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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Jan 04. 2018

2010년대의 문제작

<아수라> (김성수, 2016)

재작년 이 곳에 올려놓았던 영화 <아수라>에 관한 메모들을 한 편으로 묶어 게시합니다. 다시 읽었을 때 흐름이 늘어지는 단락과 논리가 튀는 단락을 잘라내고 어떤 대목은 수정을 했습니다. <아수라>는 어떻게 봐도 걸작이 아니고 소위 웰메이드 영화도 아닙니다. 개봉 당시에는 컬트적 팬덤 열기에 휩쓸려 수선을 떨었던 감도 있고, 사실 문제작이란 표현도 확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대 영화계와 사회상 위에서의 좌표, 폭력의 재현이란 논점에서 말할 거리가 지극히 풍부한 영화라는 판단은 변함없습니다. 이 점이 평단 일각과 시네필들 사이에서 외면되었다는 생각도 변함없고요. 다시 읽어봐도, 영화에 대한 테크니컬한 분석은 정치하다는 인상이 들고, 무엇보다 <아수라>를 호평하는 경우에도 영화의 핵심, 폭력의 재현 방식을 짚어주는 비평은 없었다는 이유에서 이 글은 가치가 있습니다. 새로 묶어서 올리는 이 글로, <아수라>에 대한 제 입장을 갱신하겠습니다.



1     


세상에는 두 가지 영화가 있다. 한 번 타면 내리고 싶지 않은 영화와 한 번 타면 내릴 수 없는 영화다. <아수라>는 일단 객석에 몸을 싣고 나면 눈을 돌리거나 딴청을 피울 수 없다. <아수라>를 보는 것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8톤 트럭을 타고 질주하는 일이다.     


원래는 <아수라>에 관심이 없었다. 김성수에게 거는 기대가 없었을뿐더러, 개봉 즈음 들려오는 뉴스엔 악평이 끼어있었다. 흥미롭게도, 그런 와중 의미 있는 숫자의 관객이 <아수라>를 향해 바치는 극찬을 SNS에서 봤다. 호기심이 들었고 극장에 갔다. 놀라웠다. 녹초가 돼서 극장을 빠져나왔고, 공허감 섞인 흥분이 혈관을 떠돌았다. 나는 2시간 12분 내내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오락적 흥분만 느낀 것은 아니다. 잘라 말해서, <아수라>는 연출에 비범하고 특출한 국면이 있는 영화다. 몇 년간 박스오피스 꼭대기에 무더기로 쏟아진 상업 영화들과 달랐다. 곧장 전문가 평을 찾아봤고 또 한 번 놀랐다. 호평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판을 했거나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닌지, 시간을 들여 곱씹어 봤다. 되새길수록 <아수라>는 다층적 텍스트를 품은 말할 가치가 있는 영화였다.     


2


<아수라> 같은 영화에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나는 <아수라>가 반듯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들 연기는 한 방향으로 과잉돼 있고 이른바 멀티 캐스팅 영화임에도 캐릭터가 잘 분간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가 그려낸 풍경에서 심도와 다채로움을 찾을 수는 없다. 연기의 과잉은 연출의 과잉의 일환인데, 폭력 재현과 긴장 조성에 완급조절 없이 시종일관 출력을 키워 촘촘하게 배치했다. 여기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구성에 아쉬움을 표한다면 인지상정이다. 이야기의 결함도 작진 않다. 간단한 예를 들자. 오프닝 시퀀스에서 형사들의 추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작대기는 왜 그 긴박한 상황에 약을 빨고 퍼져있는가. 약기운에 취해 형사를 살해한 죄목으로, 상관을 죽인 도경의 죄를 덮어 씌우기 알맞게 하기 위해서다. 또한 정신이 나간 작대기가 형사들에게 덤비게 해 육박전을 연출하며 스릴과 혼미한 기운을 집어넣기 위해서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를 관통하는 연출 문법을 알려주고 이야기 토대를 닦는 단계이므로 결코 작은 오류가 아니다. 작대기가 도망치다 말고 약을 빠는 작위성이 없었다면, 한도경이 작대기에게 떠넘긴 죄로 박성배와 김차인 양 쪽에 발목을 잡히는 수난극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차차 지적하겠지만 이런 비개연성은 중요 지점마다 출현해서 이를 누락하고는 영화의 기획을 말할 수 없게 만든다.     


다만 나는 이런 약점이 관람의 차원에서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상황이 전환되어 새로운 폭력과 압박감, 긴장감을 퍼붓는 통에 이전 장면에서 품은 서사에 관한 의문을 마음에 담아둘 틈이 없었다. 앞서 <아수라>의 약점으로 거론한 과잉의 효과이기도 한데, 이 영화에 흥분을 느낀 관객과 지루함을 느낀 관객이 있다면, 이 과잉의 효과에 얼마나 자발적으로 동의하였는가가 핵심일 것이다. <아수라>는 자신의 문법에 동의하는 관객에게는 무시무시한 속도감과 몰입감으로 보답하는 영화다. 영화의 문법과 주제의식과 서사적 발단을 한 호흡에 녹여서, 긴박한 동선의 이행으로 액션신을 연출한 오프닝 시퀀스는 보는 이를 단 번에 잡아채서 엔딩까지 등 떠민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내가 이 영화에 반응한 대목은 정확히 이 점이다. 나는 <아수라>를 전부 네 번 보았다. 볼 때마다 조금씩 인상이 달랐지만, 변하지 않은 건 러닝 타임을 일렬로 돌파하는 몰입감과 관람이 끝난 후 녹초가 된 기분이었다. 특히 좋았던 건 영화가 끝난 후 신체에 기입된 진한 여운이었다. 요 몇 년 간 극장에서 이런 느낌을 받은 건 두 번인데, <그래비티>와 <매드 맥스>를 보았을 때다. 알다시피, 이 영화들은 관객에게 아득한 감각적 대리체험을 하게 해주거나 관객의 오감을 향해 맹수처럼 포효한다. <아수라>가 저 영화들만큼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느낀 공통점이 <아수라>가 지닌 장점의 성격을 빗대어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많은 한국 상업영화가 제공해왔던 서사적·정서적 쾌감과 계통이 다른 것이다.     


