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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May 06. 2018

가상과 처벌

언리쉬드 사태

박은하 기자가 어린이 날을 맞아 소위 로리타 이미지를 배포한 언리쉬드 사태에 관해 쓴 글을 읽었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552549741524019&id=100003070251271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역겨운 그림일지라도 그로 인한 피해자가 없다면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라는 주장을 자유주의 체계 내에서 비판하기란 어렵다. 이런 불신과 무력감이 누적되어 자유주의에 실망한 사람들이 자유주의의 원칙을 무너트리는 편향으로 빠졌다.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정도일 것 같다.


나는 박은하 기자가 제시한 논의의 전제가 의심스럽다. 언리쉬드 사태와 같은 일을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언리쉬드가 배포한 이미지는 소위 ‘가상 아동 음란물’에 해당할 텐데, 이미 한국 법제는 이런 이미지를 처벌하는 쪽으로 입법돼있고, 해외의 입법례를 본받은 케이스다. UN은 ‘UN아동매매, 성매매,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선택의정서’에서 실재하는 아동이 등장하지 않는 코믹스,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역시 아동 포르노에 해당한다고 정의했다. 영국, 프랑스, 이태리, 호주, 캐나다 등이 가상 아동 포르노를 규제하고 있고, 세계에서 표현의 자유를 가장 강조하는 나라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애쉬크로프트 판결’을 들어 미국에서 가상 아동 포르노 규제는 표현의 자유 침해로 위헌 판결이 났다고 소개하는 아티클이 유통되곤 하는데, 사실과 다르다. 애쉬크로포트 판결은 기존법률의 아동 포르노의 정의 상, 가상 아동 포르노가 광범위하게 규정되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후 아동을 성적 착취로부터 보호하는 데 미흡한 판결이라는 비판이 거셌고, 미국 의회는 이듬해 ‘프로텍트 법’을 통과시켜 ‘학문적 예술적 사상적 가치가 없는 음란물’ 등으로 가상 아동 포르노의 기준을 구체화해 처벌하고 있다.


물론 가상 아동 포르노는 실사 아동 포르노와 달리 포르노 촬영으로 인권을 침해당하는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음란물과 성범죄 사이 인과관계가 공인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왜 가상 아동 포르노를 규제하느냐면, 아동 성착취가 그만큼 치명적 반사회 행위이기 때문에 그를 부추길 수 있는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아동 음란물은 피해자 발생 여부를 떠나 두 가지 방면에서 반사회적 영향을 미친다. 하나는 성인들의 음란물 시청이 아동 성착취로 이어지는 개연성이고, 하나는 아동들이 음란물을 접하며 왜곡된 성관념을 학습하는 위험이다. 규제를 정당화해주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음란물과 성범죄의 직접 인과관계를 밝힌 연구는 찾기 힘들지만, 음란물이 성폭력에 관한 통념에 영향을 미치며, 그 통념을 수용한 수준이 성폭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는 각각 존재한다. 이런 간접적 인과관계를 이유로 모든 종류의 음란물을 금지하는 건 과도할 수 있다. 다만, 아동은 성인에 대해 인지능력과 의사표현, 신체 능력 등이 부족한 절대적 약자이며, 성폭력에 관한 통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역량이 성인에 비해 결핍돼있기 때문에 예외 조항을 마련할 수 있다. 포르노 제작을 허용하는 나라에서 가상 아동 음란물은 규제하는 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국내에서 가상 아동 음란물을 규제하는 소위 아청법에 비판적 의견을 던진 대표적 법학자는 박경신 교수인데, 이 사람도 가상 아동 음란물을 처벌하지 말자고는 안 했다. 실제 피해자가 존재 하지 않는 음란물을 봤다고 해서 ‘아동 성범죄’로 처벌하는 현행 법제는 과도하니, 음란물로서 규제하는 방향으로 논의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내 말의 초점은 가상 아동 포르노를 형벌로 다스리자는 것이 아니다. 독일처럼 가상 아동 포르노는  규제에서 빼는 나라가 있고, 규제하는 경우라도 실사 아동 음란물과는 처벌 수위에 구분을 두는 나라도 있다. 다만, 자유주의가 발흥한 국가들, 자유주의를 두텁게 발전시키고 관철해 온 주요 국가에서도 가상 아동 음란물이 허용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쪽이 글로벌 스탠다드다. 즉, 언리쉬드 사태를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선례는 이미 제시돼있으며 근거 역시 마련돼 있다.


박은하 씨가 언리쉬드의 대변자들의 것으로 상정한 두 가지 주장 역시 반박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1) 청소년 불가 게임이다. 아동포르노나 성애 이미지가 실제 아동범죄로 이어지지 않는 한 이 행위는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않는 개인의 자유 영역이다. 그리고 아동포르노 이미지가 실제 아동성범죄나 소아성애 성향에 영향을 준다는 과학적 근거는 아직 없다. 결국 개인의 자유의 영역으로 둬야 할 문제이다.”


2) 오히려 무조건 금지하고 보는 것이 성적 일탈과 폭력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성교육을 제대로 할 생각을 해야지, 이미지를 검열하는 것은 낡은 방식이다. 오히려 더 많은 성적 표현과 이미지들이 허용돼야 한다.“


1) 아동 포르노가 문제 되는 맥락은 성인들이 아동에게 가하는 성폭력이다. “청소년 이용불가 게임”이라는 건 반론이 될 수 없다. 아동 포르노가 실제 범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주장 역시 입증되지 않은 상태이며, 둘의 연결고리를 입증해주는 근거도 있다. 아동 성착취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2) 가상 아동 음란물에는 성교육을 뒷받침하는 어떤 예술적 사회적 문화적 가치도 없다. 성교육의 목적이 반사회적 성관념을 예방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저런 이미지가 유포될수록 성교육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박은하 씨가 저 주장들을 논리적 철옹성처럼 묘사한 배경을 글 안에서 짚어보자면 첫째, 자유주의의 바깥을 삭제했기 때문이며 둘째, 자유주의 자체도 반 토막 내서 인용하기 때문이다.


