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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Feb 08. 2016

매체, 타자, 제국주의

<라이프 오브 파이>에 관한 세 장의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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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야기에 대한 메타적 논평이다. 주인공 파이 파텔은 하나의 과거에서 두 개의 서사를 제련해, 창작 소재를 구하러 찾아온 캐나다인 작가에게 들려주고 선택을 맡긴다. 이 선택지는 곧 영화가 관객에게 제시하는 선택지이다. 두 이야기 중 어떤 이야기를 택할 것인가. 허구에 대한 믿음은 무엇에서 비롯하는가.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야기와 믿음을 논하며 성찰의 그물을 던진다. 이 이야기가 노련한 점은 알레고리의 프로그래밍과 결말의 형식이다.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외롭게 표류하던 소년 파이의 거울임이 드러났을 때, 파이 자신이면서 파이와 표류한 리차드 파커는 질량이 텅 빈 기표의 허물로 남는다. 파이 파텔과의 이항대립에서 리차드 파커의 자리는 무리수 파이π처럼 확장된다. 그것은 자아이며 타자이며 자연이며 신앙이며 충동이고 외상이며 과거인 동시에 허구이며 이야기다. 두 갈래 서사의 진위에 이르러선, 믿음의 가치와 역할에 닿는 구름다리가 하늘거린다. 서사와 신학의 우화로 숱하게 해석된 이 영화엔, 그러나 미지의 항로가 남아 있다.


하나. ‘이야기’로서의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멕시코 해안에 도착한 파이 파텔이 보험 수사관들 앞에서 ‘실재의 표류기’를 진술하는 장면이다. 아무런 플래시백 없이 오직 ‘구술’로만, 화자의 얼굴을 곧게 잡은 롱테이크로 몇 분에 걸쳐 중계된다. 이 한 장면은 같은 사건에서 태어난 두 이야기의 대응이며, 러닝타임의 압도적 시간 동안 진행된 3D 시각재현에 대한 구술 재현의 대응이다. 이러한 서사 내용과 서사 매체의 대응 구조에서 영상 서사 매체 시네마에 대한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이야기는, 형식적 구성과 시각적 기획의 맞물림을 통해 재 사유 되어야 한다.


둘. <라이프 오브 파이>의 영화적 매혹은, 3D 효과 쓰임의 전환이 빚어내는 아득하고 신비로운 이미지에 있다. 이른바 ‘후방 확장 이미지’로 개념화할 수 있는 그 감흥에 대해선 몇몇 평자가 언급한 바 있으니, 나는 오늘날 관람 지형 안에서 3D 영화 매체 속성의 큰 그림을 그려볼 생각이다.


셋. <라이프 오브 파이>를 처음 봤을 때, 정치적 올바름과 재현의 윤리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재삼 숙고하니, 그렇게까지 추궁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 영화에 느낀 불편함을 중립적으로 규명하며 글줄을 여미려 한다. 이것은 (인도계 이주민이 북미 작가에게 이야기를 넘겨주는) ‘서사의 이양’이란 테마, (인도를 무대로 펼쳐지는) 비할리드우드 지역 서사란 제재와 결부된 논점이다. 하나의 굵은 동아줄을 엮어 잡아당기는 것보다 세 장의 단면도를 종합하는 것이, 수없이 거론된 이 영화의 숨은 자질과 함의를 말해줄 것이다. 망망한 대해를 가로지른 소년 파이처럼 이제 비평의 대륙을 향해 노를 저으려 한다. 좌초하고 침몰해도 다시금 떠오를 테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나의 리차드 파커가 되어주기를.



2


태초에 이야기는 구술(口述)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영화는 이야기를 재현(Representation)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서사 매체에 따른, 이야기의 수용 양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에는 두 가지 판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등장하는 신비로운 표류기. 조난자들끼리 죽고 죽인 절망에 찬 생존기.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믿으시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리차드 파커 판본을 택했다면, 그 이야기가 더 아름다워서 믿었노라 답하는 건 정확하지 않다. 두 이야기의 가치는 이야기(Narrative)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러닝타임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이의 표류기만 떼어놓고 보면, 호랑이와 표류하게 된 소년이 맹수와 공존하는 방법을 서서히 익혀가다 불현듯 헤어지는, 조금 독특하지만 단순하고 싱거운 이야기다.