3    


천만 영화 시대가 개막한 2012년 이후, 한국영화의 흥행코드는 코믹 신파와 가족관객, 국가주의/민족주의, 사회비판, 검증된 서사와 이미지 차용이다. 이것들은 한국영화를 넘어 한국사회의 주류적·통속적 코드다. 소위 ‘CJ 기획영화’의 조잡함은 서로 다른 흥행 코드가 유기성 없이 불균질하게 이행되는 이질감, 그걸 다수 관객 취향의 퍼즐로 짜 맞추는 것 말고 다른 의도가 없다는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얄팍함이다. 이런 통속적 코드는 아무리 새로운 소재와 다른 주제로 영화를 시작해도 개별 영화를 흡수하며 차이를 지운다. 이런 사태 속에서 영화의 개성과 자의식은 말살당하고, 장르 다양화를 진행하며 제작비를 쏟아부어도 어디서 본 듯한 진부한 영화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어폐를 한 마디로 집약하면 ‘작위성’이다. 여기서 영화는 관객이 반응하는 요소의 기계적 종합이며, 그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그러나 영화를 유기적으로 엮어주는 요소들은 폐기되거나 주변화된다. 이것은 이야기의 비개연성, 신파 이미지의 과잉, 스토리텔링의 지체, 대의명분의 가장, 구성상 균형의 붕괴로 나타난다. <7번 방의 선물>에서 관객을 웃기고 울리겠다는 것 외에 다른 이야기 기능을 찾기란 미션 임파서블이다, <사도>에서 사도가 죽은 후 등장인물마다 돌림 노래하며 목놓아 우는 순간, <부산행>에서 마동석이 죽을 때 정유미가 카메라를 마주 보고 우는 연기를 ‘보여주던’ 순간은 영화의 탄력을 뺏으며 늘어트린다.     


이 문제는 만듦새를 넘어 윤리적·정치적 차원에 걸쳐있다. 근래 한국영화를 병들게 하는 독소는 다름 아닌 신파다. 신파는 근본적으로 캐릭터를 학대하며 얻는 쾌감이다. 관객이 울기 위해선 영화 속 캐릭터가 울거나 아파야 한다. 비극을 통해 슬픔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다. 관객을 울게 한다는 목적만 취하며 다른 기준을 버리고 상황을 몰고 간다는 것이 문제다. 신파 장면은 불행과 고통에 빠진 타자를 소환한다. 말 못 하는 들개 같은 소년(<늑대소년>), 지적 장애인(<7번 방의 선물>)과 고문당하는 학생들(<변호인>), 이산가족 소녀(<국제시장>), 좀비가 된 가족과 친구(<부산행>)가 불려 온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운다는 것은 그의 고통에 정서적으로 연대하는 행위다. 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타인을 학대하는 윤리적 도착증이 관객에게 용인되고 내면화되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에 일어난 비극을 끌고 와서 즐기는 것이라면 윤리적 위험은 폭증한다. 또 다른 독소는 대의명분의 가장이다. 이것이 가장인 이유는 올바른 가치를 그 자체로 재현하기보다 선정적이고 가학적인 재현을 내용으로 채워 넣는다는 것이다. 이때 전자는 후자의 알리바이다. 사회경제적 불의를 고발하며 운송 노동자가 깽값을 받고 얻어터지는 장면을 보여주고(<베테랑>), 최고위 권력층의 비밀스러운 추행을 폭로하면서 여성의 벗은 몸과 접대 현장을 보여준다(<내부자들>). 이런 경향이 극단에 치달은 것이 2013년 <노리개> 같은 영화다. 신파와 사회고발을 콘텐츠로 하는 영화는 현재 한국 영화계 주류를 이루고 둘이 결합하는 양상 또한 심심찮다. 이런 영화들을 ‘위선의 영화’라고 통칭할 수 있다.     


4     


<아수라>는 어떤 영화인가. 앞서 <아수라>가 여타 한국 상업영화와 질이 다르다고 했는데 이 말엔 부연이 필요하다. <아수라> 또한 굉장히 작위적인 영화이며 이 점에서 한국 상업영화 특질을 벗어나지 않는다. <7번 방의 선물>이 코믹 신파를 연출하는 데 이야기 개연성을 종속시켰다면 <아수라>는 폭력-폭력-폭력-폭력으로 기승전결을 짜고 이야기가 그것을 묶어주는 구조다. 한도경은 왜 그렇게 박성배를 향해 무의미한 간언을 반복하고, 김차인을 향해 제압당할 것이 분명한 반항을 계속하는가? 박성배와 김차인이 거기 대응하여 위계질서를 확인하는 폭력과 위압감을 전시하기 위해서다. 관객에게 특정한 종류의 쾌감을 주기 위해 유기적 구성을 폐기한다는 점에서 <아수라>는 ‘CJ 기획영화’들과 분명 한 배에서 나왔다. 이 영화가 전시하는 폭력이 한도경을 지속적으로 학대하며 수행된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점이 <아수라>의 특수성을 상쇄하진 않는다. <아수라>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통속적 구성을 참조하였으되 통속성의 내용을 비주류적인 것으로 갈아치우고, 한 가지 목적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아수라>가 한 가지 목적에 복무한다고 할 때, 한국 ‘남자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나올 법한 남성적 파토스, 서열 효과의 긴장감, 순간적으로 감정이 폭발하는 과잉 연기의 양식을 추출하여 폭력과 함께 보여준다는 뜻이다. 한 SNS 유저가 “<아수라>는 <황해>에서 면가가 나오는 장면이 두 시간 동안 반복되는 것 같다”라고 재치 있게 촌평한 것처럼 말이다. <아수라>는 이 구조를 악과 폭력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 섣불리 의미화하지 않고, 정의구현을 내러티브의 목적으로 노정하거나, 형제애와 비장미에 대한 도취로 빠지는 것도 거부한다. 그 결과 영화의 구조는 오락적 속도감과 몰입감, 압박감·긴장감·아드레날린의 분비 같은 감각적 체험으로 수렴한다. 말했듯이 이건 보통의 한국 상업영화들이 가는 길과 아무래도 다른 것이다.     


내가 <아수라>를 보며 ‘기획 영화’들이 일으키는 신물을 삼키지 않은 것도 이 영화가 그 길로만 끝까지 가기 때문이다. 이질적 흥행코드의 기계적 조합과 그 항목들 간의 전환이 일으키는 조잡함, 그로 인해 눈치를 보고 얽매여있다는 기분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부산행>의 경우 해일 같은 좀비 떼에 쫓기는 단순하고 묵직한 속도감을 후반부 신파가 망쳐버린다. 그 신파가 직설적 사회비판과 섞이지 않을뿐더러 둘 모두 의례적으로 연출됐단 인상이 든다. 근래 개봉작 가운데 작가적 색채가 가장 짙은 작품 중 하나인 <아가씨>조차 엔딩에서 하정우가 조진웅을 죽이며 “네 놈도 (조선처럼) 무디고 흐리고 약해졌구나”란 대사를 돌려주는데, 식민지 조국을 성애와 탐미의 무대로 쓴 것을 변명하는 군말 붙이기처럼 들린다. <아수라>는 자신이 택한 기획을 밀어붙이는 데 샛길로 빠지거나 다른 명분으로 발뺌하는 위선의 순간이 없다.     


