가 와이프한테 걸려서 해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아침 9시가 되자마자 전화를 하려 했으나 이 분들도 시작하자마자 해지 전화받으면 마음이 불편할 거 같아 점심 먹기 직전인 11시쯤 연락을 했다. 역시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대기가 꽤 길었지만 곧 연결이 됐다.

20대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해지를 요청드립니다 라고 했더니 역시나 예상했던 질문이 나온다

"혹시 카드 쓰시면서 불편한 사항 있으셨을까요?

난 결단코 아니라고 했다. 할부가 다 끝났기 때문에 굳이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 해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L카드사에 악감정 없으니까 그냥 해지시켜달라 했다.

그랬더니 또 2번째로 예상한 절충안이 나온다.

고객님. 저희가 평생 연회비 면제되는 카드가 있는데. 그냥 안 쓰셔도 되고 가지고 있으시기만 하면 돼요


라며 슬슬 분위기가 슬퍼졌다.

나도 안다. 아니다. 모를 수 있다. 내 생각으로는 해지 고객의 마음을 되돌리면 상담사들의 고과 포인트가 올라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분들을 최대한 존중을 하며 의견을 듣는다. 뭐 그러다 보면 그들이 내 심금을 울리는 절충안이 나오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고 그대로 해지의 길로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참으로 미안하고 고맙다.

그래도 난 "카드를 가지고 있으면 쓸 거 같아서 괜찮습니다."라고 했더니 상담원은 그제야 알겠다며 포기했다.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상담원들은 이제 끝난 고객이구나 생각을 하고 목소리 톤이 약간 변한 걸 느낄 수 있었는데 이번 상담원은 오히려 좋아했다. 왜 이제야 해지를 하세요 라고 하진 않지만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더욱 친절해졌다.

"우리 고객님. 앞으로 더 좋은 날 가득하시고 항상 건강하세요"


라며 우리 와이프도 쓰지 않는 목소리 톤으로 나와의 마지막 통화를 마쳤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지금까지 해지 상담을 했던 상담원들과는 진짜 다른 분위기였다. 분명 해지하는 거에 대해 내 마음을 되돌리려 애썼지만 고객의 마음이 떠났다는 걸 알고 쿨하게 보내주는 상담사의 태도는 내가 배워야 할 점으로 생각됐다. 아마 내가 상담사였으면 헤어진 여자 친구를 보내는 거처럼 "잘 먹고 잘살아라. 너만 고객이냐?" 너보다 카드 많이 긁어줄 사람 가득이다"  라며 생각했겠지만 해지 절차가 끝난 후에도 변함없는 밝은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해준 상담사가 참으로 고마웠고 미안했다.

차라리 그냥 "다시 생각해볼게요"라고 끊고 다른 상담사에게 해지 신청을 할 마음이 들 정도로.

참고로 난 L카드 직원이 아니다. 글만 보면 홍보팀에서 작성한 글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난 지금 진심으로 타자를 치고 있다.


L카드 이XX 상담사님. 보고 계시면 감사하는 말씀드리오며 앞으로 L카드에서 임원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욕인가요? 아무튼 정말 감사드리오며 L카드 인사팀 분들. 이분 고과 포인트 좋게 넣어주세요.

금일 모두렌탈 카드 해지 고객 상담 받은 사람 검색하면 나올거 잖아요.

다음에 분명 L카드 다시 발급받으면 이xx상담사 때문에 재신청한 걸로 아세요.

감사합니다. 이XX 상담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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