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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Dec 21. 2015

지겨운 비평적 스캔들

<국제시장> (윤제균, 2014)

1     


<국제시장> 논란에서 대뜸 눈에 띄는 전선은 텍스트 비평과 컨텍스트 비평(또는 문화 비평)의 주도권 싸움이다. 누군가 “<국제시장>은 기성세대 정신승리와 보수 세력 논리에 이바지한다”라고 일갈한다. 그러면 “영화는 영화로 대하라, 왜 정치 논리로 판단하느냐”라고 대꾸하는 식이다. 후자의 반론은 “관객은 그냥 ‘재미’로 영화를 본다는 걸 이해하라”는 제안과 상통하거나, “비평가라면 영화의 만듦새를 평가하라”는 ‘영화 자체’와 ‘영화 외부’를 분리하는 시도로 나타난다.


 ‘영화 자체’ 또는 영화의 ‘재미’라는 표현은 막연하다. 영화의 재미란 무엇을 말할까? 카타르시스를 말하는가, 장르적 쾌감을 말하는가, 서사의 감정선을 말하는가, 시각적 재현의 탁월함을 말하는가, 캐릭터의 매력을 말하는가, 주제의식의 울림을 말하는가, 관객과의 공감을 말하는가, 현실의 핍진한 묘사를 말하는가, 현실에 대한 작가의 시각을 말하는가. 일체의 가치 판단과 단절된 도구적이고 기능적인 만듦새가 과연 저 홀로 상존하는 걸까? 실은 ‘영화 자체’와 ‘영화 외적인 것’이 그리 쉽게 구분되고 분리되진 않는다.


 하나의 작품은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아우른다. 때론 컨텍스트가 텍스트 소비 방식을 규정한다. 둘은 서로가 서로의 판단 준거이고, 긴밀하게 상호 교섭하며 파장을 방출한다. 가장 영화 내적인 것을 논할 때조차 종종 영화 외적인 것을 경유할 수밖에 없으며, 반대도 마찬가지란 말이다. 이 지점에서 텍스트 비평과 컨텍스트 비평의 구분은 무의미할 때가 있다. 컨텍스트 비평 또한 내재적 접근과는 다른 방식의 ‘영화 자체’에 대한 정당한 발언이다.


 <변호인>은 분명 관객의 심금을 퉁기는 ‘감정선’을 품고 있는데, ‘군사 정권의 폭압’과 ‘노무현의 죽음’이라는 배경을 소거하더라도 관객은 여전한 ‘재미’를 느낄까? 현실의 사법 체계를 믿기 싫다는 인식이 없었더라도 송강호의 법정 활극이 그토록 카타르시스를 선사했을까? 쉽게 말해 <변호인>이 완전한 가상의 휴먼 드라마에 지나지 않았다면 천만 관객의 거탑을 쌓았겠느냔 말이다. 이 논리는 <국제시장>이라고 열외가 아니다. ‘산업화 시대’에 대한 태도 차이 때문에, 한 편의 영화가,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누군가에게는 역겨움을 선사하며 ‘영화의 재미’가 표변함을 논쟁 당사자들이 드라마틱하게 재현하지 않았는가.


 비평의 목표를 내재적이고 가치중립적인 만듦새 평가라 규정해보라. 비평의 운신 구역을 협소하게 구획하고, 엄연한 영화의 구성물인 이념성과 정치성을 ‘영화 자체’와 분리하는 반지성주의로 이끌릴 것이다. 대안은, 컨텍스트를 후퇴시키고 텍스트에 집중하는 비평이 아니다. 컨텍스트를 정확하게 반영한 텍스트 비평이다.      



2     


2007년 <디 워> 사태를 필두로 취향의 다수결로 평가의 엄밀함을 기각하는 반지성주의가 영화 공론장을 횡행했다. 그러나 천만 영화가 쏟아져 나온 2012년을 전후로 다수결 고지를 점령한 ‘흥행 영화’에 대한 냉소가 온라인 광장에서 고개를 들었다.


 먼저 흥행 경쟁 ‘공정함’에 대한 냉소다. 2011년 700만 영화 <최종 병기 활>, 2012년 천만 영화 <광해>와 2013년 700만 영화 <베를린> 표절 논란, 그리고 CJ로 대변되는 독과점 전횡에 대한 비판이다. <광해>의 <데이브> 표절 논란은 <광해> 대종상 싹쓸이 사태에서 분노로 전화했다. 2014년 흥행 신기록을 세운 <명량> 또한 “영화가 좋아서 그런가? 독과점 덕분이지”라는 심드렁한 태도에 부닥쳤다. 특히 일련의 표절 논란은 “다들 한통속이라 입 다물기 바쁘다”는 전문가 담론에 대한 회의로 나타났다. 숨은 흑막, 기득권 카르텔을 상정하고 음모론적 태도로 불신하는 인터넷 대중의 반정치 정서와 통한다. 그 이면은 “자격 있는 영화가 마땅한 상영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한탄으로 표출된 2012년 김기덕 <피에타> 열풍이다. 영화 저널리즘의 목표는 “흥행 영화 비판은 몰매를 맞는다”는 상투적 인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흥행 영화라고 용서하지 마라”는 대중 정서 일각을 받아 안아 견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으로 흥행 영화 만듦새에 대한 냉소다. 2013년 <7번 방의 선물>이 천만 폭죽을 터트리자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어떻게 이런 영화를 천만 명씩이나 볼 수 있느냐”는 빈정거림이 터져 나왔다. <명량>이 1700만 관객의 권좌에 앉을 때도 “왜 이렇게까지 흥행하는지 모르겠다”는 갸웃거림이 삐져나왔다. <국제시장> 윤제균 감독의 2010년 천만 영화 <해운대> 또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형편없는 천만 영화” 리스트에 초대받는 단골이다. 이것은 세대 교차적 포섭력을 노릴 수밖에 없는 거대 흥행 영화 속성에 기인한다. 한국처럼 문화 내수 시장이 크지 않은 사회에서 기록적 흥행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나이 든 세대와 가족 관객이 움직여야 하고, 저들 취향을 반영하는 코믹 신파를 구가하곤 한다. 그러니 젊은 세대가 여론을 주도하는 인터넷 여항에선 흥행 영화가 촌스럽다는 피드백이 웅성거린다. 이런 현상은 저출산 고령화 경향과 맞물린 4·50대 티켓 파워 강화를 통해 증폭되고 있다. 문화 영역에서 나타나는 세대 갈등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노친네들 촌스런 신파 영화” “밥상머리에서 듣던 얘기를 영화로 볼 필요까지 있을까?”라는 어떤 <국제시장> 리뷰가 떠오르지 않는가?          



