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대의 잘못이 아니다' 칼럼 비판
'20대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칼럼을 읽었다. 논조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실 파악에 의문이 든다.
가난한 20대 남성은 너무 억울하다. 부자 부모도 없고, 일자리는 적은데 군대를 다녀오니 동년배 여성에게 치이고, 때로는 외국인 노동자와 경쟁해야 한다. ‘노오력’을 강조하는 보수나, 거시적인 구조를 보라는 진보나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부자 부모 없는 거야 남녀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통계를 해석하면 군필 이력은 리스크가 아니라 오히려 소득을 보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4년제 대학 졸업 1년 이내 결혼 전 남녀의 소득을 비교하면, 전반적 소득 수준은 군필 남성 > 면제 남성 > 여성인데, 특히 소득 중하층 구간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소득 하층 구간에서 군필 남성은 여성에 비해 15-20% 정도 소득이 높다. 반대로 군필 효과를 통제하면 남녀 소득 격차는 통계적으로 무의미해진다(출처). 언젠가 나는 사회보장 제도가 약한 한국에서 군필 이력은 취업 시장 등에서 사회보장의 기능을 대신한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이를 실증적으로 뒷받침해주는 통계인 셈이다. 그러니까 ‘가난한 20대 남성’들이 군대와 일자리를 결부 지어 여성에 대해 억울해할 대목은 없다.
한국의 취업난은 취업 자체가 힘들 다기 보다 안정성과 적정한 임금 수준을 제공하는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점에 있다. 주로 기피 업종과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내국인의 취업 경쟁 상대가 될는지, 된다고 해도 유의미한 수준일지도 의문이 든다.
정리하자면, 이 칼럼은 20대 남성의 ‘억울함’을 과장하는 측면이 있다. 이런 논조가 새롭거나 범상치 않은 것도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진보 담론을 지배해 온 건 세대론이다. 취업난과 고용 불안정에 직면한 20대의 비참함을 고발하는 담론. 여기서 20대 남성과 20대 여성이 겪는 경제적 특수성을 구분하는 논의는 부족했기에, 세대론은 젠더란 잣대 없이 20대 남성을 곧 20대로 대표시키는 편향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기성세대처럼 호황의 단물을 받아먹지도 못하고, 취업과 결혼 같은 사회화에 실패를 겪고 있는 예비 가부장들의 담론.
세대론은 현실에 뾰족한 처방전을 발행하지 못했고, 진보언론은 20대 남성들을 ‘피해자’로 묘사하며 연민을 퍼붓는 방향으로 담론을 전유했다. 세대론의 성과도 분명히 있겠지만, 나는 그와 함께 이 담론이 젊은 남성들에게 자기 연민의 도피처를 제공하는 패착에 빠졌다고 보는 편이다. 이런 경향은 지난 10년 간 젊은 세대를 인터넷 시민사회와 장외 정치, 선거 정치에 동원해 온 범야권의 정치공학과 맞물려 심화되었다. 바로 이 점이 현재 젠더 갈등 양상에 부작용을 미친다. 피해자 의식에 길들여진 남성들이 자신을 가해자(‘잠재적 범죄자’)로 지목하는 데 격렬한 도덕적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여성들이 차별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현재 젊은 남자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항하는 이론적 지주 역할을 해주는 건 반여성주의와 세대론-헬조선 담론의 결합이다. "88만 원 세대 몰라? 너네 여자만 힘들다고 할 거야? 나도 힘들어, 날 나쁜 놈 만들지 말라고!"
이 칼럼은 이상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가난한 20대의 처지를 말하면서 그것을 20대 남성으로 부지불식간에 치환하고, 그들의 피해자 의식을 여성과 경합시키는 논조가 그렇다. 한귀영 씨는 여러 차례 세대론을 비판적으로 평가해온 걸로 기억하는데 왜 자신이 가리키던 함정에 걸어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20대 남성들의 고충을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지난 시절 그들이 세대론에 의해 진보의 적자로 ‘힐링’과 ‘멘토링’을 받을 때도, 거기 포함되지 못한 다른 이들도 있음을 기억하자는 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20대 남성들의 억울함은 너무 많이 호소되어 왔다. 사회가 그것을 몰라줘서가 아니라 특권 화해서 문제가 생겼다.
지금 필요한 걸 꼽자면, 세대론의 잔재를 정리하고 그 틀을 보편적으로 넓히는 동시에 세분화하여, 세대와 계급, 젠더 같은 다양한 갈등축의 연대를 주선하는 일 아닐까. 그를 위해 저 가난한 남자들에게 주체로서의 가능성과 책임감을 자각케 해야 하지 않을까? 나 같은 오랄 워리어야 이 이상 구체성 있는 대안을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같은 이들의 몫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