이안 감독은 상이한 서사를 상이한 매체에 담는다. 가장 고전적인 형식인 구술 서사와 첨단 형식 중 하나인 3D 서사다. <라이프 오브 파이> 아이맥스 3D를 보았을 때, 사실 처음 10여 분은 지루했다. 파이 파텔과 캐나다인 작가가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에서, 평면에서 평면이 돌출된 듯 한 고질적 이질감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D는 평범한 공간에서 진행되는 드라마에는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침춤호의 항해가 시작되고 표류기로 접어들었을 때, 생각이 바뀌었고, 나머지 이질감이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거나, 영화의 비전에 결과적으로 투신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서사에 따른 3D 효과의 계열화라고 할까.


<라이프 오브 파이>는 두 층위로 건설된 액자구조 이야기다. 파이 파텔과 캐나다 작가의 대화 시퀀스가 액자 틀 노릇을 한다. (액자 틀 시퀀스라고 부르자.) 그 안에 파이의 유년기와 표류기가 액자 그림으로 끼워져 있다. (액자 그림 시퀀스라고 부르겠다.) 액자 그림 시퀀스는 판타지의 정서를 머금고 있다. 파이의 회고담에는 믿기 힘든 농담 같은 이야기가 현실의 지반에 거치 돼 있다.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는 아름답고 몽환적인 영상과 조응하며 판타지의 정서를 각인시킨다. 다만 <라이프 오브 파이>는 자신이 노정한 판타지에 온전히 이입하는 것은 지체시킨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판타지의 입구가 되는 액자 틀 시퀀스가 현실의 층위에 건설돼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 작가는 “흥미로운 얘기군요.”라며 맞장구를 치면서도 전전긍긍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서사 진위에 혼란을 느끼는 관객이 많았던 것은 의아한 일이다. 리차드 파커 판본은 거짓말 같은 일들 투성이인 반면, 파이가 구술한 판본은 대부분 현실 가능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프닝 시퀀스를 보자. 비 내리는 동물원 진흙 바닥 위로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지나간다. 멀리에 화려한 깃털을 단 커다란 조류가 보인다. 사람들이 뛰어오고 도마뱀은 발길을 피해 도망간다. 이 장면 위로 깔리는 파이 파텔의 보이스 오버. “동물원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벵골 왕도마뱀을 연구하는 파충류 학자가 출산을 도와줬죠. 하지만 왕도마뱀은 거대한 타조에게 깔려 죽었어요.” 영화는 이야기의 진위를 이렇듯 처음부터 천명하였다. 이것은 실재가 아닌, 실재를 조합하고 재편한 허구다. 관객 역시 알게 모르게 그를 의식하도록 서사를 설계해 놓았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액자 그림 시퀀스의 개연성을 지속해서 헝클어트리며 리차드 파커와 파이 파텔이 동일함을 암시한다. 수만 마리의 미어캣이 서식하고 밤이 되면 산을 뿜어 방문객을 잡아먹는 무인도의 존재를 구태여 의심할 필요도 없다. 간단한 증명. 어떻게 하이에나와 벵골 호랑이가 비좁은 뱃전에 사이좋게 숨어있을 수 있는가. 처음 파이가 뱃전을 들추어 보았을 때, 거기엔 분명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액자 틀 시퀀스는 실내 공간에서 인물-피사체에 초점을 맞춘 평범한 미장센이다. 평면의 배경 위에 평면의 인물이 종이 인형처럼 돌출된 인상을 준다. 결과적으로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3D 기술의 ‘소격 효과’라 할 수 있을 텐데, 액자 그림 시퀀스의 면면한 입체감과 명징하게 대비된다. 무미건조하고 작위적인 실재와 황홀하고 핍진한 허구의 시각적 대당. 이 대당은 잔혹한 생존 담이 길게 구술되는 장면에서, 구술의 딱딱한 매체성과 결부되어 효과를 증폭한다. 이안 감독은 노골적으로 보일 만큼 두 서사 판본 중 리차드 파커의 손을 들어준다. 파이와 마마지, 캐나다인 작가와 보험 수사관. 모든 인물이 리차드 파커 판본을 택한다. 그럼에도 선택을 망설이는 관객이 드물지 않은 것은 서사 이입 지체 때문이다. 나아가서 매체성의 대당을 따라 질문을 뒤바꾸며 자기화했기 때문이다. 파이는 서사의 참과 거짓을 묻지 않았다. 서사의 좋고 나쁨을 물었을 뿐이다. “어떤 이야기를 택해도 선박의 침몰 원인은 알 수 없고, 나는 가족을 잃고 고통받아요.”,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요?” (“Which Story Do You Proper?") 이것이 관객의 관람 경험 안에서 서사의 진위로 변환된다.


