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에 관한 대표적 오해는 그가 과격하다는 통념이다. 그의 영화는 윤리적으로 안전한 영화다. 생각건대, 윤리적으로 급진적인 태도는 기존의 가치를 공격한다. 김기덕은 가치를 향해 날을 벼리지 않는다. 김기덕은 지배적 가치의 포섭 기준을 두고 인정 투쟁을 벌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쁜 남자'의 순정도 인정해 달라는 말이다. '창녀'도 '성녀'란 걸 인정해 달라는 말이다. 그는 속된 것의 이름으로 성스러운 것을 도발하는 한편 내밀하게 동경해왔을 뿐 성속 이분법을 해체한 다른 프레임을 상상한 적 없다. 지금껏 김기덕이 기성 사회, 주류 평단과 영화 안팎으로 벌인 무수한 논란의 다른 이름은 '격렬한 투항'이다.
김기덕의 영화에는 정치가 없고, 세상에 대한 생태학적 견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가학과 피학의 먹이사슬, 그 사슬을 따라 흘러 내리고 역류하는 폭력의 순환. 김기덕의 인물들이 폭력의 영겁회귀에 난타 당하고, 폭력에 짓눌리고 미쳐가며 그것의 현존을 증명하는 것은 김기덕이 폭력을 해소될 길 없는 자연적 질서처럼 바라 본다는 뜻이다. 김기덕의 영화에는 폭력에 대한 천착과 발버둥은 있어도 폭력을 향한 반성적이고 메타적인 시선은 없다. 아무리 필모그라피에 국제 정치와 지역 정치, 자본주의의 도상을 끌어들여도, 폭력을 비평하고 제어하는 정치적 작업이 아니라 폭력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삶의 멜로 드라마로 빠져 버린다. 이 점에서 그의 영화는 종교적이고, 종교적인 것이 여성 혐오를 논리화한다. 인간이 어찌할 길 없는 세상을 정화할 수 있는 건 신의 권능 뿐이다. 그러나 신은 구원을 갈구하는 세상을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지상에 부재하는 그의 아득함과 초월성을 입증한다. 여기서 신이 버린 저 불모의 세상을 구원할 책임을 떠안는 것이 여자다. 김기덕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처 입은 중생을 품어주려 현신한 관세음보살의 이미지, 하느님 아버지가 구하지 않은 예수를 껴안는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피에타)는 도식적이고 필연적인 귀결이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여자는 세상의 환유물이기도 하다. 세상으로부터 소외 당하는 밑바닥 인생 남자가 여자를 구속하고 학대한다. 처음엔 이 세상처럼 날 거부하고 외면하던 여자가 문득 날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남자는 마침내 세상에게 인정 받았다는 설움 어린 감격에 복받친다. 왜 하필 여자가 세상의 환유물일까. 아마도 세상은 나보다 강하지만 여자는 나보다 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을 대신해 날 품고 격려해달라 요구하기에, 이보다 알맞은 상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