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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Feb 12. 2021

모두들 인생 드라마라고 말하지만

<나의 아저씨>에 딴지 걸기

영화나 드라마는 보는 사람의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서 그 작품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어떤 작품이 누군가에겐 걸작이 될 수도,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다. 간혹 수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작품이 등장하지만, 그마저도 만장일치는 아닐 것이다.


지난 2018년에 티비엔에서 방영했던 <나의 아저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드라마를 본 주위 사람들로부터 꼭 보라는 권유를 귀가 닳도록 들었으며,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 블로그 그 어디에도 이 드라마에 대한 혹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모두 본인의 인생 드라마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뒤늦게 이 작품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의 평가나 반응은 염두하지 않는 내 고집을 꺾은 선택이었다. 심지어 파울로 코엘료까지 극찬을 했다니.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래"라는 심정에 안 보고는 배길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높은 기대는 많은 실망으로 돌아왔다. 나에게는 이 드라마가 결코 인생(에 남을만한) 드라마가 아니다. 전반적으로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나, 그렇게까지 과대평가될 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아저씨>에 대한 불만사항을 얘기해보려 한다. 어차피 이 드라마에 대한 칭찬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쌔고 쌧다.


*<나의 아저씨>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선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보자. 이지안(이지은 배우)은 21세의 어린 여성이다. 대기업에서 근무를 하고 있지만 정규직원이 아닌 파견업체 직원이다. 그녀가 얼마나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고 현재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 있는지는 그녀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그녀의 과거사는 천천히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이지안이라는 캐릭터. 이제 겨우 21살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능수능란하다. 아무리 그녀가 과거의 범죄경력으로 인해 산전수전 다 겪은 캐릭터임을 감안한다 해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박동훈 부장(이선균 배우)에게 온 뇌물을 이지안이 획득하고 처리하는 과정, 영광 대부 사무실에서 광일(장기용 배우)을 피해 도망치는 과정, 도준영 대표(김영민 배우)의 핸드폰을 슬쩍하고 그것을 이용해 파견직 신분으로 회사 대표에게 딜을 거는 과정, 박동운 상무(정해균 배우)를 함정에 빠뜨리는 과정까지. 마치 하나의 첩보전 같은 느낌이다. 이제 갓 스물이 넘은 거의 소녀에 가까운 사람의 계획과 행동으로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지안이 그만큼 거친 인물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일 테지만, 도가 지나칠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이지안은 극 중에서 박동훈과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반말과 반항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 '이지안은 원래 예의가 없는 성격이다'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면, 드라마 속에서 보이는 이지안의 무례함 또한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지안은 이 드라마에서 그래도 되는 사람처럼 그려지고 있다.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은 도준영 대표와의 거래를 성공시키기 위해 박동훈 부장의 핸드폰에 도청 앱을 설치하게 된다. 이 드라마의 메인 스토리는 이 도청이라는 행위 아니면 아예 전개가 되지 않을 정도다. 결국 이지안이 박동훈에게 마음을 열고 그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게 되는 것도 그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면서부터다. 박동훈을 자르기 위해 시작했던 도청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진정으로 위하는 쪽으로 바뀌게 되는 매개가 된다. 도청의 결과물은 도준영을 협박하고, 강윤희(이지아 배우)에게 비밀을 폭로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도청은 당연하고도 엄연한 불법 행위다. <나의 아저씨>는 이 불법 행위를 드라마 전개의 열쇠로 삼는다. 불법 행위를 아무런 경각심 없이 마치 일상인 것처럼 담아내고 있다. 심지어 어느 장면에서는 꽤나 낭만적인 느낌으로 그리고 있다. 마음과 마음의 교감이 '엿듣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무리 드라마라고 한들, 아무리 절절한 감정을 전달해 준다고 한들 이러한 전달 방식이 옳은 것일까.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 배우가 연기한 박동훈 부장은 세상 좋은 사람으로 나오고 있다. 대기업 부장으로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직장에서는 존경을 가정에서는 믿음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이지안의 과거를 알게 되는 순간에도, 그녀가 자신을 도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은 후에도 그녀를 적극적으로 감싸고 옹호한다. 이지안을 향한 박동훈의 절대적인 지지는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다. 어쩌면 현실에서 만나기 힘든 이상적인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드라마는 늘 그런 이상을 얘기하기 때문에 뭐 그러려니 한다.