구술 재현은 회고적이며 주관적인 매체다. 시각 재현은 현행적이며 객관적인 매체다. 이것은 영상과 구술에 담긴 내용이 주관적이고 객관적이란 따위의 말이 아니다. 수용자 인식에 관한 문제다. 먼저, 지각 방식이 차이 난다. 시각은 근본적으로 현재의 체험에만 복무한다. 지금 내가 보는 것은 지금 내 앞의 풍경이요, 사물이요, 인물이요, 사건이다. 반면 과거의 경험은 다시금 눈으로 볼 수 없다. 언어를 통해 술회 되거나 머릿속에서 불려 올 따름이다. 둘째, 언어의 옷을 입은 이야기는 중계자를 가정한다. 구술자는 ‘자신’이 겪은, ‘자신’이 들은, ‘자신’이 상상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청자는 화자의 존재를, 그 주관성을 명시적으로, 또는 흐리터분하게라도 염두에 둔다. 반면 카메라는 중립적이다. 시점 숏과 플래시백 등 특정한 형식의 경우에만 인칭을 드러내고, 기계-관찰자의 자리에서 비인칭적 시점으로 중계한다. 그래서 시각재현은, 창작자의 주관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객관의 가면을 쓰고, 구술은 주관의 혐의에 쉽사리 노출된다.


이렇게 정리해 보자. 3D 영상으로 재현된 리차드 파커 판본은, 관객이 실시간으로 목격한 자기 체험이다. 구술 판본은 그것이 사실(Fact)일지언정, 한 치의 내막도 보지 못한 화자의 진술이다. 논리적으로 전자가 거짓이고 후자가 참이지만, 그 진위를 믿기에는 선뜻 내키지 않는 것이다. 허구와 사실의 대당 속에, 거짓임이 분명한 이야기를 사실로 승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버추얼 리얼리티의 실재감과 아름다운 영상에 대한 매혹, 주관성과 객관성, 회고성과 현행성이라는 매체성에 기인한다. 따라서 리차드 파커 판본을 관객이 선택했을 때, 실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구술에 대한 시각 재현, 매체의 형식성을 택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서사에 대한 믿음으로 귀결하는 영화가 아니다. 찬연하고 살갗 에인 이미지와 그를 구현하는 매체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욕망을 증명하는 영화다.



3


타당하게 지적되었듯 <라이프 오브 파이>의 시각적 특별함은 전경에서 후경으로 아득하게 멀어지는 후방 확장 이미지다. (씨네21 892호, 신전영객잔 ‘어쩌면 가능성’, 허문영) 그 원근감을 자아내는 것은 물론 입체감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선 한 사람 관객의 자리에서 느꼈던 인상을 엄밀히 풀어보는 것에서 출발하려 한다. 나는 이 영화의 아득한 입체감이 무수한 평면과 평면의 조밀한 배치처럼 느껴졌다. 스크린 밖으로 피사체가 튀어나와 관객 얼굴로 덤벼드는 통속적 3D 효과를 <라이프 오브 파이>는 과용하지 않는다. 서사 흐름상 그 효과를 넉넉히 구사해도 좋을 날치 떼 비행 장면에서도, 날치 떼를 카메라를 향해 종단시키기보다, 카메라 너머로 수평 횡단케 한다. 수천수만 마리의 날치가 전경에서 후경까지 차례로 층위를 형성한 채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비행하며 공간을 입자로 빼곡히 채운다. 전경과 후경 사이 점점이 평면의 방점을 찍으며 새겨진 원근의 질감. 이것은 소실점을 상정하고 물체의 비율은 유지한 채 크기를 줄여가는 고전적 원근법과도 다른 인상을 준다. 선명한 피사체의 무수한 중첩(overlap)을 통해 공간과 심도의 부피를 불어넣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단적인 장면이요, 개인적 인상에 가깝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의 3D 영상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한다. 누구라도 동의하겠지만, 이 영화 3D 효과의 핵심은 바닷물의 입체적 재현이다. 끝없이 출렁거리는 물결과 심원하게 뻗어 나간 대해의 지평선. 3D 효과를 전면의 피사체에 할당하기보다, 서사 무대 공간 구축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바다, 그곳은 몰아치고 빠져나가는 굽이침의 공간이다. 세모꼴 조형물이 좌와 우와 앞과 뒤를 채우며 겹겹이 부대낀다. 전경에서 후경까지 화면을 가득 메우는 주름 잡힌 세모꼴 조형물은 원근과 심도의 좌표를 형성한다. 그것은 파도이다. 사라졌다가 형성되고, 사그라졌다 고개를 드는 파도. 말 그대로의 이미지의 물질적 유동성이 좌표와 좌표 사이를 잇대고 적시고 매립하며 면면한 입체 공간을 건축한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의 우주와 같은 심연과 미지의 공간인 바다는, 출구의 개념 자체를 삭제해버린 뻥 뚫린 광막한 지평선으로 원근감을 몰아간다. (아마도 이 점이 많은 사람이 두 영화를 함께 거론하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이미지의 물질적 유동성은, 흔들림의 카메라 워크로 현시 된다. 파이가 올라탄 구명보트와 간이 뗏목은, 파도의 세기와 크기를 따라 쉬지 않고 기울고 출렁이며 삐걱댄다. 그 흔들림을 최대한 부각하기 위해 보트와 뗏목 내부에서 또는 지척에서 근접앵글을 잡는다. 흔들리는 보트와 뗏목, 피사체의 전체가 아닌 부분을 카메라에 담으며 기우뚱한 균형감을 배가한다. 때로는 리차드 파커와 파이, 오렌지 주스와 파이의 시점 숏을 오가며 보트에 합승해있다는 느낌을 준다. 인체가 논리적으로 거할 수 없는, 지척의 바닷물 위에 보트와 나란히 떠 있는 앵글은, 카메라의 잔상을 흐릿하게 드러낸다. 이렇게 현시 된 카메라의 자리는 곧, 관객을 위해 마련된 ‘스크린 속 객석’이다. 이것을 배석의 카메라 워크라고 말하고 싶은데, 바로 곁에서 표류를 참관하는 듯한 놀라운 현장감을 선사한다.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은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1985)에서 사진의 미적 잠재성과 함께 그것에 내재한 주술성의 기원을 말한다. 이집트 종교는 사후의 생존이 신체의 물질적 영속에 달려 있다 믿었다. 미라는, 인간 심리의 근본적 욕구, 흘러가는 시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시켰을 것이다. 사진적 이미지는 “사물 그 자체이지만 시간의 우연성에서 해방된 사물이다”. 사진은, “시간을 방부 처리하고 시간을 부패로부터 구제한” 기계적 객관성을 담은 이미지를 영속할 수 있게 한다. 사진은, 오늘날 디지털 이미지화 한 채 형체를 유실하여 향유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찰나를 포착하여 물질적 형태로 소장하는 매체이다. 그 소장 가능성에 방점을 뒀을 때, 3D 영화는 사진과 대척에 있는 재현 매체이다.


