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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Dec 20. 2015

영겁회귀의 악몽에서 탈출하기

<설국열차> (봉준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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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사람을 깨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꿈속에 있는 또 다른 현실이 아닌가?" - 자크 라캉,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근본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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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를 유괴한 윤주가 현남에게) “저 박현남 씨, 나 고백할 게 하나 있는데…” “뭐요?” “나 잘 봐봐 현남 씨”, “내 뒷모습을 잘 보라고, 뭐 생각나는 거 없어?” “내 뒤통수를 잘 좀 보라니까”, “정말, 정말 이래도 모르겠어?” - 봉준호, 영화 <플란다스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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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한참 지나서 내 영화들을 돌아보면 <설국열차>까지가 나의 초기작으로 분류되지 않을까 싶다. … 내 초기작을 마무리하는 느낌으로 봐주면 딱 좋겠다." -「매번 최선을 다해 기대를 배반하려고 한다」, 『씨네21』 915호 


<설국열차>는 뜨거운 영화다. 수없는 찬반양론이 기승을 부렸고, 인터넷에선 호불호의 성찬이 벌어지고 있다. 400억이 넘는 제작비, 해외 유명 배우들 캐스팅, 비범한 역량을 입증해 온 작가에 대한 기대 같은 것들에 호사꾼들은 달아올랐다. <설국열차>를 반대하는 이들은 만듦새가 헐겁고 결말이 공허하다 문제 삼는 것 같다. 찬성하는 이들은 작품의 주제의식과 정치성을 높게 사는 듯 보인다. 둘 모두 일리가 있다. <설국열차>는 결정적 결함을 가진 영화는 아니지만, 탁월하다고 하기엔 개운치 않다. 봉준호 감독은 시작부터 노골적이고, 때론 장황하며, 한편으론 설명을 포기한다. 반면, 명심해야 할 건 이것이 400억짜리 ‘작가영화’란 사실이다. <설국열차>는 봉준호 필모그래피 안에서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지만, 여전한 주견이 느껴지는 영화다. <설국열차>는 마침내 제출된 결론이다. 이 사실만큼은 제대로 조명받고 탐구돼야 한다.


 <설국열차>는 세 가지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첫째, ‘형식의 과잉’. 둘째, ‘서사의 결핍’. 셋째, ‘장르적 컨벤션의 위반’. 먼저 ‘형식의 과잉’은 - 그리고 ‘장르 컨벤션의 위반’도 - 봉준호의 전작들과 결을 나란히 한다. 봉준호는 서사의 맥락을 넘어서는 형식적 연출을 구사하며 독특한 정동의 이미지를 즐겨 빚어냈다. <설국열차>도 예외는 아니다. 수평 트래킹 숏과 고속촬영을 병행한 예카트리나 브릿지 전투 장면, 예카트리나 브릿지에서 터널로 진입한 후 전개되는 적외선 시점 숏, 영화 초·중반 구사된 고전적 몽타주 수법(얼어붙은 팔을 망치로 깨부수는 장면, 도끼로 생선 배를 가르는 장면), 서사와 병존하지만 서사에 포섭되지 않는 시추에이션이 그렇다. ‘서사에 포섭되지 않는 시추에이션’은 그간 회자된 ‘봉준호스러움’의 기반을 이룬다. 괴팍한 유머와 비장미, 관객-영화 사이 이질적 촉매의 역할, 알듯 말듯 은근하게 이야기 전개에 손길을 뻗치는 엉뚱한 사건들. 전작들에 비해 존재감이 작아졌지만, 이런 장면들은 <설국열차>의 중요한 대목에서 윤곽을 드러낸다. 예카트리나 브릿지 전투에서 커티스가 미끄러지는 장면, 성화 봉송하듯 횃불을 이송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서사의 결핍’은 일군의 관객이 토로하는 이야기의 개연성과 디테일의 흠결이다. <설국열차>는 매듭이 헐거운 영화다. 당장 서사의 틈새를 예닐곱 가지는 넘게 지적할 수 있다. SF 영화로서 버성긴 세계관과(만물이 사멸한 지 고작 17년, 진화의 과정을 워프하고 하필 북극곰이 소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실하고 임의적인 전개(커티스는 앞칸 ‘조력자’의 편지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딱히 존재에 의문을 품지도 않는다), 정교하지 않은 상황 묘사다(커티스와 남궁민수가 독대하는 클라이맥스에서 통역기는 건성으로 작동하는가 싶더니 이내 침묵에 빠진다). 이런 흠집을 들어 <설국열차>를 공격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다. 이야기를 취사한 배경과 반대급부에 대한 평가를 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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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고, 보다 본질적인, 더 추상화된 형태로 이야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 SF의 매력이 아닐까." - 봉준호 인터뷰 「‘완전히 다른 세계’에 열 받는 감정…」, 『경향신문』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봉준호 영화의 인장은 장르적 공식의 변주와 위반이다(<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대표적이다. 두 작품은 스릴러와 괴수영화지만, 수사와 추리는 철저히 실패하고 괴물은 정치적 메타포로 기능한다. 장르의 관습은 최종적으로 무화된다). <설국열차>는 기본적으로 장르의 자장에 속해있다. SF 영화는 종종 과학과 미래에 대한 공포를 투사하며 현재에 대한 불안을 가시화한다. 환경오염과 기후통제가 불러온 지구의 종말. 체제와 이데올로기로 치환된 ‘성스러운 엔진’을 향한 물신과 숭배. 사람을 부품으로 잡아먹으며 운행하는 미노타우르스 같은 열차. 이 가상의 철마는 장르 특유의 미래주의적 비전을 상영한다.


