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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Dec 19. 2015

즐겁고 안타까우십니까?

<7번 방의 선물> (이환경, 2013)


남사스런 고백으로 들머리를 터야겠다. <7번 방의 선물>(이하 <7번 방)을 보는 동안, 어느 틈에 눈꺼풀을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막아내지 못했다. 남사스럽다는 말로 감정의 무게를 매긴 건, 이 영화를 보며 우는 것이 유치한 목불인견이란 뜻이 아니다. 극장에 앉아 눈물을 훔치는 게, 그만큼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건이란 뜻이다. 뒤집어 말하면, 나 같은 정서적 벽창호의 메마른 가슴도 무장 해제할 만큼 영화가 던지는 최루탄이 강력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이 영화에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개봉 3주 만에 700만 관객의 울음보를 터트리는 기염을 토한 이 영화에는 두 가지 의문이 제기돼있다. 먼저, <7번 방>이 눈물샘을 두들기는 것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는 멍청한 영화란 냉소다. 그리고 지적 장애인이란 정체성을 코너에 몰아넣고 여흥 거리로 삼는다는 우려다. 나의 고민의 외연은 둘 사이 어디쯤이거나, 둘 모두와 교차하지 않는 곳에 그어져 있다.


 특정한 영화가 특정한 임무에 특화돼 있다는 사실만으로 깎아내릴 순 없다. 많은 경우, 영화의 기술적 문제란 것이 본연의 의도를 세련되게 관철하지 못하는 데서 불거진다는 걸 떠올린다면 말이다. <7번 방>은 부지런히 비축한 설정과 일관되게 초점을 맞춘 예승과 용구의 관계를 조바심 부려 탕진하지 않고, 결정적 국면을 전후해 점진적으로 살포한다. 온갖 개연성 이탈과 설득력 붕괴에 직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로 인해 가능했던 설정 덕분에 반사적이지만 밀도 높은 신파를 연성했다. 



영화가 놓쳐 버린 윤리적 고민


<7번 방>이 기술적으로 조리 있는 신파라고 동의하면서도 스크린과 마주하는 내내 입맛이 텁텁했다. 어떤 대목에서는 이 영화가 비겁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부터 쏟아낼 토로는 앞서 언급한 후자의 논평(듀나, 「<7번 방>, 류승룡의 기막힌 연기에 감탄했지만...」, 『엔터미디어』)과 같은 편에 서 있다. 하지만 문제를 명확히 하려면 지적 장애인을 부적절하게 소비한다는 단상을 넘어 중요한 장면을 꼼꼼하게 들춰 봐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타자의 정체성을 빌려와 최루의 퍼즐을 완성하면서도 그에 따른 윤리적 고민을 방기한다.


나는 <7번 방>이 지적 장애인으로 설정한 주인공 용구를 학대하는 것은 아닌지 꺼림칙했다. 러닝타임 내내, 영화는 손 가는 대로 용구의 뺨을 올려붙이고, 내키는 대로 발길질을 퍼붓는다. 대충 손가락을 꼽아도 용구는 여섯 차례에 걸쳐 열댓 번의 구타에 가차 없이 노출된다. 이것을 지적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전략이라고 이해하는 방법도 있다(실제로 이환경 감독은 비슷한 취지의 변을 여러 인터뷰에서 남겼다). 나는 장애인을 향한 우리 사회 차별의 실상이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이라 동의한다.


 그렇지만 영화 속 폭력이 정말로 관객과 용구 사이 현실의 낭떠러지를 잇는 가교로 설계된 것인가. 혹은 그 목적을 위해 제대로 복무하는가. 영화 초반을 지나 서사가 물살을 탈 때, 아동 성폭행과 살인죄 누명을 쓴 용구가 교도소로 이송된다. 이 장면을 전후한 몇 가지 상황의 부재는 영화의 관심사를 판별할 리트머스 시험지다. 먼저, 경찰에 체포된 용구가 재판을 받는 과정이 무슨 점프 컷처럼 누락돼 있다(나는 이 영화가 사법체계 모순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평가가 그냥 주례사라고 생각한다). 이송 장면에서 교도소 과장은 수화기를 둔기 삼아 거의 발작적으로 용구를 가격한다. 둔탁하게 퍼지는 타격음과 고통스러워하는 용구의 모습.