3     


<국제시장> 논란이 촉발된 양상과 요 몇 년간 일었던 영화적 스캔들을 되돌아보자. <국제시장> 논란은 TV 조선이 “좌파 평론가의 막말”이란 프레임을 짜면서 본격화하였지만, 그 시발점이 실제 막말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토 나온다”라는 선정적 단언이 한 영화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대중의 악플과 언론의 어뷰징에 불을 지르며 발화자 이름을 검색어란 상단에 올리는 것 말고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한다(허지웅은 이 말이 <국제시장>이 아니라 <국제시장>에 관한 언론 반응 등을 겨눈 것이라 항의했다. 영화 속 대사까지 지목하며 비판한 상황에서 의미가 없는 해명이다).


 인터넷 지면 시대가 도래한 후의 일련의 논란을 복기하면 확인되는 경향이 있다. 계몽주의와 반지성주의, 또는 이념 진영으로 형성된 공고한 적대 구도 위에서, 저명한 평론가가 과격한 표현으로 적군을 도발하듯 개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는 사실이다(2012년 <26년> 논란 “광주를 욕보이는 것은 어느 쪽인가?”, 2013년 <변호인> 논란 “<변호인>의 단점은 (…) 비뚤어진 정의감만으로 모든 걸 재단하며 민폐를 끼치는 열성 노무현 팬덤”, 2014년 <국제시장> 논란 “<국제시장>을 보면 (…)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다”라는 식이거든요. 정말 토가 나온다는 거예요”). 그 결과는 항상 영화에 관한 숙의가 아닌, 재치있고 자극적인 수사로 논란을 주도하는 비평가에 관한 스캔들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진중권과 허지웅이 그간의 담론에 무엇을 보탰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이번 <국제시장> 논란 또한 그런 흐름의 지류라 해도 좋다.


 영화 저널리즘이 처한 깊은 곤경은 비평에 대한 대중의 저항이라기보다, 대중에 의한 비평의 소외일 것이다. 진중하고 차분한 분석은 고립된 지면에서 소수의 독자와 소통할 뿐이며, 독하고 화끈한 말이 대중의 분노와 합을 짜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전문 저널과 평론가들은 영화 홍보에 저널 수익을 의탁하는 산업적 이해관계에 부대끼며 첨예한 쟁점을 돌아간다. 극장 산업이 고도로 성장한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영화 관람이 일상적 여가로 뿌리박고 와이드 릴리즈 전략이 본격화하여 상영관 회전율이 높아질수록, 영화를 보기 전 구매 가치를 확인하는 ‘리뷰’가 판을 치고 영화를 본 후 긴 호흡으로 되새기는 ‘비평’은 퇴출당한다. 이러한 소외 현상을 빚는 구조적 저변을 고찰하는 것이 영화 저널리즘의 빈곤을 타개하는 과제일 것이다. 한편 풍부한 영화사적 교양과 정교한 산업 이해에 바탕을 두고 정제된 언어로 논평하는 비평의 전문성과 윤리의식이 필요한 때이다.


 언젠가 깊이 논할 기회가 있겠지만, 나는 2007년 <디 워> 사태가 여러모로 비평 지형의 나쁜 징후였다 여긴다. 그 이유는 국가주의 광신이나 평론가 마녀사냥 따위가 아니다. 인터넷 시대 대중-평론가 관계 설정의 원점으로 자리매김하며 기다란 그늘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평론가와 대중이 벌이는 계몽주의와 반지성주의의 성전, 바로 <디 워>가 개막한 지겨운 창세기전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엉뚱하게도 영화가 아닌 관객을 향해 전선을 긋고는 한다. 가령 <변호인>을 보고 나서 밑도 끝도 없이 일베와 싸잡아 ‘노빠’를 호통치는 식이다. 대중과 평론가의 지루한 멱살잡이 끝에, 남는 것은, 외설적인 말로 반지성주의와 싸우며 이슈의 소음을 뿜어내는 평론가 개인의 자기 결백의 과시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입을 모아봤자 “평론가에게 평론할 자유를 달라”는 진부한 원론 속을 공전할 수밖에 없다. 비평에 대한 대중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비평이 처한 조건일 뿐 목적일 수 없다. “나는 영화에 대해 말했을 뿐” “얘들아 비평 좀 하게 놔둬라”라며 자기 확신을 강변하지만, 비평의 기능부전을 초래하는 것이 대중뿐 아니라 자신이라는 걸 저들은 모른다. (201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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