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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Dec 20. 2015

원형原形의 유물

<지리멸렬> (봉준호, 1994)

https://www.youtube.com/watch?v=9k_cecIGO2I


봉준호가 94년에 만든 단편영화 <지리멸렬>은 유쾌함 뒤에 짓궂음이, 쓸쓸함 뒤에 따스함이 따라붙는 아이러니한 영화다. 영화의 맵시는 가지런한 편이며, 서사 구조는 분절된 채 흩어져 있다. 정적인 쇼트 사이로 불투명한 기운이 틈입하고, 관현악풍 배경음악은 이화작용을 일으킨다. 필름에 배어있는 모던한 기풍은 장르적 내용물을 작가적 양식미에 담는 봉준호 영화의 씨앗을 짐작게 한다. <지리멸렬>은 짧은 이야기 네 개로 짜인 옴니버스 형식을 취한다. 유머시리즈 책에 나오는 토막극을 옮겨놓은 듯한 에피소드 세 개와 에필로그로 엮였다. 에피소드 표제는 <바퀴벌레>, <골목 밖으로>, <고통의 밤>이다. 네 개의 이야기는…


1. 점잖은 행색으로 도색잡지를 즐기는 대학 교수. 강의 도중 대학생 ‘김 양’에게 강의용 프린트를 가져오라 이른다. 아뿔싸, 연구실 책상 위엔 도색잡지가 펼쳐진 채 있다. 교수는 혼신의 역주를 감행해 김 양을 쫓아간다. 위기일발의 상황, 책장에 꽂힌 책을 빼서 책상으로 던지는 신공을 발휘해 기적적으로 잡지를 덮는다. “어머, 교수님 무슨 일이에요?” “아… 바퀴… 벌레가…”


2. 저택가 아침을 달리는 노신사. 어느 저택 앞에 앉아 배달된 우유를 마시고 지나가던 신문배달원 소년에게도 사람 좋게 권한다. 슬그머니 노신사가 떠나고 대문이 열린다. “누가 우유를 마시나 했더니 너였구나? 신문 배달도 끝이야.” 구타당하는 소년, 골목 모퉁이에 숨어 훔쳐보는 노신사. 노신사는 유유히 조깅을 이어가다 덜컥, 소년과 마주친다. 골목을 돌고 도는 필사의 추격전이 벌어지는데…


3. 중년 취객이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을 찾아 헤맨다. 급기야 어느 아파트 단지 풀밭에서 자세를 잡지만 경비원에게 발각당한다. 한바탕 호통을 듣고, 아파트 지하실에서 신문지를 깔고 볼일을 본 후 들고 나와 처리하라는 자비를 얻는다. 잠시 후, 쓰레기장에 도착한 취객. 느닷없이 카이저 소제처럼 빈 신문지를 허공에 찢어발긴다. 카메라는 지하실에 놓인 밥솥을 비춘다.


4. TV 토론 프로에서 사회 지도층 인사 세 명이 토론을 벌인다. 대학교수와 신문사 논설위원(노신사)과 부장검사(중년 취객)다. 주제는 세상을 뒤흔든 반사회적 범죄. 그들은 제가끔 ‘도색잡지’의 만연을 탓하고, ‘젊은 것들 교육’을 꾸짖고, ‘공중질서 의식’을 욕하며 제 낯에 침을 뱉는다. 말 그대로 지리멸렬.


<지리멸렬>은 봉준호 영화 세계를 관류하는 핵심 모티프를 집약한다. 소급적 비약으로 빠지기 쉬운 시도지만, 작가를 설명하는 공고한 원점으로 정초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만큼 <지리멸렬>에선 숱한 원형原型의 유물을 발굴할 수 있다. 그곳엔 봉준호스러운 유머와 풍자가 있다. 엉뚱하고 쇄말적인 것에 대한 천착도 여실하다. 미로 같은 구조 안에서 쫓고 쫓기는 군상들과 폐쇄된 공간에 대한 집착과 매혹이 있다. 서사 맥락을 흘러넘치는 이미지의 과잉 정념을 잉태하고 있으며, 개별 에피소드의 시작과 끝이 수미상응으로 구조화한다. 관객을 향한 시선의 환기는 스크린 바깥으로 실마리를 풀고, 정치적 주제의식이 신진대사할 숨통을 틔운다(봉준호 영화 단골 배우 김뢰하가 <고통의 밤> 주연을 맡기도 했다).


 눈여겨볼 것은 마지막 에피소드 <고통의 밤>과 에필로그다. <고통의 밤>은 여러모로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떠오르게 한다. 아파트 단지가 무대라는 점, 거대하고 음침한 아파트 지하실이 등장하고, 그 낮고 어두운 장소에서 비밀스러운 소동이 벌어진다는 점이 닮았다. 밥솥을 비롯한 지하실 소품 배치 역시 즉각적 연상을 일으킨다. 단편 작품과 상업 데뷔작 사이 의미 있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두 영화는 키치한 유머감각으로 무장하였고, 씁쓸한 비관 뒤에 한 가닥 낙관을 포기하지 않는다.


