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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Dec 11. 2021

<티탄>

낯선 이미지와 낯익은 메시지 사이

올해 2년 만에 정상 개최한 칸 영화제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영화는 <티탄>이었다.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친 주인공은 30대의 비교적 젊은 여성 감독 쥘리아 뒤쿠르노였다. <티탄>은 그녀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2016년 장편 데뷔작 <로우>로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인 국제 비평가주간에 처음 초청된 이후로 두 번째 방문만에 영화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황금종려상 수상 자체도 화제였지만, 더욱 화제가 된 것은 이 영화가 가진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독특함에 있었다. 칸 영화제 이후로 국내 개봉하기까지 이 영화의 관심사는 대부분 그런데에 있었고, 홍보나 마케팅도 그런 분위기를 십분 활용하였다. 이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대개는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 이 난리야"


오죽하면 포스터에 떡하니 '올해의 미친 걸작'이라고 써놓았을까.



걸작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미친 작품은 맞는 듯하다. 이 영화의 독특한 질감은 유례를 찾기가 힘들고, 그 어떤 지형에도 속하지 않는다. 영화는 아주 거칠고 직선적인 표현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 영화의 화법은 불친절하고 불편하기 그지없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불쾌감마저 줄 것이다. 영화가 말하는 방식이 거칠고 이해하기 쉬운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난해한 영화는 아니라 생각된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이해를 요구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짜 맞추기보다는 영화가 주는 그 괴이한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이 영화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영화가 주는 그 불편한 화법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자극적인 비주얼만 내세우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의 기본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머릿속에 티타늄을 박고 살아가는 알렉시아란 여자가 경험하게 되는 모종의 사건과 평범치 않은 경험들'을 다루고 있다. 이런 일들을 기상천외한 광경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티탄>이다. 이건 영화의 겉 이야기이고 그럼 대체 진짜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뭘까?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길래 이렇게 기괴한 방식을 사용했을까 하는 물음이 절로 든다. 그런데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마저 끝나고 나면 여러 가지의 생각과 감상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 감상은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도 있겠다 라는 확신이 들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열린 결말의 영화다. 누가 어떻게 되고 누가 범인이고 누가 죽었는지에 대한 열린 결말이 아니라,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이 보는 사람에 따라서 무궁무진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의 열린 결말이다. 여러 가지 감상 가운데 몇 개만 이 글에 적어보기로 한다.


#따뜻한 가족영화?


<티탄>은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줄곧 나오던 얘기와 다르게 의외로 따뜻한 구석이 있는 영화다. 우선 영화의 첫 장면을 보자. 입으로 자동차 소리를 내며 장난치는 어린 시절의 알렉시아와 이에 경쟁이라도 하듯 음악 소리를 최대로 키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온다. 결국 이 싸움으로 교통사고가 나고, 머릿속에 티타늄을 심게 되는 알렉시아다. 영화의 시작은 아버지와 그녀의 관계가 그렇게 좋지많은 않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알렉시아가 티타늄을 심은 후로는 사이가 더 안 좋아진 듯한 모습이 영화 속에 여러 차례 나온다. 결국 그녀는 그 가족을 본인 스스로 떠나오고야 만다.


그런 알렉시아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한 남자의 아들로 위장하고 그와 같이 살게 된다. 이 중년의 남자는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알렉시아를 진짜 아들로 알고 있는 건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알렉시아의 존재는 그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런 그를 보며 알렉시아도 위로를 얻는다. 끝내 알렉시아의 정체가 새로운 아빠에게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알렉시아를 자녀로 맞아준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와 아버지를 버린 여자의 기이한 동거는 기이한 감동을 준다. 아무리 봐도 가족영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영화의 어느 지점에 가면 그 어떤 가족영화보다 가족의 의미를 뛰어나게 전달한다.  


#인간성의 상실과 회복?


인간의 미래를 다루는 영화들을 보면 인간과 기계의 이종교배의 사례가 많이 나온다. 그 옛날 <로보캅> 같은 영화부터 해서 <터미네이터>도 있었고, 최근작으로는 <알리타:배틀 앤젤>이 떠오른다. 이종교배의 결과물은 강력한 전사의 이미지였다. 또한 기계와 인간 사이에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보여주었다. 그 내적 갈등에서 결국 인간의 편에 섰던 영화의 주인공들이었다.


<티탄>의 알렉시아는 다르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일절 없다. 오히려 기계를 더 탐닉하고 인간성은 아예 말살된 모습이다. 강력한 전사가 되어 적을 처단하는 대신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나오는 그녀의 살인행위는 너무나도 태연해서 너무나도 무섭다. 새로운 아버지를 만나 인간성을 회복하기까지 그녀는 영화 속에서 내내 긴장감을 주는 존재다. 새로운 아버지 뱅상이 그녀를 끌어안은 후 알렉시아는 처음으로 이 영화 속에서 웃음을 보인다.


살인마가 되는 계기와 머릿속에 티타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영화는 이 부분에 대해 뚜렷이 밝히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마치 밤과 낮처럼 확연히 바뀌는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의 온도차는 '인간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속죄와 구원?


이 영화에서 알렉시아는 죄인이다. 살인범이다. 처벌을 피해 신분을 속이고 정체를 숨긴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거치는데 이것이 그녀가 죗값을 치르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그 과정들은 매우 고통스럽게 그려진다. 생명 탄생의 축복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고난의 행군처럼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새로운 아버지 뱅상이 하는 말이다. 그는 소방대장으로서 여러 부하직원들이 있는데 그 직원들에게 다시 찾은 아들을 소개하며 하는 말이다. "너희가 나를 뭘로 생각하지? 하나님! 그럼 내 아들은 예수겠지." 물론 알렉시아와 예수를 직접 등치 시키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굳이 이런 대사를 집어넣었다는 것은 나름의 종교적인 의미도 전달하려는 영화의 깊은 뜻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예수는 인간들의 죄로 인해 고통과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였다. 알렉시아는 본인의 죄로 본인이 고통을 받고 죽음에까지 이른다. 그럼 알렉시아의 죽음으로 인한 구원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잉태한 아이를 품에 안은 아버지 뱅상의 표정에 그 답이 있을 것 같다.



여러 가지의 감상과 해석이 있겠지만 그래도 이 영화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휴머니즘' '인간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말하는 방식은 거칠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두고 기계, 금속, 자동차 같은 이미지들만 가지고 얘기하는데 사실 그보다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영화다. 영화 <티탄>을 보고 괴상한 겉모습에 깜짝 놀라거나 신기해할 것 없다. 사실 이 영화는 겉모습만큼이나 속살이 더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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