 

영화는 허구와 허구 사이 숏의 선택지를 갖는 선택과 배치의 예술이다. 감독은 실재하지 않는 재현 가능한 숏들 중 의도에 부합하는 하나를 선택한다. 그렇게 선택한 숏들을 연결해 필름을 완성한다. 이환경 감독은 낯선 공간에 두렵게 떨궈진 용구의 심경을 표현하는 데 필름을 할애하는 대신 다른 선택을 감행한다. 부조리한 폭력의 감각을 관객이 곱씹을 시간을 주지 않고, 곧바로 용구를 7번 방에 투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고편 영상을 통해 익히 알려진 코믹한 대사를 뱉도록 지시한다. “1961년 1월 18일에 태어났어요. 제왕절개. 엄마 아팠어요. 내 머리 커서.” 감독은 조금 전 용구를 구타하고는 손바닥 뒤집듯 웃음의 도구로 사용한다. 나는 차마 그 장면에서 웃을 수가 없었다. 단선화된 위악적 폭력이 비일상적 공간과 비현실적 사건을 매개로 행사될 때, 지적 장애인을 옭아매는 일상적 편견에 연루된 우리 모두의 죄의식은 깨끗하게 소거될 것이다. 방관자의 자리에서 ‘타인’의 폭력과 ‘타인’의 고통을 구경하며 안락하게 웃음 짓고 안전하게 눈물 훔친다. 나는 이환경 감독이 용구를 다루는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이 도구화의 증거는 도처에 산재한다. 이유 없이 따귀를 맞는다. 흉물스런 추행으로 선의가 매도당한다. 반론 소지가 흘러넘치는 사형이 선고된다. 그때마다 용구는 버튼을 누르면 녹음된 음성을 재생하는 곰 인형처럼, ‘예승이’라는 호명만 반복하며 ‘딸 바보’의 정체성을 배정받는다. 영화에는 용구가 ‘예승이’에게서 벗어나 주체적 의사를 발현하는 대목이 두 번 등장한다. 7번 방 방장 소양호를 겨눈 칼침을 몸을 날려 대신 맞는 장면, 화재가 난 교도소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과장을 구출하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 역시 예승이를 교도소에 들여오기 위한, 과장을 서사에 개입시키기 위한 철저히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감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정서적 감흥과 정화를 위해 용구의 정체성을 소진한다. 지적 장애인이란 어렵고 곤란한 질문과는 대면하지 않는다. 


용구를 향한 정체성의 강요가 지적 장애인을 표현하는 상투적 장치와 만날 때면 사태는 한층 난감해진다. 영화 종반, 카메라는 교도소 담장 위로 멈춰선 풍선 기구에 올라탄 용구와 예승을 Befoer-After처럼 보여준다. 내내 촌스러운 호섭이 머리에 판에 박은 외양이던 용구가 어느새 말쑥한 가르마에 의젓한 풍채로 상공을 바라본다. 이 장면이 지적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이미지로서 뒤집는다고 받아들인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해석이다. 이 영화가 상영시간 내내 그 편견을 밑천 삼아 웃음을 제조했다는 분명한 사실을 떠올린다면 말이다.

 

용구의 외양이 상이한 판본으로 연출될 때, 관객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것은 우리가 동일시할 수 없는 ‘지적 장애인’이다. 그 순간 공고해지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이미지로 양분된 정상과 비정상의 뿌리 깊은 경계다. ‘지적 장애인’ 용구가 사라진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세상의 모든 ‘딸 바보’의 판타지를 어루만질, 사랑스럽고 깜찍한 데다 어른스레 아빠를 보듬는 딸 예승의 ‘아버지’다. 세상을 떠난 ‘아빠’의 자리를 젠틀하고 정의로운 과장이 대신한다는 설정은 흉흉하다. 관객은 이 훈훈한 가족드라마의 어디쯤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있을까.