 SF 영화는 허구에 관대한 관객의 암묵적 동의에 기대 성립한다. 봉준호는 장르 특유의 감상 규칙 ‘불신의 유예’를 활용하며 때론 그를 방패 삼아 숏을 추상화한다.(라스트 신의 설원과 북극곰, 잉여가치 착취가 없는 영화 내 계급 관계 양상 등) 그를 감안하면 사소한 흠결은 기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동의할 수 없다면, 기대했던 것들을 예상한 만큼 즐길 수 없었다는 이유도 있을 거다.


 <설국열차>는 SF 영화의 기술적이고 시각적인 쾌감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계급투쟁의 현장에 돌입한다. 미래세계의 열차가 무엇을 연료로 영구히 움직이는지, 어떤 노선을 따라 운행하는지, 2031년의 설국열차는 2013년의 KTX와 얼마나 다른지, 각 칸의 설비와 엔진 시스템, 바깥세상 풍경은 어떠한지 불문에 부친다. 미장센은 음울하고 건조하며 열차는 단절-밀폐돼 있다. 꼬리 칸의 수난과 지배자들의 학정이 스크린의 기류를 탁하게 가라앉힌다. 영화 초중반에 배치된 ‘형식의 과잉’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고 알쏭달쏭하게 한다. 관객이 마주한 곤란스러움은 커티스 일행이 식물 칸에 들어서는 순간 잠정적으로 해소된다. 장르의 가상성을 묘사하는 재미를 맛보기 시작한다.


 이런 얼마간의 장르적 쾌감은 열차 칸 사이 단절과 격차를 확인하게 한다. 설국열차는 계급의 열차다. 봉준호는 열차 내 각 구간을 최대한 선명하고 알기 쉽게 시각화했다. 열차와 승객의 모습은 우리의 상식에서 멀지 않고 시대적 광경을 아우른다(일등칸 승객들 행색에선 근대의 부르주아지가 떠오른다. 열차의 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미장센은 현대적으로 변하고 엔진실은 SF 장르의 정체성에 걸맞게 디자인되어 있다). 작가의 주제의식을 관철하는 한편, 정차하고 직진하는 열차 같은 기-승-전-결의 운율로 오락적 재미를 벌충하였다. 그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설명과 디테일이다.


 <설국열차>에는 해석을 요청하는 동시에 해석에 저항하는 숏들이 있다. 말하였듯 ‘형식의 과잉’이다. 관객을 유인하는 한편 밀쳐내며 지근거리를 유지한다. 선명하게 제련된 문제의식이 그 공백으로 삼투한다. <설국열차>의 레일은 SF 공간의 상징적 가교에 설치돼 있다. 그곳은 지구의 종말, 문명의 소멸, 계급 사회의 막다른 골목이다. 인류의 마지막 열차는 계속해서 돌고 돈다. 칸칸이 나뉜 환승 불가능한 계급을 싣고. 때는 새로운 빙하기의 도래다. 세계는 축소되었고, 사회는 알기 쉽게 축약되었으며, 한 줌의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남았다. 가상의 공간과 가상의 현실은 거추장스러운 실재의 사슬을 끊어놓았다. 이제 원하는 결론을 택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는 ‘희망’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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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100% 희망적인 엔딩을 생각하고 찍었다. 한 시스템이, 한 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 봉준호 인터뷰 「‘완전히 다른 세계’에 열 받는 감정…」, 『경향신문』     