영화에 작가의 인장이 돋아있다는 점도 평가할만하다. <아수라>에선 영화를 만든 이의 주견과 고집이 엿보인다. 감독의 대표작 <비트>와 <태양은 없다>를 인용하는데, 두 편을 함께 한 정우성이 <아수라>의 주연이라는 사실과 어울려 연상 효과를 낸다. 김성수 또한 무리한 방식으로 전작에 기대지 않고 영화 구조와 특정 장면에 자연스레 결부시킨다. 시작과 끝을 내레이션으로 장식하며 정우성을 안남 시라는 세계(의 내부자이면서 그)를 배회하는 인물로 설정해 반영웅성을 불어넣는 것은 <비트>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90년대 청춘 서사와의 비교 대조로 현재의 사회상을 가리키는 효과가 있다. 황진미가 지적한 대로, 카체이스 장면은 <태양은 없다>의 이명 장면과 <비트>의 오토바이 질주를 한 데 묶어 펼쳐내는 인상적 패러디다. 한도경이 검찰팀 회식 자리에서 주사를 부리다 술병으로 머리를 얻어맞는 장면은 <태양은 없다> 파티 장면의 보여주기식 패러디지만 말이다. 이런 자기 인용은 타 영화의 서사와 이미지를 훔쳐와 흥행 안정성을 높이는 연출과 다른 차원의 인용이며, 곽경택이 <친구 2>에서 <친구>의 서사와 아우라를 억지스럽게 소모한 것과도 다르다.        


<아수라>에도 통속적 설정과 연출 장치가 있다. 다만 김성수는 그걸 능란한 솜씨로 통제한다. 가령 한도경에게 병든 아내가 있고, 그녀의 병환 때문에 악행에 가담한다는 설정은 진부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김성수는 아내의 병실을 한도경의 양심을 비춰주는 장소로서 단색으로 색칠하지 않았다. 섹스할 수 없는 상태의 아내와 추파를 보내는 젊은 간호사를 번갈아 보여주고, 아내는 “나 수술받다가 죽을게, 그게 당신 소원이잖아”라고 도경의 내심을 건드린다.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곧이어 병실 장면이 처음 등장한다. 이때 병실의 이미지는 사뭇 외설적이다. 환자복 윗도리가 들춰져 하얀 살갗을 노출하고 파리한 낯빛으로 뻗은 채 신음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아내. 병실에 늘어트려진 링거 줄과 침대 주변 가닥가닥 세워진 의료기 거치대는 오프닝 시퀀스 빈민가의 철조망 이미지, 건물 천장에서 치렁치렁 흘러내린 전선줄 이미지와 근친성을 이루며 공간의 연속성을 꾸며준다. 통속적 드라마와 장르적 재현의 이질감 없는 전환을 이뤄낸다.     


한도경이 검찰팀에 린치 당한 후 아내의 수술을 참관하려 의료복을 입을 때가 이 영화에서 가장 신파에 근접한 순간일 것이다. 한도경 얼굴에서 흐르는 피가 마스크에 점점이 떨어지고, 자조와 체념 섞인 내레이션, 처연한 음악이 깔린다. 이 장면은 숙연한 기분을 일으키길 요청하지만 감정 과잉으로 빠지진 않는다. 장면을 길게 끌지 않고 은집사 장례식 장면으로 곧장 전환하기 때문이다. 이 전환은 병원 장면과 똑같은 사운드를 깔고 이뤄진다. 그를 바탕으로 불치병 수술-장례식의 순접의 연상 작용과 함께 자신이 교사한 이의 영정 앞에서 오열하는 박성배를 보여주며 아이러니한 정서를 창출한다. 다른 상업영화라면 틀림없이 신파를 쏟아부었을 상황에서 김성수는 조금 더 풍부한 정서를 건드리는 선택을 한다.     


장례식 시퀀스에서 한도경과 문선모가 결투를 벌이는 장면도 인간 군상의 단선적 묘사에 저항한다. 총 한 자루를 차지하려 바닥을 구르는 육박전은 두 사람의 서열 쟁탈전과 포개진다. 형제에 대한 애정을 상기하고 번민에 빠지는 순간에도 서로를 죽이기 위한 눈치싸움은 멈추지 않는다. 문선모의 팔을 쓰다듬으며 호소하던 한도경은 서로의 눈짓이 교차하는 일순간 문선모가 쥔 총구를 갑작스레 격발 한다. 그런 후 자신이 죽인 동생을 위해 진심으로 운다. 이 장면은 액션의 연출 자체로 훌륭하지만, 비극의 우발성과 함께 우정과 살의 어느 한쪽으로 고정되지 않는 관계와 심리 상태를 매 상황 전환을 통해 지속적으로 묘사한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반에 등장하는 박성배 자해극이다. 완급 조절 없이 같은 패턴으로 반복하는 폭력 재현과 압박감 조성은 확실히 지루함과 피곤함을 유발할 수 있다. 내 경우에는 상부로부터 전화를 받은 김차인이 “짐싸, 짐싸!”라고 패악을 지를 때 처음 느꼈다. 하지만 얼마 후 경쾌하고 익살스러운 자해극 장면에서 문법이 완전히 전환되며 그때껏 축적된 긴장이 해소되고 주의력이 재충전되는 것 같았다. 이 장면은 진지하게 이를 데 없는 배우들 연기 및 슬로 모션 촬영, 상황을 교차시키는 편집, 경쾌한 사운드가 충분히 스며들어 웃음과 아이러니를 배가한다. 하드코어한 스릴러에서 시추에이션 코미디로의 문법과 분위기 전환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일관된 재현 패턴 속에 정확히 이 위치에서 쉼표처럼 등장하지 않았다면 이만큼 해소의 역할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수라>는 확실히 구성이 치우친 영화이지만 그런 치우침을 통해 특별한 장면을 발굴해낸 측면도 있는 것이다.     