오늘날 영화는, 어쩌면 소장 가능한 예술이 되었다. 영화 속 장면을 간직하고 싶다면 스틸 컷을 캡처하고 저장하면 된다. 그것을 출력하거나 액자에 박아두는 것도 가능하다. 국내에서 상영기회를 얻지 못한 작품도 잠시만 발품을 팔면, DVD 포맷으로 ‘소장’할 수 있다. 테크놀로지는 TV 모니터의 몸집을 키워놓았고, 서라운드 오디오 시스템을 개발했다. 주거 공간에 소 상영관을 마련하여 블루레이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3D는 다르다. <라이프 오브 파이> 2D와 3D, 아이맥스 3D가 전혀 다른 영화라는 사실에 누구라도 수긍할 것이다. 거대한 스크린의 아이맥스 3D가 빚어내는 감흥을 어떻게 방구석 3D TV 따위가 재현할 수 있단 말인가. 또는 <라이프 오브 파이> 아이맥스 3D의 심도와 입체감을 스틸 컷에 담아두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3D 극장 시설이 뿜어내는 압도적 스펙터클과 풍만한 입체감은 유사하게라도 소장할 수 없는 일회적인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 의 실재감은 한순간도 붙잡고 되풀이할 수 없이 이행하고 소멸하는 실재의 시간 감각과 조응한다. 재향유 기회가 현격히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2D 영화와 다르다. 사진적 이미지가 주술적 영속성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다면, 3D 이미지는 마술적 찰나에 대한 상실의 쾌락을 띠고 있다. 3D 이미지는 영화와 관객의 타자적 거리를 다시금 확보하는 면모가 있다.


길 잃은 소년과 벵골호랑이의 동행이 왜 아름다운가. 크리슈나의 벌어진 입속으로 시야가 진입할 때 산개되는 우주의 환각과 겹겹이 주름 잡힌 채 스크린 위로 파랑을 일으키는 파도의 현장감, 거대한 고래가 형광 물보라를 뿜으며 솟아오를 때 마주하는 경외감, 낮에는 희망을 밤에는 절망을 선사하는 좌표 없는 식인도의 기이한 매혹. 온몸으로 목도하는 그 신비로운 실재적 감각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멕시코 밀림으로 리차드 파커가 무정히 사라질 때 관객 역시 슬픔을 느꼈다면, 비단 영화 속 타자를 향한 상실감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안 감독은 리차드 파커가 사라지는 장면에서 3D 영상을 2D 영상으로 전환한다. 그것은 신비한 표류기에 배석할 시간이 이제 끝났다는, 매체의 타자성에 대한 아슴푸레한 상실감이다.



