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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Dec 20. 2015

살아남은 자의 망각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살인의 추억>은 80년대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바탕을 둔 극화다. 영화는 시대적 배경을 핍진하게 재현하였다. 당대의 역사적/정치적 상황을 표식처럼 배치하며 성찰로 진입하는 입구를 마련해두었다. 민주화투쟁 시위대와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 거대한 노역장 같은 - 때때로 '남근'의 이미지로 표상되는 - 공장에 밤늦도록 붙잡힌 남자들, 가장이 부재한 사이 유린당하고 살해당하는 여자들. 그들은 가족이 지키지 못한, 국가와 사회가 보호하지 않은 시대의 희생자다. <살인의 추억>이란 제목을 번역한다면, 누군가의 말처럼 <저개발의 추억>, <군사독재의 추억>쯤이 될 것이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폭압의 역사를 환기하기 때문은 아니다. 봉준호는 구조와 개인, 이념과 선악의 경계를 뒤섞고 내적 정당성을 추궁하며 관객과 게임을 벌인다. <살인의 추억>은 추리물 장르의 외피를 덮어쓰고 있다. 수사의 목적은, 당연히 연쇄살인의 진범을 찾는 것이다. 용의자는 박현규. 추리의 그물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격자를 좁혀가고, 어느 순간 미션은 박현규를 심판대에 올린 OX퀴즈로 확정된다.


그러나 이 게임엔 또 다른 미션이 숨겨져 있다. (평론가 허문영이 지적하였듯) 용의자 박현규와 용의자를 쫓는 형사 박두만, 둘 중 누가 진짜 범인인가. 대공 분실 같은 취조실에 무고한 용의자를 끌고 와 고문을 가하며 거짓자백을 받아낸 박두만인가? 살인이 발생하던 비 오는 밤마다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라디오에 신청한 박현규인가? <살인의 추억>이 범죄의 피해자를 시대의 피해자와 유비한다고 했을 때, 역사의 질곡 같은 논두렁 위에서 숱한 이들의 존엄을 짓밟은 진범은 누구냔 말이다.


영화 후반부에는 정체된 서사의 방죽이 터지며 범람이 발생한다. 용의자 박현규의 행방을 놓친 어느 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살인범의 시점 숏으로 재현된 장면이 등장한다. 박두만의 아내 곽설영과 서태윤과 우정을 맺은 여중생이 인적 없는 밤길을 따라 엇갈리고, 카메라는 먹잇감을 찾아 흔들린다. 둘 중 하나는 광기의 마지막 제물이 된다.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았는지 우리는 안다. 곽설영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그녀 대신 소녀가 죽었고, 소녀가 끌려 갈 때 쫓아가지 못했(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봉준호는 구조의 책임을 개인에게 나눠 지우고, 가해와 피해의 경계를 난삽하게 구획한 채, 표상의 층위를 어지러이 섞어놓는다. 일찍이 허문영은 박현규 역을 맡은 박해일의 용모가 어딘가 운동권 대학생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을 한 바 있다. 군사정권의 압제에 항거한 영웅의 이미지가 군사정권이 저지른 폭력을 표상하는 배역에 쓰인 것은 의미심장한 아이러니다. 가해와 피해는 한 몸과 피로 스민 채 거의 불가지한 지경에 처한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냔 말이다. 우리가 발 딛은 시대 자체인가.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인가. 아니면 그 개인이 어찌 할 수 없는 체제와 구조인가.


봉준호의 대답은 ‘알 수 없다’ 이다. 갈지자로 맴돌고 급작스레 탈선하던 서사의 막다른 골목. 미국에 의뢰한 유전자 검사 확인서가 도착한다. 탈식민지 분단국가 한국의 ‘종주국’, 미국의 답장은 무엇이었는가? 박현규는 범인으로 판정되었는가? 한국사회 메타적 심급에 군림하는 미국이 내려준 결론은 그 전능하고 합리적인 위상을 배반하는 무엇이었다. 이 장면이 빚어내는 아득하고 심원한 좌절감은, 80년 광주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 당시 운동진영이 받았던 충격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현실의 충격이 반미라는 이념적 각성으로 이어졌다면, 영화 속 곤경은 멜랑콜리한 절망으로 수렴한다. 시대의 밤길을 헤치며 우리는 범인을 쫓고, 쫓고, 쫓고, 또 쫓았지만, 모든 것은 실패하고 무지와 오인으로 돌아갔다. 마치 캄캄한 터널의 심연 속으로 사라진 단 하나의 용의자처럼.


지금껏 봉준호의 필모그라피를 끌고 온 것은 장르를 향한 모험인 동시에 정치에 대한 사유였다. <살인의 추억>은 봉준호 영화를 관류하는 핵심 정서, 멜랑콜리와 아이러니를 단적으로 집약한 작품이다. 언젠가 논했던 바 있지만, 봉준호가 자신의 ‘초기작’들 결어를 맺는 작품이라 말한, 최근작 <설국열차>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선과 악의 선명한 대립 속에 시작된 커티스의 혁명은, 어느덧 선과 악의 식별불가능성 앞에 처절하게 무릎 꿇고, 급기야 ‘다른 세계’로의 탈주로 치닫는다. 봉준호 필모그라피 안에서 가장 이질적인 이 작품 또한 봉준호의 핵심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표지한다.


<살인의 추억>이 빼어난 것은 비단 장르적 자의식과 지역정치학적 고찰을 재치있게 교직한 점에 있지 않다. 그 뒤편에는, 선과 악, 이념과 도덕, 구조주의적 이분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현실의 지독한 모호함에 대한 집요한 반문이 침잠되어 있다. 저개발과 군사독재 시대의 '추억'을 되묻는 이유는, 불의에 가담하고 폭력을 방관한, 살아남은 자의 망각에 저항하는 부채의식일 것이다. <살인의 추억>이 다다른 성찰의 진경은 거기 있다. 범인은 바로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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