5     


<아수라>에 관한 가장 나쁜 오해는 이 영화가 한국형 범죄 액션 스릴러의 종자이고, 또 한 편의 진부한 ‘남자 영화’라고 규정하는 것이다(ize, “한없이 지루해진 지옥도”). 이 기사를 발행한 매체 ize는 후속 기사 “<아수라>는 ‘알탕 영화’인가, 오해받은 수작인가”에서 <아수라>가 ‘남자 영화’의 관습과 거리를 뒀다고 인정하며 전향적 태도를 취하지만, "폭력적인 남자들을 징벌하기 위해 은밀하게 숨어 폭력을 행사하는 또 다른 남성 창작자의 욕망"이 엿보인다고 추궁하며, “일련의 한국 남초 영화들이 공유하는 남성성의 판타지가 그것을 어느 정도 극복하려는 제스처의 작품 안에서조차 징벌적인 폭력의 이미지로 재생산될 때 느끼는 피로와 환멸은 정당하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아수라>가 근본적으로 남성성의 전시에 바탕을 두고 있고, 피의 축제를 벌이는 엔딩이 “징벌적 폭력”을 재생산한다는 지적에 수긍한다. 확실히 <아수라>는 역대 한국 누아르 영화, 범죄 액션 스릴러의 통속성 위에 건축돼있다. 그러나 (ize 기사에서 인정됐듯) 이 영화가 자신이 불러온 통속성을 비틀거나 뒤엎으며 반박하는 것 또한 사실이며, 이 점이 단순한 핑계가 아닌 다른 ‘남자 영화’들과의 차별점을 일구고 장르적 논평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도 평가받아야 공정하다.     


<아수라>는 재개발을 둘러싼 박성배와 반대파의 암투를 다루며 일견 공적 권력 비판을 수행한다. 그러나 앞선 영화들의 관성과 다른 방향으로 사회상을 그리려 한다. <부당거래>처럼 권력형 비리를 클로즈업해서 스케치하지 않고, <내부자들>과 <베테랑>처럼 약자에 대한 폭력을 다큐멘터리적 고발로 위장하는 위선에 빠지지도 않았다. <아수라>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기저에 깔고 밀도 높은 장르적 재현에 몰두한다. 이야기의 결론 역시 사회비판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한도경은 반자의적으로 문선모를 죽이게 된 울분, 보스에 대한 수컷의 대항 의식으로 박성배를 죽인다. 부패한 지도층 인사들을 언론 플레이와 사법 절차를 동원해 응징하며 현실과 포개 놓으려는 관습과 동떨어진 엔딩이다.     


<아수라>의 엔딩이 “나르시시즘적 비장미”를 품고 있으며 그것이 ‘남성성의 판타지’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 엔딩에 과연 비장미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었던가? <신세계>의 이중구는 "죽기 좋은 날이 구만" 가오를 잡으며 남자답게, 수컷답게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아수라>의 남자들은 죽기 싫어 발버둥 치다가 다 같이 몰살한다(앰뷸런스를 불러달라는 김차인의 울먹임을 떠올려보라). <아수라>의 엔딩은 주인을 무는 하수인의 복수극이 공멸로 끝난다는 점에서 <달콤한 인생>과 닮았다. <달콤한 인생>은 세련된 미장센으로 암흑가를 시각화하고, 한 남자의 몰락을 선문답 같은 아포리즘과 결부 지어 비장미와 허무주의를 양식화한다. <아수라>에는 암흑을 향한 낭만적 응시가 없다. 오히려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황폐한 ‘남자들의 세계’를 보여주며 끝맺는다. <달콤한 인생>에서 '피'라는 소품이 주인공 선우가 입은 하얀 와이셔츠에 새빨갛게 번진 비극의 순결함을 표상한다면, <아수라>에선 선지처럼 떡 지고 미끄덩한 피의 질감이 중요한 것이다.     


이 영화가 장르의 통속성을 구축해 온 배우들을 기용하여 그에 의지하는 한편 그들을 지렛대로 통속성을 뒤엎는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박성배 역을 맡은 황정민은 <신세계>에서 정청이었다. <신세계>는 대표적 브로맨스 영화이고, 정청과 이자성은 뜨거운 형제애를 관객 앞에서 부르짖는다. 박성배는 바로 그것을 부정하기 위한 캐릭터다. 그가 병실 장면에서 한도경과 문선모에게 뱉는 대사를 보라. “너희들 형제 같은 사이라면서?” 이때 두 사람은 투 샷으로 잡혀 어색한 행색으로 대꾸한다. “네.” “의리 좋지.” 박성배는 문선모의 뺨을 때리며 모욕을 주고 문선모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꼬리를 흔든다. 이 장면은 이후 한도경과 문선모가 ‘형제애’를 버리고 충성 경쟁을 하는 분기점이 된다. 김차인 역을 맡은 곽도원은 <범죄와의 전쟁>에서 역시 검사역을 맡았다. 법이란 대타자를 등에 업은 남근적 권위는 바닥으로 짓밟히고 그는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한다. 나는 이것이 같은 장르의 관습에 대한 비평적 장면으로 보였다.     


<타짜>에서 마지막 도박이 끝난 후 선박에서 펼쳐지는 지옥도는 범죄 세계의 본성, 인간의 욕망이 다다르는 막다른 길을 상징하는 한편, 아귀에 대한 고니의 복수가 완수되었음을, 그 세계에서 살아남은 최종 승자를 선언하는 스펙터클로서 미혹적 일렁임을 띤다. <아수라>가 그려낸 지옥도에는 승자가 없다. 모두가 절멸한 아수라장에 텅 빈 울림만 남았다. 이때 카메라는 주요 캐릭터의 시신을 수직 앵글로 차례차례 훑어간다. 이 장면은 <아수라>의 또 다른 성취로 꼽을만하다. 카메라의 고요한 움직임과 정갈한 프레임은 한 폭의 조감도를 그리면서 오프닝 시퀀스의 안남 시 전경을 잡은 버즈 아이 뷰와 대구 효과를 낸다. 이 장면은 수직적 폭력의 세계가 내파 된 잔해이면서, 장르의 전형성을 구축한 캐릭터들의 장례식인 것이다.      