 만약 이 영화에 에필로그의 덧댐이 없었다면, 그럭저럭 매끈한 영화학교 졸업 작품에 머물렀을 것이다. 에필로그는 분리된 에피소드를 하나의 구조로 추슬러 모은다. 거기엔 작가의 정치의식을 명석하게 천명하는 장치가 있다. 동사 ‘보다’라는 장치다. 에필로그에는 세 명의 ‘지도층 인사’와 그들과 매치된 세 명의 ‘보통 사람’이 재등장한다. TV 화면에선 비루한 민낯을 덮은 권위주의의 언어가 촌극을 벌인다. 이때 봉준호는 TV 화면 알맹이만 스크린으로 옮기는 대신, 브라운관 테두리를 남겨둔 채 TV의 매체성을 강조하는 프레임을 잡는다. 영화 관객은 곧 토론 프로 ‘시청자’의 자리에서 방송을 ‘본다.’


 재미있는 것은 세 명의 ‘보통사람’ 중 두 명은 - 신문배달원 소년과 아파트 경비원 - 은 TV 지척에 있으면서도 TV를 보지 않고 있단 점이다. 즉, 그들은 자기가 ‘본’ 비루한 군상이 TV에서 ‘보는’ 지도층 인사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유일하게 토론 프로를 보고 있는 김 양 또한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교수가 도색잡지나 훔쳐보는 인간이란 걸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봉준호의 질문은 이렇게 이행한다. “이 영화를 보는 당신은 TV에서 보여주는 것을 과연 제대로 보고 있습니까?” <지리멸렬>은 갑자기 빨라진 리듬으로 카메라를 움직이다, 도심 번화가 건물에 박힌 대형 스크린(매스미디어)을 쳐다보며 막을 내린다. 거대한 불빛 속에선 아직도 ‘지리멸렬’한 토론이 이어진다.


 봉준호 영화에선 매스미디어를 향한 응시가 또렷한 안광을 발한다. 데뷔작 <플라다스의 개>와 출세작 <살인의 추억>은 물론, (세월호 사태로 ‘알레고리’에서 ‘리얼리즘’으로 승격한)천만 영화 <괴물>은 가장 실팍한 더듬이를 곧추세운다. 최근작 <설국열차>도 마찬가지인데, 그 핵심은 현상의 이면을 통제하는 체제를 향한 신랄한 풍자다.(교실 칸에서 트는 ‘윌포드 일대기’ 시청각 교육, ‘영원한 엔진’의 프로파간다) <지리멸렬>은 정치 영화가 빠지기 쉬운 모호한 거대담론의 함정을 비켜서며, 매스미디어라는 구체적 의제를 건드린다. (영화를 제작한 해에 벌어진 ‘지존파 사건’을 빗댄 것이 거의 확실한)‘반사회적 범죄’라는 동시대 현안과 필름을 잇대며 현실을 향한 가교를 놓는다.


 훌륭한 것은 경직된 계몽주의와 교조주의를 빌리지 않고도, 30분 남짓한 단편영화에서 이야기의 재미와 정치성의 발현을 동시에 수확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낱개의 코믹한 서사를 말미의 정치적 장치로 수렴한, 전적으로 구성의 묘가 이룬 개가다. 이러한 유희와 성찰의 공존은, 봉준호의 장편 세계에서, 장르성과 정치성의 정교한 교직으로 진화한 것 같다. 에필로그에선, 가볍고 센티한 음악 아래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이어지며 약간의 뭉클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동료 시민들의 삶에 보내는 애정이며, 일상 너머를 향한 응시를 포기하지 말자는 격려와 다짐이다.


 물론 <지리멸렬>은 두 가지 이견과 부딪힐 수 있다. 권력에 대한 묘사가 나이브하다는 점과 지배계층 대 보통사람으로 나타나는 구조 대 개인의 상투적 도식이다. <지리멸렬>에 등장하는 지배계층의 모습은 밉다기보다 차라리 귀엽다. 그들의 행각은 사회적 모순과 완벽하게 동떨어진 지극히 사소한 일탈에 불과하다. 그러나 연출 노선을 반대로 틀었다면, 발랄한 풍자는 옅어지고 무거운 강변으로 흘렀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완벽하진 않지만, 영리한 안배이며 당당한 취향의 커밍아웃이다.


 두 번째 문제는 분명 이 영화의 약점이다. 간단히 반문해 보자. 대중은 정말로 이데올로기에 복속된 어린 양일 뿐인가? 과연 우리는 불의를 보지 못하는가, 때로는 보고도 외면하는가? 다행스럽게도 봉준호는 이후의 작업을 통해 문제의식을 심화 발전해간다. 구조주의적 이분법을 종단하며 체제의 공모자로서의 개인의 죄의식을 끈질기게 캐묻는다. 이러한 ‘구조의 개인화’는 데뷔작에서 최근작으로 나아갈수록 농후하게 익어간다.


 한 가지 가설적 독법을 제안하자. 여기엔 영화학교 졸업생-감독 지망생인 ‘보통사람’에서, 막대한 제작비를 운용하는 ‘흥행 감독’으로 편입한 감독의 자의식이 덧씌워져 있진 않은가? <지리멸렬>의 구조와 개인 사이 깨끗한 절단면이 점점 더 뭉개져가는 이유 하나는, 직업적·사회적 지위 변화에 따라 감독 자신을 성찰의 기점이나 대상으로 포섭한 결과는 아니냔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솔직함, 나아가 정직함이라 부를만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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