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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Jun 27. 2021

<발신제한>

사연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출근길. 발신번호 표시제한으로 낯선 전화가 걸려온다. 내 차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낯선 이의 목소리.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차에서 내리면 터지고, 경찰에 연락해도 터지고, 내 기분이 더러워지면 터집니다."


차에서 내리지도, 전화를 끊을 수도 없는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은 얼핏 신선해 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다소 기시감이 느껴지는 설정이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통한 스릴의 전개는 영화팬들이라면 이미 익숙한 방식이다. 2002년의 <폰부스>가 있었고, 2013년의 한국에서는 <더 테러 라이브가> 보여준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영화 <발신제한>은 2015년에 나온 스페인 영화 <레트리뷰션:응징의 날>의 리메이크 버전이다. 독일에서도 한 차례 리메이크되었던 이 영화를 연기력만큼은 검증된 조우진 배우의 주연으로 다시 만들었다. 영화의 설정은 다소 식상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영화까지 식상하리란 법은 없다. 모름지기 영화는 무엇으로 만드는가 보다는 어떻게 만드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발신번호 표시제한 전화를 받고 동료의 차량이 폭파되는 현장을 목격한 다음부터, 그리고 범인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경찰과의 차량 추격전까지는 장르 영화로서 대단히 매력적이다. 전화와 차량이라는 두 가지 소재를 가지고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이 여러 한국 영화의 편집을 도맡아 한 사람이라 그런지 역시나 편집을 통한 긴장감 고조가 인상적이다.


첫 주연을 맡은 조우진 배우의 연기도 기억에 남는다. 낯선 이의 전화를 받고 어쩔 줄 몰라하는 그럼에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의 연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상황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일으키고 있다. 그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 같이 뛰어들게 만드는 것이다. 극 중에서 범인의 역할을 맡고 있는 지창욱 배우도 영화 초반에서 만큼은 꽤나 인상 깊다. 사이코패스처럼 느껴지는 목소리 연기는 영화 초반에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확장하는데 유효하게 사용된다. 하지만 그의 활약은 여기까지다.



신나게 달리고 판을 벌려 놨으니, 이것을 어떻게 매듭지을지를 영화는 결정해야 한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평범한 가정에 왜 아침부터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필요가 있다. 그 부분에 대해 반드시 알려줄 의무는 없다. 때로는 이유 없는 원인모를 공포도 영화적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주인공이 타고 있는 차가 멈추어선 안되었다. 이 영화에서 차가 멈추게 된 순간 상황에 대한 해명은 어쩔 수 없는 전개가 되어 버렸다.


이때부터 주인공과 범인이 서로 얽혀 있는 과거가 영화 속에 투입이 된다. 그 구구절절한 사연이 범행의 동기로 밝혀진다. 과거의 이야기가 주인공의 회상 몇 번에 의한 일차원적인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영화 초반의 긴장감을 무너뜨리는데 일조를 한다. 범인과 주인공의 과거가 드러나게 되면서 모호한 윤리적 질문을 던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결론적으로 장르 영화를 즐기는 데 있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목소리만으로 긴장감을 유발했던 악역 캐릭터는 정체가 공개되고 범행의 동기가 밝혀지면서부터 그 무시무시했던 포스가 사라지고 만다. 범인이 자행했던 사적 제재가 구차한 사연을 달게 되자 이전에 쌓아놓은 스릴이 온데간데 없어지게 된다. 주인공은 더 이상 범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종국에는 범인을 위해 본인의 커리어를 희생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결국 스릴러로 시작해 휴먼 드라마처럼 마무리가 된다. 영화의 시작과 끝의 온도차가 상당한 영화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범인의 존재가 영화 막판에 밝혀짐에 따라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했던 것과 달리 <발신제한>은 범인의 정체와 범행의 동기들을 제법 이른 시간에 공개하고 이를 설명하는데 영화 후반부의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뒤로 갈수록 장르의 동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대한민국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사연 소개에 너무 많은 시간을 주고 있다. 아픈 사연이 폭탄테러의 면죄부를 주는 건 아닐진대 범인에게 애써 동정심을 주려 한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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