한국형 누아르 계보에는 세 갈래 혈통이 있다. 하나는 장르성 짙은 이야기로 수컷의 비장미에 탐닉하는 <친구>와 <달콤한 세계>, <신세계>다. 하나는 권력 탐구를 표방하며 장르와 사회고발을 이화 접목하는 (<부당거래>와) <내부자들>이다. 하나는 뒷골목을 무대로 리얼리즘 드라마를 풀어가는 <초록 물고기>와 <비열한 거리>다. <아수라>는 장르의 관습을 불러와 재현하지만 그를 비판적으로 논평하며 최종적으로 어떤 혈족에도 속하지 않는다.     


6    


<아수라>가 폭력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라고들 한다. <아수라>는 러닝 타임 대부분을 폭력으로 채운다. 비슷한 장르 영화 가운데 이만큼 맞고 때리는 장면이 촘촘한 영화는 드물 것 같다. 폭력이란 화두를 말하지 않고는 <아수라>를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아수라>가 폭력의 길을 끝까지 간다고 할 때, 그것은 표현의 수위로 이해되는 듯하다. “최근 개봉한 <아수라>는 대신 폭력의 길을 택했다. 그 강도 면에서 일련의 남자 영화의 정점을 찍어 고어에 가깝다는 평이 나돌 정도다.” 같은 비판 말이다(ize, “한없이 지루해진 지옥도”) 이런 평가는 교정돼야 한다. 폭력의 세기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데서 <아수라>는 그렇게 센 영화가 아니다. <아수라>는 주로 손바닥과 주먹 같은 신체 부위에 의한 타격으로 폭력을 재현한다. <악마를 보았다>처럼 연장과 흉기에 의한 적나라한 신체 훼손으로 페티시즘을 일으키는 영화에 비할 바가 아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킬빌>에서 더 브라이드가 엘 드라이버의 눈알을 뽑아 발로 밟아 터트리는 클로즈업 숏을 떠올려도 고어라 부르기 머쓱하다. <아수라>에도 신체가 훼손되는 장면이 세 번 나오지만, 훼손되는 과정이 아니라 훼손된 결과를 보여주고 그 마저도 수위가 통제돼있다. 그럼에도 <아수라>의 폭력 수위가 높다고 느낀다면 폭력을 묘사하는 각도가 다르기 때문이고, 폭력 이외의 다른 무언가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아수라>가 폭력을 빚어내는 방식을 살펴보자. 나는 그것이 비슷한 계열의 영화들과 꽤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수라>에는 두 가지 계열의 폭력이 있다. 하나는 캐릭터들이 주고받는 ‘싸움’이고 하나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때리는 ‘폭행’이다. 전자는 흔히 관객이 즐기는, 합을 맞추고 동선을 짜는 액션으로 수렴한다. 후자는 액션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격렬한 몸싸움과 현란한 몸놀림, 다이내믹한 동선이 주는 쾌감 같은 것 없이 한쪽이 한쪽을 가학 하는 모습을 집요하게 응시할 따름이다. 이것이 <아수라>가 폭력을 재현하는 기조이고, 나머지 액션 계열 장면 또한 이 기조에 발 딛고 있다. 흔히 <아수라>를 타란티노 영화에 비유하지만, 폭력의 무드를 유쾌한 율동으로 전환하고 신체 훼손 페티시즘을 전시하는 타란티노 영화와 다른 점이 많다. 폭력영화의 고전이라 불리는 샘 페킨파 <와일드 번치>에선 스타일리시하게 편집된 총격전 사이사이에 피격당한 인물이 말을 타고 쓰러지며 유리창이 깨지는 광경을 슬로모션으로 잘게 나눠 반복 삽입한다. <아수라>의 폭력은 이런 유려한 연출, 액션으로 승화하는 폭력과 노선이 다르다. <올드보이> 장도리 액션처럼 1대多의 싸움을 수평 트래킹숏/풀숏과 롱테이크로 펼쳐 보여주며 액션을 미학화하는 것과도 다르다.     


김성수는 ‘씨네 21’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노선을 풀어 말한다. “사실 보통 한국 액션 영화에 비해 강도가 세지는 않다. 한국영화에서 이미 무수히 반복된 액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상황에서 제일 피해야 하는 앵글을 일부러 택해서 의도적으로 세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수위가 통제된 폭력을 전경화 하며 폭력의 효과를 증폭했다는 뜻이다. 여기에 나름의 부연을 덧붙여 볼 수 있겠다. <아수라>가 다른 영화와 다른 점 하나는 타격이 가해지는 순간을 피하지 않고 응시한다는 것이다. 보통의 액션 영화에서는 적수를 가격하는 모션 혹은 가격에 반응해서 나가떨어지는 모션에 집중한다. <아수라>가 노리는 건 그 사이 소거되는 타격감이다. <아수라>는 가격이 이뤄지는 순간을 포착하고, 가격과 가격에 의한 리액션을 나누지 않고 하나의 숏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오프닝 시퀀스를 플래시백 하는 장면에서 한도경이 실신한 작대기를 패는 상황도 그렇다. 이때 작대기는 시멘트 바닥에 누워 있어 바닥에 뒤통수를 찧으며 한도경이 퍼붓는 주먹을 완전히 흡수한다. 검찰팀 도창학이 한도경 얼굴에 보자기를 씌우고 때리는 장면은 이런 기획의 정점이다. 다른 수사관들이 한도경의 머리가 젖혀지지 않도록 받치고, 도창학이 주먹세례를 퍼붓는 모습에 카메라는 정면으로 집중한다. 이때 카메라는 도창학과 한도경 사이에 자리 잡고, 주먹이 얼굴에 퍽하고 박히는 순간, 피가 터져 나와 보자기가 뻘겋게 물드는 풍경을 근접 화면으로 바라본다. 이렇듯 <아수라>가 재현하려는 것은 주먹과 주먹의 교환이 아니라, 주먹이 뼈와 살을 파고드는 둔탁하고 육중한 폭력의 질감이다. 이건 근본적으로 묶어놓은 개를 패는 발상과 같다.     

이런 일방적 폭행은 언뜻 가학을 연출한 것처럼 보이지만, 때리는 자의 쾌감보다 맞는 자의 상태를 클로즈업하므로 피학이라고 봐야 한다. ‘이투데이 비즈엔터’ 기자 정시우는 <아수라>가 의도적으로 관객에게 '통증'을 안긴다고 별점 평에서 평했는데 정확하지 않다. 관객은 영화 속 인물에게 동일시하는 한편, 영화 속 인물을 대상으로서 응시한다. <아수라>에서 폭력은 한도경에게 집중되고 그는 내레이션으로 유일하게 내면을 열어 보이는 주인공이다. 그러나 한도경에겐 동일시할 소지가 적다. 우리가 무언가를 아프다고 ‘느낄 때’, 그 통각은 육체적 반응은 물론 정서적 반응과 화학 작용한다. 가령, 똑같은 세기로 주먹에 콧대를 맞더라도 친구와 장난을 치다가 실수로 맞는 것보다, 억울한 상황에서 린치 당할 때 아프다는 감각이 사무치는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영화 속 캐릭터가 선하고 약한 인물이거나 그에게 가하는 폭력이 나쁘고 비겁할 때 관객은 아픔에 공감할 것이다.     