<설국열차>의 ‘급진성’은 논란을 삼키고 토하는 아궁이다. 봉준호는 표징의 향배를 열어둔 채 최대한 높은 층위에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인종과 종교, 계급, 이념, 정치, 혁명, 심지어 환경 의제까지 포섭하며 포괄적 정치성을 드러낸다. 커티스와 윌포드는 대극을 이루고 있으며, 길리엄은 윌포드의 그림자Shadow다. 남궁민수는 이들과 또 다른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여기엔 결정적 고정점이 없다. 커티스의 혁명은 월가 시위일 수도, 역사상 공산주의 혁명일 수도,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항쟁일 수도, 노동자 대파업일 수도 있다. 어쩌면 시스템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저항 자체일지 모른다. 윌포드와 길리엄 역시 마찬가지다.


 윌포드-길리엄을 적대적 공생관계의 양당으로, 커티스를 노무현이나 안철수로 해석하는 관객들이 눈에 뜨이는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단순히 ‘깨시민’스럽다며 타박할 일도 아니다. 여기에 ‘서사적 결핍’에 대한 방어와 공격, 해설 및 해석이 뒤섞이면서 텍스트는 방죽 터지듯 담론을 생산하고 있다. 말할 나위 없이 이것은 <설국열차>의 장점이다. 영화의 설계 안에서 비롯한 사태이기 때문이다. 메타적 논평을 시도하며 논점을 손질하는 것은 영화의 효용을 훼손하는 일이다. 이 영화는 더 많은 ‘어설픈 색깔론’으로 덧씌워질 필요가 있다.(듀나, 「‘설국열차’에 어설픈 색깔론을 덧씌우지 마라」, 『엔터미디어』)


 <설국열차>를 둘러싼 말들은 엔딩으로 수렴할 터이다. 재미있는 것은 모호하게 해석될 수 있는 뉘앙스(북극곰과 설원은 희망의 징조인가, 비극의 전조인가)를 봉준호 본인이 꽤 적극적으로 해명한다는 점이다. 관객의 해석에 맡기거나 감상의 여지를 넓혀두고 싶다면 그런 해명을 할 필요가 없다. 그 경우, 마지막 장면은 열린 결말로 남는다. 따라서 논쟁은 의미가 없고 무력화된다. 그러나 봉준호는 분명하게 입장을 밝히며 논점을 던졌다. 우리는 ‘장르적 컨벤션의 위반’을 다시금 불러들여야 한다.


 판타지를 가미한 헐리우드 불록버스터는 대개 영웅 서사로 묶여있다. 공동체에 재앙과 위기가 닥친다. 영웅은 소명을 자각하고 투쟁에 나선다. 거대한 재난과 악의 무리에 맞서 공동체를 수호한다. 여기에 종종 성장 서사와 신화적 코드가 개입한다. <설국열차>의 플롯은 절대자,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다.(대표적 레퍼런스를 꼽자면 <블레이드 러너>) 봉준호는 유례없이 종교적 모티프를 전면에 진열하였다.(노아의 방주, 요나, 아담과 이브, 예수의 대속, 비둘기를 살리기 위해 살점을 떼어 준 부처) 한편, 헐리우드 영화와 전혀 다른 결론에 연착한다.


 <설국열차>는 미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커티스의 혁명에서 연상할 수 있는 최근의 사건은 월가 점령 시위다. 일종의 ‘포스트 9·17 영화’로 파악할 여지가 있는데, 그 선발 주자가 작년 개봉한 <다크나이트 라이즈>다. 장르 성격과 제작 규모는 다르지만, <설국열차>는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데칼코마니처럼 마주 서 있다.(<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월가 시위’를 위상 반전으로 해석하는 평론을 미디어스 지면을 빌어 제출한 바 있지만, 이하에선 표준적 독법을 따르겠다)