박은하 씨는 서두에서 ‘사회적 해결’이란 표현을 썼는데, 사회적 해결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 크게 봐서 국가에 의한 해결이 있고 사회에 의한 해결이 있다. 자유주의는 단순한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지지하는 이념이다. 자유주의가 주되게 맞서는 건 개인의 자유를 국가가 규제하는 행위다. 때문에 자유주의는 사회의 문제해결 능력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다. 직접 피해자가 없더라도 아동 음란물을 유포하는 행위가 반사회적이라면 국가의 형벌을 떠나 사회적 가치를 방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게임 스토어에서 해당 게임을 유통하지 않는 방안일 수도 있고, 게임 업체 내부에서 개발을 자제하는 방안일 수도 있다. 이런 규제를 가능하게 하는 방아쇠는 현재 제기되고 있는 것과 같은 사회적 비판의식의 고취다(언젠가 박은하 기자는 걸그룹 문화가 현실의 성차별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 입장 역시 직접 피해자가 없을 경우라도 문화가 현실에 나쁜 영향을 끼침을 인정하는 것이며 문제의식을 환기하려는 시도 아니었겠는가?).


“사회적 해결”이라는 표현에서 시작해 국가의 처벌에 대응하는 “피해자가 없으니 개인의 자유 행위일 뿐이다”라는 명제로 건너가는 건 불분명한 개념 정의로 사안의 층위를 뒤섞는 오류다. 현재 여론이 저 게임 개발자들을 국가더러 어찌하라고 요구하는 상황은 아직 아니라는 점을 떠올려도 부적절한 논리 전개다. 박은하 씨가 여론의 비난을 “본능”과 “직관” ‘내 기분 나쁨’ 같은 즉자적 반응에 비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린이의 권익을 보호하려 제정한 어린이날에 아동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이미지를 유포하는 마케팅은 사회적 가치에 도전하는 상업 행위다. 여론의 분노에는 이런 공동체적 명분이 걸려있다.


자유주의의 또 다른 대전제는 누군가의 자유 행사가 다른 이의 자유 침해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아동 음란물을 공공연히 배포하는 행위는 아동을 성적 대상화함으로써 그들이 자유로운 인격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위협이 된다. 이런 방향에서, 언리쉬드 사태는 자유주의의 체계 내부에서도 문제시 된다.


무엇보다, 자유주의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이념이 아니다. 그것은 공화주의 등의 이념과 절충하고 상보하며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원리다. 개인의 자유 행사가 공공선을 해칠 수 있다면 구체적 요건을 통해 규제하는 ‘자유주의 너머의 논리’가 등장해야 한다. 가령 소수자 혐오 표현조차 국가가 규제하지 않는 미국에서 가상 아동 포르노를 처벌하는 것은 그만큼 이 사안이 공동체의 윤리에 치명적이라 여기기 때문일 거다. 이런 사례는 이미 많이 존재한다. 시장의 자유를 규제하는 국가의 개입이 대표적인 사례다. 내가 정말로 이상하게 여기는 건 경제적 자유에 관해선 국가 규제를 지지할만한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 만큼은 신성불가침처럼 우상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지금껏 살펴봤듯, 언리쉬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논리와 방안은 차고 넘친다. 자유주의를 통해서도 문제에 접근할 수 있고, 자유주의 바깥의 정치원리를 통해서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유교적 모럴”이나 “진화심리학”으로 간신히 대응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대하는 태도가 경직돼있다는 방증이다. 이번 사태는 자유주의의 내적 한계로부터 비롯한 필연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사회가 자유주의를 불완전하게 운영해왔기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말하고 싶다. 표현의 자유는 권위주의 시대의 억압으로 학습될 시간이 없었고, 억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성시되고 있다. 민주화 이후에도, 정권 교체를 다투는 군사독재 후신과의 성전 아래 의제가 분화될 기회가 없었다. 그 결과 표현의 자유는 보편자들의 것으로 불평등하게 전유되었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가치가 맞서는 상황에서 전자가 지지 받는다. 소수자들을 침묵케 하는 혐오 표현은 표현의 자유로 정당화되고, 거기 맞서는 보이콧 운동은 “표현의 자유를 씹어 먹는” 폭거에 비견되곤 한다. 이런 논리적 지평의 혼란 속에 소수자 혐오의 극우 포퓰리즘을 선동하는 트럼프를 언리쉬드 사태 등의 소수자 혐오에 반대하는 이들과 한 패로 묶는 도착적 서술이 벌어진 건 아닐까?


문자 테러와 청와대 청원, 소비자주의가 난립하여 공론장이 소외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 동감한다. 선명한 결론을 곧바로 얻길 원하는 조바심이 오늘날 시대정신 중 하나인 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 사안들은 행위 주체와 성격, 배경이 조금씩 다르고, 그에 걸 맞는 다각적 접근이 필요하다. 적어도 언리쉬드 사태가 일어난 배경을 말하자면, 자유주의에 대한 싫증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불평등하고 불완전한 운영에 가깝다. 그에 대응하는 해답은 자유주의의 온전한 안착과 자유주의 너머에 대한 사유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말처럼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진정한 자유주의는 이런 게 아니다”라는 명제를 합의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이건 결코 무능하고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은, 진부하게 느껴질 틈도 없을 만큼, 지난 시간 동안 이런 논의는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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