<아수라>의 관객은 한도경이 맞는 모습을 보며 죄의식을 느끼기 힘들다. 그 또한 악인이니까, 그도 똑같이 작대기를 묶어놓은 개처럼 때렸으니까. 정우성의 특별하게 빼어난 육체 또한 동일시가 아닌 관조적 응시의 대상으로 미끄러진다. 한도경이 가장 처참하게 유린당하는 검찰팀 폭행 장면에서, 카메라는 보자기를 쓴 한도경의 시점 숏을 일순간 경유한다. 이 시점의 경유는 관객을 한도경의 자리에 상상적으로 앉혔다가 그의 얼굴이 뭉개지는 장면을 구경하는 자리로 복귀시킨다. 이때 느껴지는 통증이란, 통각이 거세된, 통각이 지나쳐 쾌감의 단계에 이른 외설적 통증이다. 이것이 <아수라>를 지지하는 관객들이 통증에 대한 연대의식이 아닌 폭력에 대한 걸쭉하고 비릿한 쾌감을 맛보았다고 환호하는 이유일 것이다. <아수라>에서 폭력은 한도경의 몸을 향해 한 줄기로 퍼붓고 떨어진다. 그 폭력이 주는 쾌감 하나는 정우성의 아름다운 육체를 후벼 파는 걸 지켜보는 관음증인 것이다.     


7   


<아수라>의 폭력은 긴장감, 압박감처럼 심장을 거머쥐는 감각을 동반하고 수반한다. 폭력이 행사되기 전에, 혹은 폭력이 행사되지 않는 순간에도, 통제된 수위의 폭력을 스릴러적 감각으로 조여 주는 폭력 바깥의 장치가 있다. 가령 한도경 아내가 누운 병실에서 한도경이 “그래도 (태 사장을) 단호하게 내치셔야 합니다”라고 충고할 때, 문득 박성배가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꼬나보는 장면은 어떤 폭력도 발동하지 않지만 무자비한 느낌을 준다. 다름 아닌 '위력'威力의 효과다. <아수라>의 폭력 장면은 위력과 함께 재현되고, 나아가서 위력이 작동한 결과이며, 궁극적으로 폭력이 아닌 위력의 재현이다. 이 영화의 모든 폭력은 위계질서를 반영하며 발발한다. 영화에서 최초로 일어나는 폭력, 정우성이 작대기를 팰 때 그는 ‘개쓰레기’ 같은 하수인이 기어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모욕과 얼차려를 주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끝없이 반복되고 위계질서의 수직구조를 타고 흘러내린다. 한도경에서 작대기로, 김차인에서 한도경으로, 박성배에서 김차인/한도경/문선모로. 이것이 바로 영화 전체를 장악하는 핵심 개념, ‘폭력의 낙수효과’다.     


이는 <아수라>의 두 가지 계열의 폭력 중 ‘폭행’에서 중점적으로 드러나지만, 나머지 ‘액션’ 계열 또한 이 논리에 따른다. 오프닝 시퀀스 옥상 장면에서의 주먹다짐 와중 황반장은 서열로 찍어 누르듯 한도경을 때리고 한도경은 반항하는 몸짓으로 대항한다. 장례식 시퀀스 한도경과 문선모의 육박전도 늙은 수컷과 어린 수컷이 서열을 재정립하는 치고 박기와 같다. 주먹다짐 끝에 문선모가 승리하자, 한도경은 바닥에 걸터앉은 채 “형이 미안하다”라고 꼬리를 내린다. 이때 카메라는 한도경을 부감으로 문선모를 앙각으로 잡으며 뒤바뀐 서열을 알려주는데, 이런 수직구도 앵글은 인물 관계를 둘러싸고 계속해서 반복-변주된다.     


안남 시는 수컷들의 먹이사슬로 엮인 정글이다. 각각의 인물을 엮는 사슬 관계도 공간과 인물, 카메라를 통해 가시화된다. 한도경이 김차인 팀에게 불려 오는 공간은 컨테이너 수사차량, 비밀 수사실처럼 길고 좁으며 외부와 닫혀있는 공간이다. 김차인은 한도경에게 직접 폭력을 쓰기보다 심리적으로 짓뭉개고 뒷전에서 팀원들을 부린다. 반항하는 한도경이 팀원들에게 사지를 제압당해 김차인을 노려볼 때, 마치 사냥개를 부리는 포수에게 붙잡혀 발버둥 치는 짐승 같다. 반면 박성배는 한도경과 넓은 공간에서 독대하며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존재감을 과시하는 경향이 있다(나중에는 문선모가 참관한다). 나직한 목소리로 운을 떼다가 덜컥 목젖을 조르거나 담뱃불을 관자놀이에 지지는데 한도경은 겁에 질려 저항하지 못한다. 흡사 뱀 앞에서 몸이 얼어붙은 양서류처럼. 한편 한도경이 이주민 노동자 무리에 난입할 때 그는 하이에나 떼에 둘러싸여 으르렁 거리는 사자 같다. 이 장면과 여기서 이어지는 카체이스 장면은 <아수라>의 백미로 꼽을만하다. 사운드에 차폐막을 친 듯한 이명 효과와 피를 덮어쓴 한도경의 얼굴, 자동차가 도로벽을 갈면서 튀기는 불똥, 그 배경으로 어지럽게 흔들리는 불빛, 물리적 논리를 초월한 카메라의 비행이 공감각적 작용을 내며 액션의 감정선을 폭발적으로 고양한다.     


