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 "혼밥은 사회적 자폐" 발언
‘혼밥’ 대란이 휩쓸고 갔다. 아니, 아직도 휩쓸고 있다. 황 씨가 한 발언의 문제는 사회적 쟁점을 개인화한다는 것이다. 가장 알기 쉬운 비판 지점이고, 실제로 그런 취지의 비판이 잇따랐다. 혼자서 밥을 먹는 동기는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는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 혼자 먹을 것이고, 누군가는 같이 먹는 것보다 혼자 먹는 게 편하고 즐거울 것이다. 전자의 경우 같이 먹을 동료가 없는 사람한테 같이 먹어야 한다고 다그치는 꼴이니 쓸모가 없고, 후자의 경우 식사의 즐거움을 누리자는 명분으로 즐겁지 않은 식사를 권하는 것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에 앞서 원자화한 개인들이 엉겨 붙을 수 있도록 공동체를 가꾸고, 함께 해서 즐거운 식사 문화를 세우는 것이 순리에 맞다. 남들과 밥상에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곧 사회적 소통능력의 결핍을 뜻하진 않는다는 점도 지적해야 하는데, 그렇게 보면 저런 해결책도 다소 무색해진다. 그런데 이렇게만 정리하기엔 저 발언의 어폐가 심하다. 저 발언이 특히 그릇된 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통념을 강조하면서 도리어 사회성이란 개념을 호도한다는 사실이다.
물음표를 띄우자면, 나는 사람들과 함께 밥 먹는 상태가 꼭 사회성의 지표인지 미덥지가 않다. 대학 시절, 혼자 식당에 못 가겠다며 밥때를 거르고 함께 갈 사람을 기다리는 경우를 많이 봤다. "저 사람은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나"라는 눈초리를 상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은 혼자 밥 먹는 행동이 환영받지 못했던 사회다. ‘혼밥’이 문화이자 현상이 되었다지만, 지금도 ‘혼밥러’를 향한 눈초리는 곱지만은 않다. 오죽하면 서브컬처 커뮤니티에서 ‘혼밥’을 향한 눈초리에 반항하는 ‘혼밥 티’까지 제작됐겠는가. 인터넷에 널리 퍼진 ‘혼밥 난이도’ 그래프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묻고 싶다. 사회성이라는 게 개인들이 그룹을 이루는 차원에서만 유효한 개념일까. 개인의 삶을 떠받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사회이고 집단인데, 개인이 되는 것이 두려워 집단 속으로 숨는다면 무언가 뒤바뀐 게 아닐까. 다르게 말하면, 사회성에는 혼자 있는 시간을 꿋꿋하게 보내는 능력도 포함되는 게 아닐까.
한국 사회의 시급한 과제 하나는 사회란 개념을 규범적으로 바로 잡는 것이다. 가령 사회화를 개인이 사회에 예속되는 상태로 이해해야 하는가, 사회의 주인으로 서는 계기로 이해해야 하는가. 근대적 시민으로서 우리의 직관은 후자라고 답할 것이다. 개인이 사회에 수평적으로 소속되고 저마다 발언권을 행사하기 위해선 기존의 사회를 거부할 수 있는 사회적인 것 바깥의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개인을 억압하는 방식의 사회화를 보이콧하고 대안을 요구할 수 있다. 성상민 님이 트위터에서 말한 대로, 집단주의 풍조가 골수에 물든 한국에서는 ‘혼밥’ 문화가 기존의 사회화를 거부하는 선택지의 역할을 하는 측면도 있다. 한국은 오래도록 개인이 개인으로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회였다. 자신을 품어주는 '무리'의 껍질을 덮어써야 비로소 목소리를 내고 안도감을 얻는 것이다. 사람들이 식당에 혼자 가길 어려워한다는 건 전형적인 집단에 대한 의존증이다. 혼자인 상태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비로소 타인들과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다. 그건 집단에 개인을 예속시키는 사회화를 개인으로부터 집단이 도출되는 사회화로 탈바꿈시키는 단초일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이뤄 살아가는 동물이란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측면도 있지만, 그럴 때 더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니, 그렇게 되기 위해 사회가 존재해야 한다. 사회적 동물이란 명명은 단순히 집단의 일원으로 타인들과 부대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의미의 사회생활이라면 개미와 들개, 멧돼지 같은 동물도 한다. 인간은 소속감은 물론 프라이버시가 필요한 동물이다. 의식주의 기본 영역에서, 혼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선택지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숨을 돌리며 단체생활을 즐길 기운을 충전하고, 개인의 공간에서 집단을 성찰하는 시간을 초대할 수 있다.