 두 작품 모두 계급 혁명이 발발한다. 그 혁명은 숭고하지 않다. 저항의 배후엔 음모가 숨어있고 그들의 리더는 교활한 공모자(길리엄)거나 악의 계승자(탈리아 알굴)다. 공동체는 고담 시의 지상과 지하, 열차의 꼬리 칸과 엔진실로 양극화되어 있다. 체제의 존속이냐 파멸이냐. <설국열차>는 영웅서사의 컨벤션을 이탈해버린다. 크리스토퍼 놀란과 봉준호는 똑같이 대속을 말하며 희생과 결단을 요구하지만, 브루스 웨인은 고담 시를 구원하고 커티스는 열차를 전복한다. 똑같이 체제의 모순에 항거하는 체제 내의 운동을 의심하지만, 하나는 체제의 종말을 두려워한다. 다른 하나는 체제의 존속을 회의하며 정반대의 근본적 비전을 제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설국열차>는 헐리우드 주류 이데올로기의(역사적 개념과 별개로 지칭하자면) 대항-영화Counter-Cinema적 성격을 지닌다. 봉준호는 관객들에게, 어쩌면 국제적 영화 담론에 논쟁을 청하고 있다. ‘형식의 과잉’과 ‘서사의 결핍’, ‘장르적 컨벤션의 전용’을 아우른 하나의 시사점이며 <설국열차>가 평가받아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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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우리들의 현재 세상의 한계 너머에 있는 “진짜 세계”를 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로서 환영적 몸짓이다." - 토드 맥고완, 「우리들의 환상과 싸우기」, 『라캉과 영화이론』 제6장 


한 가지 퀴즈를 풀어보자. 세 가지 보기가 준비돼 있다. 성스러운 엔진의 가동은 영원하지 않으며 얼어붙은 대지는 숨길을 트고 있다. 첫째, 길리엄의 만류대로 급수 칸에서 전진을 멈춘다. 둘째, 엔진실에 도착한 커티스가 윌포드의 뒤를 이어 열차의 통치를 관장한다. 마지막, 엔진의 파괴와 ‘진짜 세계’를 향한 탈주다. 내가 꼬리 칸의 무임승차자라면, 최선은 첫 번째 답안이다. 나로선 그편이 가장 안전하며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차선은 두 번째다. 74%의 승객이 살해당할 테고 체제는 유지되겠지만, 확실하게 전멸하는 것보단 낫다. 비겁하고 보수적인 선택이라고? 기억하시라. 이것은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아닌 일개 꼬리 칸 ‘노예’의 판단이다. 정치는 인권을 제외하고 성립할 수 없다. 죽음보단 착취가 합리적이다. 바깥세상은 녹고 있으며 목숨을 부지한다면 언젠가 활로를 도모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나쁜 것’과 ‘좋은 것’ 사이의 결단이 아닌, ‘나쁜 것’과 ‘덜 나쁜 것’ 사이의 판단이다.


 <설국열차>는 우화다. 나도 알지만, 이 우화는 이분법의 토대를 구축하며 너무 많은 것을 부정해버렸다. 현재 너머의 세계는 현재의 세계와 단절돼 있다. 그곳은 지금-여기의 철저한 외부다. 현재의 체제와 교집합을 나누지 않으며 그만큼 대가를 요구한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외부가 무엇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꼬리 칸 승객은 물론 봉준호도 관객들도 알 수 없다. 이 영화를 지지하는 이들이 가능성의 내리 물림을 찬미하면서도 그 가능성이 무엇인지는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허지웅의 영화로 세상읽기 「<설국열차>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경향신문』) 꼬리 칸 승객들 대다수가 커티스와 같은 숭고한 헌신을 결행할 수도 없다. 그것은 범속한 시민들에겐 불가능한 결단이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순간, ‘현실의 우화’는 성립하지 않는다. <설국열차>는 반대의 의미에서 엘리트주의적 영웅담론의 약점을 안고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준비된 카드가 부모-자식의 윤리다. 커티스-길리엄/윌포드, 타냐-지미, 앤드류-앤디, 남궁민수-요나. 부모들은 아이들을 찾아 나서고, 아이들은 미래를 빼앗긴 채 실종되었다. 자식들은 아비와 뒤얽힌 동시에 맞서며 밀어낸다.(요나의 살인을 금지하는 남궁민수와 자신의 의지로 살인을 행하려는 요나)