이렇듯 액션의 기저에 긴장감과 파토스가 들끓는다는 것이 <아수라>의 훌륭한 점이다. 김성수는 이 장면을 “한도경의 스트레스가 극대화되는 장면”이라 설명했다. 달리 풀면 김차인과 박성배로부터 감당할 수 없이 흘러내린 폭력의 압력을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이주민들에게 쏟아붓는 것이다. 한도경이 이주민들이 탄 차량을 쫓아가는 이유는 ‘총’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는 “내 총 어딨어”라며 발작적으로 울부짖는다. 먹이사슬 최하층에 있는 이주민들에게 짓밟혔다는 모욕감에 남근적 자존심(총)을 회수하려 포효하는 것이다. <아수라>에서 폭력과 드라마가 한 몸으로 엉켜 달려가는 양상을 요약하면 이렇다. "넌 개쓰레기"라고 모욕을 주는 위력과 “날 좆으로 보지 말라”는 울분이 먹이사슬 중간 자리에 있는 한도경에게 집중되는 것이다.     


또 다른 포인트는 폭력의 효과가 다른 차원으로 흡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폭력 영화로 유명한 또 다른 작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도 수위 높은 폭력이 빗발친다. <하나비>에서 주인공 니시가 야쿠자 눈알에 젓가락을 쑤셔 넣을 때, 돌발하는 폭력으로 세계의 난폭한 질감을 형상화하는 한편 니시의 강인한 마초성을 꾸며주며 캐릭터가 폭력을 흡수한다. <아수라>에선 폭력이 인물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위계구조의 효과로서 빠짐없이 폭력을 수행할 뿐이다. 폭력은 서사로도 잘 흡수되지 않는다. 다른 액션 영화에서 폭력이 이야기의 일부로 갈등과 사건을 해결하는 역할도 한다면 <아수라>의 폭력은 이야기와 분리된 장르의 효과다. 한도경의 수난은 박성배 살인 교사 혐의를 녹음 해오라는 김차인의 협박으로 본격화된다. 이 녹음 파일은 거의 맥거핀이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녹음되지 않으며 그것으로 사건이 다른 국면으로 전환되는 것도 아니다. 왜 녹음파일을 갖고 오지 않냐며 한도경을 린치하는 명분으로 쓰일 따름이다. 검찰팀이 황반장이 살해되던 순간을 녹화한 동영상을 한도경에게 보여주는 장면에 이르러선 이야기 개연성이 폭력 재현에 종속돼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현직 경찰의 섹스 장면을 도촬 하고, 후미진 건물에서 일어난 살인까지 감시할 정도로 전능한 수사팀이 왜 한도경에게 증거를 물어오라고 의존하는가.     


서사화·인물화 되어 새어나가지 않은 폭력은 한도경에게 일점사된 채 누적되며 관객의 심장에 부담을 준다. 이렇게 끊임없이 캐릭터를 피학 하는 것은 고문을 보여주는 영화의 문법과 비슷하다. 가령 <미저리>에서 소설가 폴에게 자신이 원하는 소설을 쓰라고 하는 애니 윌킨스의 요구는 영화가 광기 어린 가학을 보여주기 위한 명분이다. 이 경우 가학과 피학의 원인이 윌킨스의 이상 성격으로 환원된다면 <아수라>에서 그 원인은 위계질서의 존재다. <남영동 1985>에서 김종태의 몸을 깎는 고문의 파도는 빨갱이라는 거짓 진술서를 받아내기 위한 수단이며 목적이 완수되는 순간 끝난다. <아수라>의 폭력은 다른 무엇의 수단이 아닌 위계질서 자체의 재현이기 때문에 폭력이 종식되기 위해선 위계질서로 세워진 세계가 절멸하는 수밖에 없다.     


타란티노 영화가 뿜어내는 극치에 이른 카타르시스는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의 효과다. 강간 살인마가 여자들의 반격에 몰매를 맞고, 희대의 파시스트 일당을 불타는 극장에서 몰살시키고, 백인의 장르를 빼앗은 흑인 노예가 주인의 저택을 초토화시킨다. 이것은 장르의 공고한 관습과 다시 쓸 수 없는 역사를 도덕적 당위를 지렛대로 뒤엎어 버리고 마음껏 난도질하는 쾌락이다. <아수라>에는 도덕의 위계가 없고 폭력의 위계만 있다. 이데올로기에 자비를 구하거나 이데올로기를 사살하는 대신, ‘폭력의 낙수효과’라는 이데올로기의 현존에서 빠져나갈 수 없고, 유일한 비상구가 있다면 몰살과 공멸이다. 응축된 폭력은 끝까지 해소되거나 승화되지 않고 관객의 오감에 진한 잔상으로 맺히는 것이다.     


8     


<아수라>가 즐기게 하는 폭력은 죄의식도 카타르시스도 일으키지 않는다. 흔히들 <아수라>가 도덕과 윤리를 논외 하고 질주하는 영화라고 말하지만 이 영화는 용의주도하게 윤리적 안배를 해놓았다. 폭력은 나쁘다는 도덕률을 돌파하기 위해 액션 영화가 실행하는 원론은 정의로운 인물이 동정할 가치가 없는 악한을 향해 폭력을 쏟는 것이다. 말했듯이, 타란티노 영화가 유혈 낭자한 살육극으로 통쾌함을 끌어내는 것은 공인된 절대악을 난자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악한 강자가 선한 약자를 때리는 걸 보여주면서, 그것이 잘못된 폭력이라는 표면적 메시지 아래로 폭력을 관음 하게 하는 외설적 재현도 있다. 생각건대, 윤리적 어폐가 가장 큰 것은 이 경우일 것이고, 이런 연출은 관객의 죄의식에 가닿게 되어 있다.     


<아수라>에는 선한 인물이 없다. 악한 강자와 악한 약자가 있을 따름이다. <아수라>는 다른 액션 영화가 타고 내려오는 도덕의 비탈길을 거슬러 오른다. 선한 인물이 악한 인물을 응징하는 권선징악도 아니고, 악한 인물이 더 악한 인물을 응징하는 자경단식 폭력도 아닌, 악한 인물이 악한 인물을 끝도 없이 학대하는 수난극을 들이민다. 때문에 관객은 한도경을 향해 안타깝다는 마음을 느낄망정 그에게 죄의식을 느끼진 않고, 박성배에 대한 한도경의 복수에서 응징의 카타르시스도 구할 수 없다. 영화는, 장례식장에 캐릭터를 가둬놓고 몰살시키면서 폭력의 난장을 펼친 인물들에게 윤리적 처벌을 내린다. 이건 명시적 차원에서 윤리적 어폐를 의식하고 조율하는 연출이다. 한편으론 폭력의 원인·해소에 대한 물음과 지향 또한 없으므로, 폭력을 원래부터 그러한 것, 그 세계의 인물들이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숙명적으로 긍정하고, 그래서 세계 자체를 포기하는 결론으로 이끌린 것이다.      