이것은 누구를 위한 이야기인가


현재와 과거, 두 차례 재판 시퀀스에 이르면 이환경 감독이 비겁한 선택을 한다는 혐의를 지우기 힘들다. 감독은 IMF란 특정 연대를 지목하며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김영삼 정권 말기의 교수대 위로 용구를 등 떠민다. 부당하게 마련된 피고인석에 용구를 앉히며, 관객이 사법체계에 품은 반감의 지반에 최루탄 발사대를 설치한다. 이미 흥행 부속품으로 충분히 성능이 입증된 설정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누리는 반사이득에 책임을 지려 하진 않는다. 경찰청장은 혐의를 시인하지 않으면 예승이에게 똑같이 복수하겠다고 용구를 협박한다. 감독은 도무지 개연성을 알 수 없는 서사의 해명책임을 용구에게 떠넘긴다. 이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인 전개를 가능케 하는 건, 편견으로 뒤범벅된 지적 장애인의 가공된 정체성이다. 감독은 교도소(판타지의 공간)에서 담벼락 밖(현실의 공간)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정박한 풍선처럼, 그가 창조한 ‘가상’의 부조리가 안온한 신파의 경계를 넘어설까 노심초사한다. 영화 오프닝 법정 신을 떠올려 보자. 법정의 다른 곳을 잡은 화면 너머로 슬그머니 개정선언이 들려온다. “사법연수원 ‘모의’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엔 어떠한 죄 사함도 성사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예승이와 관객은 그 결말에 감격하며 안도했던 것일까.


 용구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복도 장면에서는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면서도, 다른 한 손으론 참담함에 눈을 가리고만 싶었다. 지금껏 용구는 자신이 엮인 사건의 어떤 인과관계도 인지하지 못 하(도록 감독은 용구의 배역을 설정하)였다. 헌데, 숱한 차별과 폭력에 반응하지 못했고, 지금 이 상황의 의미도 모르던 용구가 갑자기 예승과 끌어안고 오열한다. 감독은 용구가 걸친 존엄의 진피를 벗기고, 더 내려갈 곳 없는 존재의 밑바닥, 죽음 앞에 팽개쳐진 채 관객과 마주 보도록 앵글을 정한다(화면 구도상, 용구가 전신을 향하는 먼 곳에는 관객의 시선을 제외한 ‘등장인물’이 없다). 용구는 관객을 향해 끝없이 조아리면서 몸을 떤다.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자, 이렇게 용구가 불쌍한데 눈물을 흘리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여섯 살짜리 지능지수를 가진 ‘타자’라고 해서, ‘우리’와 같은 감정들, 아무런 분노도, 욕망도, 슬픔도, 의지도 없이 살아간다고 인정할 수가 없다. 지적장애인이란 정체성에 웃음과 눈물을 의지하는 <7번 방>에는 아무런 희망과 전망이라는 것이 없다. 온갖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휘말린 지적 장애인이 힘없는 발버둥도 쳐보지 못한 채 목숨을 잃는 절망밖에 없다. 이 가학과 피학의 서사에서, 용구에겐 서툴더라도 주체적 의사를 표명하고 저항할 기회가 허락되지 않는다. 무력하게 희생당하고 소비당할 뿐이다. 그의 입장을 말하고 항의하는 역할은 주변인들에게 전속돼있다. 용구에게 주어진 유일한 역할은 허망한 겁박에 속아 죽음을 자초하는 ‘딸 바보’다. 이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이야기일까.


 사랑하는 딸 앞에서 말쑥한 신사에게 뺨을 얻어맞고, 대낮의 노상에서 살인범으로 어이없이 오인당하고, 사진기 플래시가 터져 나가는 경찰서에서 보란 듯이 폭행당하고, 교도소 독방에 갇힌 채 예승이만 되뇌는 박제된 토끼 같은 용구의 정체성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어리석고 무력하지만 순박하고 따뜻한 타자를 지켜보며 온기를 고양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은 아니었을까. <7번 방>이 끝나고 눈시울을 닦으며 극장을 나서던 나와 당신,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며 즐거워하는가. 우리가 눈물로 애도한 대상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나는 용구의 안타까운 죽음을 목격한 관객들이 한 번쯤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고 믿는다. (20130/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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