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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Sep 26. 2017

유용된 인내심

노키즈 존을 철거하라

노키즈 존이 사회 문제가 되었는데, 강아지나 고양이도 아니고 사람의 자식을 공중 장소에 출입금지하는 관행이 생긴 건 초유의 일이 아닐까 싶다. "애들은 가"라고 트로트 바운스를 타는 뱀 장수는 있었겠다만. 옛날이라고 아이들이 소란스럽지 않았을 리 없다. 내 생각엔 네 가지 정도의 변화가 있다.   

  

먼저, 가정의 양육방식이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민주화됐을지 모른다. 가령 나는 어릴 때 공중장소에서 떼를 쓰다가 그 자리에서 아버지한테 뺨을 맞았다. 요즘엔 아이를 가축이나 머슴처럼 다루는 부모는 줄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 편으론 부모들의 훈육이 수행될 조건이 망가지고 있다. 맞벌이 부부가 보편화됐지만 육아와 가사는 여전히 엄마의 책임에 쏠려있다. 엄마는 원더우먼이 아니며 아빠는 밤늦게 퇴근하고 주말에도 출근한다. 모부가 아이를 꾸준히 케어하고 데리고 다니며 공중장소에서의 행동 양식을 알려줘야 하는데 그럴 기회가 적은 것이다.     


그랬거나 저랬거나 아이들은 부산하고 떠들썩한 존재다. 예나 지금이나 다음 세기에도 다른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아이들보다 일찍 사회화됐고 아이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어른들이 인내해야 한다. 그 인내심이 유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다. 고용난과 평생 학습의 시대에 인내심은 오직 자기계발에 투입할 자원이고 그것을 위해 긁어모으기도 빠듯하다. 아이들과 엄마들은 물론이고 공중장소에 출몰하는 온갖 벌레(백팩충, 흡연충, 맘충, 틀딱충 etc)들은 내 인내심과 희박한 재충전의 시간을 도둑질해 가는 공공의 적이다. 그 공적 중에 제일 만만한 게 말 못하는 아이들이고, 그들을 둔 죄를 지은 엄마들이다. 노키즈 존의 절반은 여성혐오고 정체는 약자 혐오다.     


인내심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를 위한 것이다. 내 입 냄새는 느끼지도 못하지만 남의 땀 냄새엔 구역질이 난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공중장소는 나 뿐 아니라 '우리'의 것이고, 나도 그처럼 달리고 일하면 땀 흘리는 인간이니까. 나도 사고뭉치 일곱 살을 거쳐 스무 살 서른 살이 되었고 내 어머니도 날 그렇게 키웠으며 내 자식도 그렇게 자랄 것이다. 이런 최저한의 역지사지가 작동되지 않는 건 적지 않은 젊은 사람들에게 가족 재생산의 미래가 실종됐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저출산과 집값 상승, 비혼가구 증가 속에 결혼은 먼 일이고 출산은 더욱 멀고 육아는 남의 일이다. 공동체가 고장 나니 공동체 의식도 없다.     


적어도 이런 차원에선 한국은 예전이 조금 더 사람다운 사회였을지 모른다. 그때는 내 새끼에 비춰 남의 새끼를 보살피는 전근대적 온정주의라도 있었으니. 나는 아버지에게 뺨을 맞으며 자랐지만, 맞벌이 부모님이 직장에 있는 방과 후엔 우리 집을 세 준 2층 주인집에 가서 놀기도 했다. 이런 방식의 '집단 보육'을 경험한 사람이 나 뿐은 아닐 것 같다. 이 사회가 곧장 앞으로 흘러왔다면 전근대적 온정주의는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보편적 권리를 존중하는 근대적 인도주의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억압이 청산되지 않은 채 사회는 미래로 나아가지 못했고 과거의 기반도 잃어버린 사막이 됐다. 이것이 노키즈 존이 나타난 마지막 이유다.     


다행히도 이 사회엔 오래된 억압에 반기를 드는 씨앗이 자라고 있다. 소수자 운동은 이미 골목의 모퉁이와 보도 블럭의 빈틈에 퍼져나가 착지한 상태다. 노키즈존을 철거하는 것은 오늘의 퇴행을 되돌리는 한 전선이다. 그리고 저출산·ᆞ저성장이라는 돌이키기 힘든 국면에 진입한 사회가 공동체의 분해를 버텨내는 대안적 윤리와 시민 규범을 세우기 위해 돌파해야만 하는 통과의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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