 눈여겨봐야 할 장면들이 있다. 영화 초반, 영화 내에서 (아마도)가장 긴 호흡의 롱테이크가 작동하며 자식 잃은 타냐와 앤드류를 숏의 주인공으로 세운다. 다음은 타냐가 지미를 부탁하며 눈을 감는 사우나 칸 장면이다. 기차를 거슬러 오르며 쓰러지는 무수한 사상자에게 영화는 무심하지만, 이 대목만큼은 나름의 정동을 전달하려 애쓴다. 이번엔 커티스와 길리엄이다. 도끼부대와 격전을 치른 후 자책감에 시달리는 커티스를 길리엄이 어루만진다. “두 팔이 멀쩡한 내가 어떻게 리더가 될 수 있겠어요.” 이때, 길리엄의 대답은 음흉하고 외설적이다. “팔은 두 개인 게 좋아. 여자를 안을 때도 그렇지.” 만약, 커티스의 죄책감을 덜어주겠다면 이렇게 답해서는 안 된다. “팔이 하나라도 나쁘진 않아. 신경 쓸 거 없다네.” 이것이 올바른 대답이다. 길리엄은 자신의 불행을 은연중에 내세우며 커티스의 죄의식을 가중한다. 자신의 성스러운 입지를 강화하고 커티스를 충직한 아들로 묶어 두려 한다. 길리엄이 팔을 쓰다듬자 커티스는 어딘가 환멸스러운 기색으로 뿌리친다. 모종의 성적 코드가 엿보인다. 


 커티스는 아버지 길리엄의 진면목을 깨닫고서야 그와 다른 지향의 대속을 수행하며 영적 성장을 이룬다. 커티스의 통과제의는(아버지에서 아버지로, 꼬리 칸에서 엔진실로) 다음 세대의 희망, ‘다른 세계’를 위한 밑거름이다. 봉준호는 부모-자식의 변증법을 통해 세대 간 책임과 자립의 보편적 논점을 구축한다. 역시 역사와 정치를 모색하였지만, 마키아벨리즘에 입각한 권력 사유에 천착한 <링컨>, 휴머니즘의 경계를 통렬하게 넘나들며 역사적 심판을 수행한 <장고>와 비교하면 다분히 윤리적인 프레임이다. 정치를 윤리로 전유한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겠지만, 커티스의 투쟁이 어떤 외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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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긴 이미지 공간을 무척 좋아해요. 그런 어둡고 긴 공간. (…) 공간 전체가 완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동굴인데 동굴을 돌파하는 영화지요." - 「씨네 산책」 봉준호 편, 『씨네21』 800호


<설국열차>에서 가장 용납하기 힘든 서사 오류는 후반에 등장한다. 내가 볼 땐, 그 나머지는 전부 사소한 결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장면은 의아하리만치 거론되지 않는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윌포드가 커티스에게 사태의 전모를 폭로한다. 윌포드의 대사를 시작으로 이야기의 합리성과 인과관계가 파탄에 처한다. “밖에는 미친놈들이 날뛰고 있지.” 장면이 전환된다. 옆구리에 칼을 맞고 분명히 ‘숨을 거둔’ 프랑코가 덜컥, 눈을 뜬다. 나는 지금 좀비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가 빈사상태에 빠졌다 회복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전 장면에서 숨이 끊기는 제스처는 명료했다. 부활한 프랑코 본인조차 이런 위화감을 인지하고 있다. 심지어 봉준호도 그걸 강조한다. 프랑코가 열차의 통로를 지나는 순간 덜거덕, 무언가 발길을 막는다. 프랑코의 복부에 깊숙이 박힌 나이프가 문틀에 걸린 모습을 카메라가 잡는다. 사태는 끝나지 않는다. 분명히 피격당해 쓰러졌던 남궁민수도 어느새 거뜬히 일어나 액션활극을 벌이고, 클럽 칸 승객들은 부두교 주술에 걸린 듯 떼 지어 몰려온다. 그리고 엔딩의 북극곰. 일련의 장면들은 러닝타임을 통틀어 도저한 추상성을 담지한다.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태다. 봉준호는 지금 농담을 하는 걸까? 아니면, 종말론적 광기를 발출하려는 걸까? 그도 아니면, 이것은 현실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봉준호 영화의 공간은 하나의 이미지에 일관되게 사로잡혀 있다. <플란다스의 개>의 어둡고 음침한 아파트 지하실. <살인의 추억>에서 시체가 유기된 수로와 용의자가 박현규가 사라진 캄캄한 터널. <괴물>의 한강 하수도와 역겹고 후미진 괴물의 서식지. 그곳은 폐쇄된 장소, 진실이 소실된 심연, 시대의 상흔과 식민의 증상이 도사린 ‘구멍’이다. 건설비리에 항의하다 시멘트벽에 매장된 보일러 김 씨가 기괴한 농담처럼 돌아오는 곳. 연쇄살인의 ‘추억’과 탈식민지 시대의 ‘괴물’이 귀환하는 곳. 망각된 것들이 우글거리며 기척을 드러내는 밑바닥. 그곳은 무의식과 환영의 거처다.