박동훈이라는 캐릭터는 이지안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드라마에서는 박동훈이 마치 이 시대의 평범한 직장인이자 아저씨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박동훈은 평범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이 드라마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아야 그나마 조금 이해가 되는 인물이다.


박동훈을 '좋은 어른'의 예시로 들기에도 조금 그렇다. 물론 박동훈은 좋은 어른이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하지만 박동훈처럼 되지 않는다고, 박동훈처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어른이 아닌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박동훈처럼 하기는 불가능하다. 부하직원인 송 과장 정도만 돼도 충분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송 과장처럼 되는 것도 쉽지가 않다. 박동훈의 선행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 좋은 어른의 표본으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박동훈처럼 살지 않아도 괜찮다. 괜히 박동훈과 자신을 비교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박동훈을 이지안이 아닌 강윤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남편이라고 하는 사람은 매일같이 형제들과 친구들과 어울리고 술을 마신다. 휴일엔 조기축구회를 나가고 끝나면 밤까지 또 술을 마신다. 박동훈이 좋은 어른 일지언정 좋은 남편인지는 잘 모르겠다. 삼 형제와 친구들이 모이는 '정희네'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치유되는 마법의 공간처럼 나오는데, 그들의 아내나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얼마나 복장 터자는 일일지. 매일같이 술을 마시는 후계동 사람들의 일상이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방영 당시 있었던 일부의 비판적인 여론들을 기억한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의 제목과 두 주인공 박동훈과 이지안의 나이차 때문에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다. 논란의 대부분은 드라마를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가해진 극단적인 비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완전하게 논란의 혐의를 벗어났다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이 드라마가 나이 많은 아저씨와 어린 여자의 로맨스물은 아니다. 하지만 차라리 로맨스로 가는 게 깔끔했을 뻔했다. 박동훈과 이지안의 관계는 아슬아슬하다. 대놓고 연인관계를 표방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둘은 분명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고 있다. 드라마 후반으로 갈수록 서로를 의지하고 마음을 나누며 관계가 더욱 깊어진다.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라고 하기에는 24살의 나이차는 꽤 크게 느껴진다. 박동훈이 이지안에게 보여주는 절대적인 지지를 단순히 직장상사나 인생선배의 호의라고만 봐야 될까. 몇천만 원의 빚을 대신 갚아주려 하고, 사채업자를 찾아가 싸우고, 할머니의 일을 적극적으로 봐주는 등의 모습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사적인 감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드라마에서 이지안도 박동훈을 좋아한다고 시인하고 있는데, 그것이 꼭 이성적인 감정이 아닐지라도 어쨌든 둘 사이의 어떤 특정한 감정의 공유는 분명히 있다. 애써 '로맨스는 아니다'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로맨스가 아니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해 보인다.


넓게 보자면 <나의 아저씨>도 기존의 '신데렐라 스토리' 하고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낮은 곳에 있는 여자 주인공이 높은 곳에 있는 남자 주인공을 만나 인생이 바뀌는 스토리. 박동훈은 이지안에게 백마 탄 왕자와 같은 존재다. 드라마에서는 박동훈도 이지안을 통해 위로받은 존재라고 강조한다. 맞는 얘기다. 드라마에서는 그 위로가 잘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 부장이 살인 전과자로 할머니를 홀로 모시는 손녀 가장으로 사는 한 여성의 구세주가 된다는 기본 골격은 변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비판한 일부 사람들의 의견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중년 아저씨의 판타지, 여성 캐릭터의 한계, 여성에 대한 폭력. 어떤 사람들은 이런 비판이 편협한 시각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겠지만 어느 정도는 타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아저씨>는 배우들의 호연, 유려한 촬영, 좋은 음악 등으로 기억에 남을 만한 드라마다. 하지만 이것이 인생 드라마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치명적인 오류들을 과한 감성으로 가리고 있을 뿐이다. 명대사라고 회자되는 것들은 인스타그램의 감성 글귀 모음 같이 느껴진다. <나의 아저씨>를 인생 드라마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나는 존중한다. 이 드라마는 충분히 그럴만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드라마의 감성과 나의 감성은 잘 안 맞았던 것 같다.


모두가 극찬을 해서 보게 된 <나의 아저씨>. 16부작 드라마를 한 달에 걸쳐서 봤다. 정주행이 오래 걸렸단 얘기는 그만큼 드라마에 집중을 못했단 얘기. 겨우겨우 마지막까지 봤는데 마지막 회가 제일 좋았단 얘기. 끝나고 보니 도준영이 제일 불쌍하게 느껴진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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