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o Much Drama
<어벤저스 엔드게임>으로 세계관의 한 페이지를 성대하게 마무리한 마블은 이제 또 하나의 세계관에 발을 막 들여놓았다. '블랙 위도우'와 '샹치'가 각각의 솔로 무비로 찾아왔고, 자사 OTT 서비스인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몇 편의 TV 시리즈도 선보였다. 영화 <이터널스>는 MCU 페이즈 4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페이즈 4의 첫 단체 무비이며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는 만큼 본의 아니게 '어벤저스'와 종종 비교 선상에 놓이기도 했다. 영화팬들의 높은 기대치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고, 그만큼 이 프랜차이즈의 팬덤도 어마 무시하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는 마동석 배우의 출연으로 더 기대를 모으기도 했는데, 어떠한 이유던 이 영화가 MCU 세계관에서 영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터널스>의 주인공들인 '이터널스'는 어떤 존재들일까. 그들은 이름에 걸맞게 영원불멸의 존재들이다. 전지전능한 존재(처럼 그려지는) '셀레스티얼'이 창조한 이터널스는 마찬가지로 셀레스티얼이 창조한 '데비안츠'로부터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셀레스티얼이 지구로 보낸 존재들이다. 그들은 수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간들 옆에 있으면서 인간들을 지키고 보호하며 발달된 기술을 전파하는 등 '인류'의 발전과 진화를 도왔다. 그들은 인간들에게 신적인 존재들이며 원작과 영화의 이야기는 이 부분을 대놓고 인정하고 있다.
신화의 모습을 한 히어로물의 히어로들은 자그마치 10명이다. <어벤저스>가 몇 년간의 빌드업을 통해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과 팬덤을 끌어올린 후 단체 무비를 통해 시너지를 폭발한 반면, <이터널스>는 완전 그 반대다. <이터널스>는 처음부터 관객과의 단체미팅을 주선한다. <어벤저스>의 캐릭터들이 길어봤자 백 년 남짓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이터널스의 신들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각각의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양도 상당할 터, 결국 <이터널스>는 필연적으로 '자기소개'의 숙제를 떠안은 채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셀레스티얼의 존재부터 시작해서, 이터널스의 기원과 역사, 또 데비안츠의 기원과 역사 같은 이야기의 큰 얼개는 물론이거니와 각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개인의 서사를 한꺼번에 다 담고 있다. 이야기의 양이 워낙에 많아 2시간 3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도 버거울 정도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터널스라는 히어로들의 면면조차 생경한데, 여기에 우주적 존재의 야심과, 인간 세계의 로맨스와, 등장인물 간의 갈등과, 그것도 모자라 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과.... 앞으로의 시리즈를 예고하는듯한 떡밥과... 하나의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서사가 지나 칠정도로 많다. 처음 소개받은 자리에서 'TMI'로 일관해버리니 맞은편에 상대방은 호감을 갖기도 전에 질리는 형국이다.
결국 이런 이야기의 과잉이 이 영화의 치명적 단점이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각각의 서사를 일견 균형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각각의 이야기들은 기계적으로 적당량을 배분해 순서에 맞게 배치했을 뿐 일체감 있게 형성되지는 못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하나의 이야기에 적응하기도 전에 또 다른 이야기가 튀어나와 얼핏 영화의 전개가 빠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들을 늘어놓기만 하고 이쁘게 주워 담지를 못하니 빠르지만 지루한 전개의 연속이다.
서사의 할당에 치중한 결과 그동안 마블이 자랑하는 오락성의 미덕은 급감해버리고 만다. 영화 속에 액션 시퀀스는 의무적이고 평범한 느낌으로 이마저도 캐릭터들의 능력치를 알려주는 용도로 사용된다. 중간중간 나오는 뜬금없는 유머는 불편한 미팅 자리를 더 어색하게 만든다. 오히려 그런 유머의 사용은 이 영화가 애써 마블 영화 인척 하려는 것 같아 괜히 민망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 이 영화는 '이터널스'의 존재를 영화팬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이 영화의 목적이 애당초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이터널스가 어떤 존재이고 어디로부터 왔고 어떻게 왔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캐릭터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터널스의 존재에 대해서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그만큼 친절하게 각각의 캐릭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균형 있게 배분한 서사는 따로국밥 같은 느낌 속에서도 나름 순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넘치는 서사가 장점으로 작용한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터널스>는 앞으로 MCU 페이즈 4의 진행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이 될 것으로 보인다. 마블의 팬이라면 어쨌든 봐야 되는 볼 수밖에 없는 영화인 것이다.
<이터널스>는 자기만의 서사도 제대로 매조지 못한 채 또 다른 떡밥을 잔뜩 뿌려놓았다. 쿠키영상에 등장했던 또 다른 이터널스와 '블랙나이트'로 예상되는 캐릭터까지. 쿠키영상의 프로젝트가 진짜로 진행된다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확장은 예상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