9    


현실세계의 사건과 이름이 노골적으로 거명되지만, 이 영화의 ‘사회 비판’을 현실 정치에 대한 직설화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황진미 “‘아수라’ 정우성 연기력을 지적하는 자들을 용서하소서”, 김형석 “우리가 사는 지옥, <아수라> 깊이 읽기”). 그것은 영화의 문법을 오판하는 것이다. <아수라>는 폭력의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세계를 꾸며놓고, 그런 남성적 먹이사슬, 위계질서의 존재가 그 세계의 악한 본성이라 주장한다. 한편 지극히 장르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그와 스며들지 않는 현실의 기호들을 파편적으로 인용한다. 그렇게 현실과 접점을 만든 후, 폭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폭력의 낙수효과’의 모형도로 그리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를 다분히 생태학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일뿐더러, 정치를 논하는 정교한 어법은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장르적 세계를 만든 후 그 바깥에서 현실의 조각을 끼워 맞추는 것은 한국 상업영화의 익숙한 경향이기도 하다(<7번 방의 선물>, <군도>). 그러나 이렇게 사회를 추상화된 모습으로 그려내는 전략은 20년 전 작품 <비트>와 명암을 이루며 오늘날 사회상을 환기시킨다.     


<아수라>는 <비트>의 타락한 판본이자, 90년대 방황과 공허의 청춘 서사의 몰락한 후일담이다.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는 <아수라>의 내레이션은 정확히 <비트>와 동일한 구조다. “나에겐 꿈이 없었다.”(<비트>)에서 “나는 인간들이 싫습니다.”(<아수라>)로의 이행. 김성수의 페르소나이자, <비트>를 통해 청춘스타로 비상했으며, 배우의 아우라로 <비트>란 영화의 아우라를 대체한 정우성의 입에서 이 말들이 나온다는 것이 특별하다. 김성수는 한도경을 안남 시의 내부자로 자리 매기는 한편, 박성배 주변을 맴돌고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관찰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준다. 많은 관객이 얘기하다시피, <아수라>에서 정우성이 욕설을 뱉을 때 어색하다는 인상이 든다. 이것은 연출의 결함을 넘어 텍스트 안에서 모종의 효과를 창출한다. 한도경은 장르의 관습에 따라 욕을 하고 손찌검을 하며 위악을 부리지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설프다.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능한 면모는 그가 폭력의 낙수효과에 얻어맞는 것에 은연중에 개연성을 더해준다. 그는 박성배와 김차인, 이 세계를 지배하는 부정한 권력의 어느 편으로도 편입하지 못하고 안식처를 잃은 채 상처 입고 헤맨다. 마치 정처 없이 방황하고 부유하던 <비트>의 민이처럼, 그러나 찌들고 때 묻은 모습으로. 이것은 반영웅 정우성이 육화한 고결함과 아웃사이더 이미지를 끌고 와서 더럽히는 것이기도 하다.      


한도경은 박성배라는 나쁜 아버지에게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와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에 모순적으로 사로잡혀있지만 그 어느 쪽도 허락받지 못한다. 먹이사슬의 아랫것이던 문선모라는 새로운 아들에게 밀려나게 되자, “넌 아직 꼬마야”라며 으르렁거리지만 어설픈 위악은 비웃음에 부쳐진다. 김차인이란 새로운 아버지 역시 믿을 수 없는 나쁜 아버지이며 반항의 시도는 늘 실패한다. 한도경은 마흔을 넘은 중년이지만, 아버지를 극복하며 또 다른 아버지로 자립하고 존경받는 데 실패한 소년성을 품고 있다(마침 한도경과 아내 사이엔 아들이 없다. 그는 죄 많은 남편일 뿐 ‘아버지’는 아니다.) 이 대목에서 <아수라>는 비트를 뒤집은 또 한 편의 성장 서사로 체감된다.     


90년대는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민주주의 이행, 국민 국가의 마지막 호황이 교차한 자유와 일탈, 퇴폐의 시대였다. 세기말을 앞두고 사회에 혼돈의 기운이 스며들었지만, 당대의 청춘 서사는 그것을 우수와 방황이 깃든 낭만적 서사로 팔았다. 그로부터 20년, 이미 수십 년 전 산업화를 완수했음에도 사회는 먹고사는 문제의 절망감에 짓눌려있다. 갑을관계의 폭압 아래 강한 자가 모든 걸 독식하는 세상에서, 저마다 분노에 찬 채 나보다 약한 자에게 폭력을 퍼부으며 분노를 전가한다. 무능한 아버지(기성세대)에게 반항하며 꿈과 낭만의 부재에 순결하게 스러져간 스무 살의 민이는 꿈을 입에 담는 것조차 사치가 된 세상에서 세파에 찌든 얼굴로 결코 이길 수 없는 아버지에게 압사당한다. 아버지를 죽이는 유일한 길은 아버지와 함께 죽는 것이요, 살부의 동기는 윤리의식도 정의감도 아니다. 이대로는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절망과 끝없는 피학에 대한 원한 감정에 차서 몰살을 택하지만 나보다 약한 자에게 가한 폭력은 끝끝내 성찰되지 않는다(한도경은 장례식 장에서 이주민들과 마주치며 분노를 되새기고 다시금 ‘밟으려’한다). 모두가 피해자 의식에 차서, 내가 당하는 폭력에 절규를 토하지만 가해자로서 쏟아낸 폭력은 자각하지 못하고, 지옥 같은 세상이 차라리 멸망하길 꿈꾸는 2016년, 지금 이곳의 풍경이다.     


나는 <아수라>가 빚어내는 폭력의 속도감에 아찔했다. 이 영화가 지닌 상업영화 지형에서의 차별점과 장르에 대한 메타적 시선 또한 좋게 평가하지만, 사회를 지배하는 위력威力을 비판하면서도 폭력에 대한 탐학적 시선으로 그것을 덮으며 자신의 메시지를 객관화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끝끝내 지지하지는 못하겠다. 그리고 객관화의 실패를 아울러, 메타 텍스트 차원에서 동시대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반사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이 영화를 주목한다. 어쩌면 윤리적 주장을 감추고 악인들로 가득한 세계를 꾸며서 폭력의 흉한 질감을 즐기게 하는 연출 자체가, 인간성에 대한 회의와 날 것의 폭력을 떳떳하게 드러내는 오늘날 위악의 시대정신과 꼭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아수라>는 2010년대, 우리 시대의 문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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