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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Nov 19. 2021

<퍼스트 카우>

소박하게 전달하는 단순한 진리

영화 <퍼스트 카우>는 19세기 초반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굳이 구분을 하자면 서부극이라는 장르 안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서부영화들과는 꽤 멀리 떨어져 있다. 서부 영화하면 흔히 생각하는 이미지들. 카우보이들의 총싸움과 무법천지에서 벌이는 약탈과 배신. 추격과 추적. 어쩌면 마초의 상남자들이 화면을 꽉 채우는 그런 것들이 연상된다. 하지만 영화 <퍼스트 카우>는 그와는 정반대에 있는 영화다. 이 영화는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하지만 알아야 할 역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우리가 영화를 통해 보고 들었던 '서부(Western)'의 이미지도 대개는 그런 기록일 것이다. 그동안의 서부영화들은 '개척의 서사'를 응당 참된 진리로 포장하고,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영웅담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 영광스러웠던 순간에는 승자의 기개만큼이나 패자의 눈물도 있고, 또는 그런 싸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역사의 한 부분이 된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 스포일러 주의 *


영화 <퍼스트 카우>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 이 영화의 주인공들을 살펴보자. <퍼스트 카우>의 주인공은 '킹루'와 '쿠키'라는 두 명의 남성이다. 킹루는 중국인이고 쿠키는 유대인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캐스팅일지도 모른다. 19세기의 서부는 그만큼 다양한 인종들이 교차하던 시기였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영화로 접하는, 서부영화의 장(場) 안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의 존재는 무척이나 신선하다.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도 분명 역사의 한 축이었음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킹루와 쿠키는 개척을 위해 누군가에게 고용된 노동자였다. 이들이 직접 말을 타고 광활한 벌판을 누비며 개척을 진두지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계사의 거대한 물결 그 안에 분명 있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중심의 바깥에 있는 인물들을 통해  영화가 전달하는 이야기는 지극히 평범해 보인다. <퍼스트 카우>에는 개척하면 떠오르는 폼나는 서사가 없다. 영화의 주인공인 킹루와 쿠키가 하는 일은 그저 소의 젖을 짜고, 빵을 굽고, 그 빵을 시장에 갖다 파는 일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생활하고 돈이 모이면 내 사업을 하고 싶다는, 평범한 모두가 꿈꾸는 그런 일들이다.  


<퍼스트 카우>는 시종일관 큰 그림보다는 작은 그림에 집중하고 있다. 이야기는 귀여울 정도로 소박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평범한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진리에 가깝다.



선의(善意)


이 영화의 처음 두 주인공 '킹루'와 '쿠키'가 만나는 장면을 보자. 무리의 식사를 책임지던 쿠키는 식재료를 찾아 숲으로 들어왔다. 그곳에서 수풀 뒤에 알몸으로 있던 킹루를 마주하게 된다. 킹루는 자신이 사람을 죽이고 지금 쫓기고 있는 신세라며 고백한다. 쿠키는 그런 그를 자신의 숙영지로 데려와 먹을 것도 주고 잠자리도 제공한다. 다음날 아침 킹루를 찾는 일당들이 쿠키가 속한 무리를 찾아오지만 끝내 쿠키는 그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쿠키의 이 선택은 사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다. 실로 대단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다. 영화 속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이것은 단순한 호의 그 이상이다. 자칫하면 본인의 목숨도 위험할 수 있는 무모한 선택이다. 그럼에도 불구 쿠키는 마치 당연한 일을 하는 듯 킹루를 본인의 숙소로 데려온다. 이런 쿠키의 선택은 무법의 세계 속에서도 존재하는 어떤 희망과 순수를 발견하게 한다.


우정(友情)


시간이 흘러 쿠키와 킹루는 어느 작은 마을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상황은 역전되어 이제는 쿠키가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런 쿠키를 킹루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거처 한 공간을 내어준다. 이때부터 그들은 함께 먹고 자며 생활을 일구고 미래를 꿈꾼다. 순탄할 것만 같았던 그들의 사업은 이들의 영업비밀 (다른 사람의 소의 젖을 몰래 짜는 일)이 발각되면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고 둘은 하루아침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그 와중에 서로 흩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 둘이 그냥 각자 흩어진 채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같이 사업을 한 동지이자 친구이지만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대로 멀리 달아났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킹루와 쿠키는 서로를 만나기 위해 쫓기는 와중에도 다시 본인들의 거처로 온다. 쿠키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친구를 만나야 한다며 병상을 박차고 나온다. 그렇게 해서 다시 만나게 된 둘은 또 다른 여정에 오른다. 하지만 쿠키는 더 이상 걸을 수 없고 킹루도 그 옆에 어깨를 맞대고 눕는다.


 

영화의 시작은 강가에서 발견되는 유골 2 구로 시작된다. 마치 고고학자들이 유물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맞물려 깊은 울림을 주는데 그 파장이 웅장하기까지 하다. 영화 <퍼스트 카우>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끌어와 서부영화의 대안을 제시할 뿐 아니라, 보편적이고 평범한 진리를 일깨우고 있다. 이 영화는 장르영화의 새로운 얼굴인 동시에 뛰어난 인문학 참고자료다. 또한 서정적이고 감동적인 '휴먼'드라마다.


대서사시가 아닌 소서사시로 펼치는 역사의 어느 한 페이지는 이야기의 규모와 상관없이 그 존재감이 어마어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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