‘밥’은 다양한 위상과 의미를 나타내는 문화적 도상이다. 밥벌이란 말은 삶의 지긋지긋한 유물론적 성격을 일컫고, 집 밥이란 말은 가정 공동체의 든든함을 표상하고, 밥상머리 교육은 인성의 바탕이 되는 가풍을 가리킨다. ‘혼밥’이란 신조어에도 식사 행위를 넘어선 삶의 양식의 변천이 요약돼 있다. 그 저변에는 저출산 고령화와 비혼 가구 증가로 인한 1인 가정의 확산과 그에 따른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깔려있다. 영화와 드라마 같은 서사물에서 외로움을 그려내는 클리셰로 쓰일 만큼, 혼자 먹는 밥은 소외와 고립의 상징으로 통해왔다. 하지만 ‘혼밥’이 사회 현상이 되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건 집단에 대한 개인의 공간이 넓어졌다는 뜻이며, ‘혼밥’을 향한 통념에 개의치 않는 분위기도 먹물처럼 번지고 있다. 이 점은 공동체의 결속이 과거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이 상황에서 최선의 대응은 시대의 풍랑을 틈타 낡은 가치를 구조 조정하고, 집단이 부서진 자리에 건강한 개인주의를 뿌리박는 것이다. 그저 과거의 식사 방식으로 돌아가라고 강변하는 건 그 아래 깔린 본질과 헛돌 뿐이며 무엇도 극복해낼 수 없다.
“혼밥은 사회적 자폐”란 말은 “친구도 없이 혼자서 밥 먹느냐”란 통념을 약간의 문자를 써서 조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타의적 혼밥러’가 앓는 고립감은 혼자서 밥을 먹는 상태보다도 저런 통념이 반영되고 재생산된 것일지 모른다. 황 씨는 논란 이후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현재의 내가 왜 이런 삶을 살고 있는지 끝없이 의문을 던지고 그 근원을 사색하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정의하며 의도를 부연했다. 맞는 말이다. 인문학의 위력은 통념의 지배력을 의심하고 반성하는 데 있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대인관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꾸짖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대인관계를 돌아보고 쇄신하는 것이야 말로 인문학의 쓸모다.
혼자 밥을 먹는 것보다 함께 먹는 것이 풍요로울 수도 있음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혼밥은 사회적 자폐"라는 언사는 혼자 먹는 밥이 먹는 이에게 미치는 좋지 않은 영향을 알리고 선택지를 넓혀주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근간을 이루는 식사란 행위에 관해 집단 바깥의 선택지를 삭제하는 것이다. 이건 사회성을 수평성과 호혜성이 아닌 집단주의로 규정하는 어리석음이다. "혼밥은 사회성 결핍"이란 관념을 퍼트리는 건 혼자 밥 먹는 사람에게 무언가 권고하는 걸 넘어 그들을 향한 편견을 다지고 부추긴다. 각자의 삶의 양식을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한 이유는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이 편견 없이 관계를 맺기 위함이다. 건강한 사회는 함께 해서 괴로운 곳이 아니라 서로에게 보탬이 되도록 함께 하는 곳이며, 그것을 위한 사회성의 덕목이 공감과 배려, 존중 같은 태도다. "혼밥은 사회적 자폐"만큼 사회성이 파탄 난 말을 들어본 적이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