 설국열차는 봉준호 영화의 폐쇄성이 극대화된 공간이다. 관객은 처음부터 끝까지, 끝의 끝까지 가서야 밖으로 나설 수 있다. 기차는 터널을 지나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헤아릴 수 없는 음울한 질곡을. 예카트리나 전투 장면의 ‘해피 뉴이어’는 명백한 징후다. 기차는 일 년에 한 번 그 자리에서 새해를 맞는다. 즉, 철마는 철로를 따라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온다. 뭇 평자들과 감독이 말하는 것처럼 <설국열차>는 직진의 서사가 아니다. 나는 그 의견에 반대한다. 이것은 회귀와 순환의 서사다(정말로 직진하는 운동에 천착하고 싶었다면 하필 그 장면에서 제자리로 돌아올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커티스는 왜 그리도 열차의 엔진실에 다다르길 집착하는가? 윌포드를 만나기 위해서다. 어째서 그를 만나려 하는가? 17년간, 아니 18년간 시달린 살육과 인육의 외상을 청산하기 위해서다. 그 외상적 사건의 원흉이 도사린 실재와 대면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전진해봤자 74%가 죽을 것이다. 모든 것은 ‘있어야 할 자리’, 원래부터 ‘정해진 자리’로 돌아간다. 직진은 실패하고 체제는 순환할 것이다. 기차는 일 년에 한 번 원점으로 돌아와 터널 속으로 사라진다. “제로(zero)로의 거듭된 회귀, 무지로의 여정” “체념과 침묵”의 “숙명적 비애의 기운”(허문영, 「<살인의 추억>과 <괴물> 장르와 지역정치학」,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과 “논리적이면서도 로맨틱한 그의 비관주의”(「누가 여자래요? 틸다 스윈튼」, 『씨네21』 916호)라 표현할만할 봉준호 영화의 자질은 공간에 대한 집착과 매혹을 빼고는 논할 수가 없다. <설국열차>는 폐쇄된 공간과 공간, 영겁회귀의 악몽에서 탈출하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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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설국열차>를 끝으로 이런 종류의 공간에 대한 집착과 작별하고 싶기도 해요." - 「길면 기차, 그리고 긴 인터뷰 (1) : <설국열차>에 이미 탑승한 관객을 위한 봉준호 감독의 코멘터리」, 『네이버』 


사실, 나는 프랑코의 부활이 ‘현실에서 꿈(환영)’으로 이행하는 시그널, 약호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부턴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원하는 결론을 내리겠습니다.”라는 선언일지 모른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설국열차>에는 무의식과 꿈의 이미지가 구조화되어 있다. 남궁민수와 요나는 감옥 칸에서 잠들어있다 깨어난다. 그들은 늘 몽환(크로놀)에 찌들어 있다. 도끼부대의 기괴한 형상과 느릿하게 몸부림치며 꿈속을 거닐듯 고속 촬영된 커티스의 액션 안무. 예카트리나 브릿지를 지나 터널을 통과할 때 커티스의 얼굴을 스캔하듯 훑어가는 빛-그림자 이미지. 마치 꿈속의 인물들처럼 이질적 ‘배경’으로 이미지 처리된 일등 칸 승객들. 상등 칸에 끌려간 꼬리 칸 승객들은 몽유병에 홀린 듯 얼이 빠져 돌아다닌다. 엔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영상은 명멸하며 사이키델릭한 환각을 닮아간다. 좀비처럼 달려드는 약쟁이 승객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서 눈을 감았다 뜨는 프랑코-요나.