4


파이의 고향, 폰디체리는 프랑스령 식민지였다. 1673년부터 영국과 프랑스 사이 통치권이 오가다, 1814년 비엔나 협약으로 프랑스에 완전히 종속되고, 1954년 인도에 반환된다. 파이는 식민지 해방과 함께 태어났다. 파이 아버지의 동물원도 해방과 함께 건립됐다. 도입부 내내 폰디체리의 종주국, 프랑스의 이미지가 선경처럼 낭만적으로 펼쳐진다. 깨끗한 영혼을 얻기 위해 방문해야 한다는, 인도인 마마지의 인생관을 바꾼 피신몰리토 수영장. 수로를 경계로 반으로 나뉜 폰디체리의 프랑스 지구 역시 화사하다. 폰디체리의 나머지 반. 인도 지구와 노골적으로 대비된다.


리차드 파커 판본을 현실의 판본으로 변환해보자. 하이에나는 주방장, 오랑우탄은 파이 어머니, 얼룩말은 행복한 불교 신자 선원이다. 침춤호가 침몰하면서 하나의 구명보트 (하나의 세계 혹은 공동체)에 프랑스인(제국주의 지배자)과 동양인과 인도인(제3세계 식민지)이 동승한 것이다. 하이에나가 얼룩말(동아시아)을 죽이고, 파이 어머니(인도)의 목숨을 뺏은 것은 제국주의 식민시대의 은유다. 주방장을 죽인 후 홀로 남겨진 파이의 운명은 해방 이후 폰디체리, 그리고 제 3세계의 운명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이었지만, 불교 신자 일본인 선원의 온유한 캐릭터와 하이에나-얼룩말의 먹이사슬에 잇대면, 동아시아 식민지 전반으로 치환할 수 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압제에서 벗어나 파이가 도착한 새로운 땅은, 아메리카, 북미대륙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민속지학적 서사의 이양에 관한 영화다. 파이는 식민지 해방 이후, 시련을 맞은 폰디체리에서 캐나다로 떠난다. 파이의 아버지는 말한다. 이것은 "콜럼버스의 항해"다. 신에 대한 질문, 이성을 향한 타진. 갖은 시련과 동화 같은 표류 끝에,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의 신비한 동행이 끝난다. 대안의 땅 캐나다에, 파이는 기적같이 정착한다. 파이의 '이야기'는 영감이 고갈된 캐나다인 문학 작가에게 불모지의 씨앗처럼 전파된다. 바꿔 말해, 주변부의 영성, 고난, 문화, 신화, 철학. 모두가 문화의 갈증(Thirsty : 리차드 파커의 다른 이름이다)에 시달리는 중심부에 '이야기'의 재료로 헌사 된다. 이 모든 인계는 인도인 파이와 마마지에 의해 능동적으로 수행된다.


밀림 숲으로 홀연히 사라진 리차드 파커와 울먹이는 파이를 보며, 길들지 않는 타자의 타자성을 떠올리는 것은 수긍하기 힘든 해석이다. 이 우화가 <정글북>등 제국주의 담론 지류와 사이가 멀다 평가하는 것도 의문스럽다. (씨네21 887호, 신전영객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남기다’, 김영진) 서사의 최종적 완결성 안에서 리차드 파커는 파이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새로운 세계에 정착한 이방인으로서 오래된 정체성을 떠나보내야 하는, 이제 곧 순치되어버릴 자신의 타자성에 대한 애도라고 보는 편이 오히려 옳을 것이다. 조난당한 파이가 멕시코 해안에 상륙하는 장면은, 표류기의 대단원으로선 지나치게 건조하고 생략적이다. 생환의 카타르시스를 휘발시킨 이 장면에서 어른거리는 것은 인도에서 북미로의 이주에 대한 숙명적 긍정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시리즈물 재판과 원작 각색을 거듭하며 소재 고갈(Thirsty)에 스스로 봉착한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포스트 식민지 서사 소재를 흡수하는 한 편의 알레고리처럼 느껴진다. 오랜 세월 할리우드의 이방인으로 장르의 경계를 횡단해온 이안 감독이, 인도 출신 이주민 2세대 작가 얀 마텔의 ‘이야기를 이양하는 이야기’에 이끌린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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