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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Jan 11. 2016

3D의 타자성

<라이프 오브 파이>의 3D 이미지에 관한 메모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은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1985)에서 사진에 내재한 주술성의 기원을 말한다. 이집트 종교는 사후의 삶이 신체의 물질적 영속에 달려 있다 믿었다. 미라는, 인간 심리의 근본적 욕구, 흘러가는 시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시켰을 것이다. 사진적 이미지는 “사물 그 자체이지만 시간의 우연성에서 해방된 사물이다”. 사진은, “시간을 방부 처리하고 시간을 부패로부터 구제한” 기계적 객관성을 담은 이미지를 영속할 수 있게 한다. 사진은, 오늘날 디지털 이미지로 형체를 유실하여 향유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찰나를 포착하여 물질적 형태로 소장하는 매체다. 그 소장 가능성에 방점을 뒀을 때, 3D 영화는 사진과 대척에 있는 재현 매체다.


오늘날 영화는, 어쩌면 소장 가능한 예술이 되었다. 영화 속 장면을 간직하고 싶다면 스틸 컷을 캡처하면 된다. 그것을 출력하거나 액자에 박아두는 것도 가능하다. 국내에서 상영기회를 얻지 못한 작품도 잠시만 발품을 팔면 DVD 포맷으로 소장할 수 있다. 테크놀로지는 TV 모니터의 몸집을 키워놓았고 서라운드 오디오 시스템을 개발했다. 주거 공간에 소 상영관을 마련하여 블루레이 컬렉션을 감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3D는 다르다. <라이프 오브 파이> 2D와 3D, 아이맥스 3D 판본이 질적으로 다른 영화라는 사실에 누구라도 수긍할 것이다. 거대한 스크린의 아이맥스 3D가 빚어내는 감흥을 어떻게 방구석 3D TV 따위가 재현할 수 있단 말인가. 또는 아이맥스 3D의 심도와 입체감을 스틸 컷이 표현하는 게 가능한가? 3D 극장 시설이 뿜어내는 압도적 스펙터클과 풍만한 입체감은 동질하게 소장할 수 없는 일회적인 것이다. 재향유 기회가 현격히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2D 영화와 다르다. 3D로 현된 영화 속 장면은 한순간도 붙잡고 되풀이할 수 없이 이행하고 소멸하는 실재의 시간 감각과 조응한다. 사진적 이미지가 주술적 영속성에 대한 환영적 갈망을 품고 있다면, 3D 이미지는 마술적 찰나에 대한 비감한 상실의 쾌락을 띠고 있다. 3D 이미지는 영화와 관객의 타자적 거리를 다시금 확보하는 면모가 있다.


길 잃은 소년과 벵골호랑이의 동행이 왜 아름다운가. 크리슈나의 벌어진 입속으로 시야가 진입할 때 산개되는 우주의 환각과 겹겹이 주름 잡힌 채 파랑을 일으키는 파도의 현장감, 거대한 고래가 형광색 물보라를 뿜으며 솟아오를 때의 경외감, 낮에는 희망을 밤에는 절망을 선사하는 좌표 없는 식인도의 기이한 매혹. 온몸으로 목도하는 황홀한 입체적 절경 때문이다. 멕시코 밀림으로 리차드 파커가 무정히 사라질 때 관객 역시 슬픔을 느꼈다면, 비단 영화 속 타자를 향한 상실감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안 감독은 리차드 파커가 사라지는 장면에서 3D 영상을 2D 영상으로 전환한다. 그것은 신비로운 표류기에 배석할 시간이 이제 막 끝났다는, 매체의 타자성을 향한 아슴푸레한 상실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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