 엔진실 시퀀스 전후로 맥거핀이 발발한다. 커티스는 식인의 기억을 오래도록 술회하며 엔진실 앞에서 어깨를 떤다. 아이들은 윌포드에게 끌려갔다. 그러나 엔진실엔 아이들이 보이지 않고, 윌포드는 스테이크를 굽고 있다. 관객은 의심하게 된다. 인육인가? 그렇지 않다. 영화 초반, 커티스는 에드가와 ‘스테이크’에 관한 얘기를 두어 번 주고받는다. 이것은 전형적인 전치displacement의 꿈-작업dream-work의 공정이다. 식인의 외상이 소고기 스테이크란 하찮고 지엽적인 대상, 맥거핀으로 전치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야기 표면상으로도 커티스가 엔진실에 입장한 후, 기차-바깥의 지위가 환상(영원한 엔진의 허구/매트릭스)-실재(기온이 하강하고 있는 대지/북극곰)로 뒤바뀐다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한 실재는 환영 속에서 엄습한다. 영화에선 ‘뚜껑’(무의식의 해치)을 여는 장면이 되풀이해 등장한다. 단백질 블록 생산 기계 뚜껑을 여는 장면, 지미가 갇힌 엔진실 바닥을 들추는 장면. 전자는 현실의 의식 속에서 쫓겨나고 은폐된다(그림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꿈은 망각된 것들이 역습하는 몽마의 소굴이다. 체제의 생존을 위해 아이들을 잡아먹는 식인의 외상. 커티스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실재와 마주한다. 그것은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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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제스처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그것들은 환영 자체의 실재성, 환영적인 스펙터클의 형태로 출현하는 실재를 회피하기 위한 절망적인 시도들이다." -  슬라보예 지젝,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HOW To READ 라캉』 제3장 


지금껏 봉준호 영화를 지배해 온 것은 모종의 부채의식과 불확정성이다. 한 가지 더, 봉준호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영화가 자신의 초기작들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얘기했다.


 먼저, 그의 전작을 경유해보자. <괴물>의 남주는 386세대 운동권(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다. 괴물을 죽이는 클라이맥스에서, 그는 꽃병(화염병)을 만들어 투척하다 결정적 순간, 화염병을 놓치고 깨트려 버린다. 봉준호 감독은 이 장면을 ‘삑사리’라고 명명했었다. 이것이 서두에 언급한 ‘형식의 과잉’인데, 프랑스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봉준호와의 <괴물> 인터뷰를 「삑사리의 예술」이란 표제로 내보냈다. 이런 ‘삑사리’는 <괴물>의 다른 장면과 <살인의 추억>에서도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모티프로 숱하게 등장한다.


 <설국열차>에서도 같은 장면이 갈래를 나뉘어 반복된다. 영화 중반 예카트리나 브릿지 전투 장면, 커티스는 도끼 부대와 격전을 벌이던 도중 생선을 밟고 미끄러져(삑사리) 넘어진다. 이제 반대의 장면이 라스트신에서 재연된다. 크로놀을 뭉쳐 만든 폭탄이 출구에 장착된다. 남궁민수의 딸 요나에게, 세상을 끝내고 세상을 열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마지막 남은 성냥개비). 그리고 성공한다. 소녀는 ‘삑사리’를 내지 않는다.


 봉준호의 세계는 어둡고 난삽하게 얽혀있다. 그곳은 선과 악의 이항대립이 아닌, 가해와 피해의 난교와 혼종으로 일그러져 있다. <살인의 추억>의 악인은 누구인가? 대공 분실 같은 취조실에 무고한 피의자를 감금하고 거짓자백을 받아내던 형사 박두만인가? 그러나 그는 악인인가? 아니면, 연쇄살인이 발생하던 비 오는 밤마다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방송국에 신청한 박현규인가? 그렇다면 그는 범인으로 밝혀지는가? <괴물>의 괴물은 진정한 의미의 악마적 괴수인가? 괴물 역시 미군이 방류한 포름알데히드에 감염된 미물은 아니었던가? 한강 둔치에서 매점 일을 하는 강두는 어떠한가? 그는 끔찍이도 사랑하는 딸을 잃은 어수룩한 소시민이지만, 아버지를 죽인 건 강두의 실수였다. 심지어 미군의 포름알데히드마저 먼지에 파묻혀 대상으로서 본연의 지위를 잃고 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강아지를 살해하며 이웃의 죽음을 부른 건 순진한 인문대 강사 고윤주다.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결국 부정한 기성체계에 편입한다. 그리고 <마더>의 도진은 누명을 쓴 피의자인가 살인의 진범인가.


 봉준호의 영화에선 개인이 구조와 자리를 바꾸고, 구조의 폭력을 짊어진 채, 닿을 수 없는 구조와 쫓고 쫓기며 표상으로 치환된 구조와 싸운다. <플란다스의 개>에선 공황이 할퀴고 간 자리에서 이웃끼리 개를 유괴하고 부부끼리 망치를 던진다. 개인들은 각자가 내속되는 기성 체제의 안팎으로 단절돼 버린다. <살인의 추억>은 이런 혼선을 보다 비극적으로 다룬다. 취조실에서 폭행을 자행하고, 데모에 나선 여대생의 머리채를 잡아끌며, 대학생들의 MT를 마냥 선망하다가, 동네 바보 백광호의 손에 불구가 된 조용구는 누구에게 자신을 항변해야 하는가. <마더>에 이르러선 이 ‘구조의 개인화’가 혼미할 정도로 난삽해진다. 봉준호는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 것일까. 선일까 악일까, 개인일까 구조일까. 생각건대, 봉준호는 그 판가름의 책임을 지지 않는 체제를 불신하고, 무능한 권력을 냉소한다. 그 세계는 어느 하나로 나누어질 수 없이, 엉키고 들러붙은 채 서로가 범인이요, 숙주요, 체제의 부품인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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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아버지의 침대 옆에 서서 손으로 끌어당기며 비난의 어조로…" - 자크 라캉,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근본개념』


봉준호 영화의 결말은 항상 어둡고 모호하며 아이들의 희망은 잘리고 짓밟힌다. <살인의 추억>의 여중생, <괴물>의 현서는 목숨을 잃었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의 아내 곽설영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그녀 대신 소녀가 죽었고, 소녀가 끌려갈 때 구하지 못했(안았)기 때문이다. 체제가 내린 지령(등화관제 사이렌)에 거역하지 않고, 주민들 모두가 불을 끄고 문을 걸어 잠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웃의 윤리와 부모-자식의 윤리를 방기하였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필모그래피를 잠식하는 건, 살아남은 자의 망각과 그에 저항하는 부채의식이다(그래서 ‘살인’의 ‘추억’이다).


 <설국열차>에선 어른들이 죽고 아이들이 살아남는다. 한편, 아주 알기 쉬운 결론(희망)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아이들은 새 시대를 여는 열쇠와 체제를 내파할 불씨를 쥐고 있다. 봉준호는 기성세대의 대의를 냉소하는 만큼이나 미래 세대에 연민을 품고 있다. 그 희망은, 희생과 대가를 요구한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아이들뿐이다. 어른들은 열차와 함께 증발하고 산화할 것이다. 희망은, 어른들은 결코 볼 수 없는 어딘가에서 어슴푸레 찾아올지 모른다. 당신은 결단을 내릴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봉준호는 그렇게 말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희망인가? 봉준호는, 아니 커티스는 규정할 수 없고, 가늠할 수도 없으며, 어떻게 몸부림쳐도 체제의 존속에 복무하는 현실 앞에 서 있다. 선(길리엄)과 악(윌포드)은 공모하고 있으며, 아무리 뜨거운 분노로 대열의 선봉에 서봤자 어찌할 길 없는 부조리에 무릎 꿇을 뿐이다. 그 세계는 인류의 마지막 열차처럼 끝없이 직진하고 순환하고 돌아온다. 그 희망 없음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 <설국열차>는 엉망진창으로 뒤얽힌 도덕과 선악과 정치를 무無로 돌리며, 아무런 가치와 규율이 없는 순결한 태초(설원)로 탈출해 버린다. 이것은 매트릭스로부터 실재로의 탈주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감당할 수 없어 ‘다른 세계’를 상정하고 현실과 가상의 자리를 뒤바꾼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것이 과연 가능한 사건인지, 작가 자신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을 보고 싶고, 밖으로 나가고 싶다. “나는 닫힌 문을 열고 싶다.” 

 

낙관과 비관, <설국열차>의 엔딩을 무엇으로 해석해도 바뀌지 않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애정을 건넨 봉준호가 지미와 함께 끌려간 앵글로 색슨의 아이, 앤디는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냥개비를 받았다 내어주는 결단의 주체였던 커티스가, ‘다른 세계’를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요나, 끝내버려.” 봉준호 영화는 이런 식의 결론밖에 낼 수 없는 현실에 회의하고 있다. 미필적 고의처럼 타락한 것들의 씨앗을 업화에 버려둔 채, 새로운 창세기의 스크린screen을 설치한다. 현실보다 꿈이 핍진할 때, 인간은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도피한다. 꿈결 속에 실재가 출현하고, 현실의 죄의식이 흉몽의 옷을 입고 걷잡을 수 없이 대가리를 치켜들기 때문이다.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희망이 아니다. 은밀하고 위험한 징벌의 욕망이, 전복된 열차에 핀 불길처럼 아른거리며 현실의 절망을 증명하고 있다. 시네마토그래프가 굴착한 작가 봉준호의 ‘구멍’ 속에서, 아이들은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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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내가 불타는 게 보이지 않나요?" - 프로이트, 「꿈 과정의 심리학」, 『꿈의 해석』 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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