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볼>은 소년만화 치고도 작풍이 얕은 만화다. 이야기가 단순해서가 아니라 메시지가 없어서 그렇다. <드래곤볼>엔 <나루토>처럼 "유대감의 의미를 찾겠어" "세상의 증오를 없앨 수 있을까" 같은 유치한 수준에서나마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없다. 서사의 목적은 지구 수호 하나인데, 지구 따위 파괴돼도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는 드래곤볼이 먼저 주어져 있다는 점에서 말장난에 불과하다. 캐릭터가 죽어도 뭐가 슬프나? 드래곤볼로 살리면 끝인데. 주인공이 두 번 죽고 두 번 살아난 만화다.
드래곤볼이 인물들의 소원을 이뤄주는 보배요, 드래곤볼을 만든 '신'이 초월자로 기능하던 초반부에는 드래곤볼이 <드래곤볼>의 구심점이었다. 새로운 악당들이 '불노불사'의 야망을 꾀하며 드래곤볼 쟁탈전이 벌어진 프리더 전까지도 서사적 위상이 남아있었다. 이후 '신'은 외계인(나메크인)으로 밝혀졌고, 전사들은 일 만도 안 되는 그의 전투력 정도는 애시당초 초월했다. 드래곤볼은 신의 능력을 상회하는 소원은 들어주지 못한다고 효력이 제약된다.
지구 수호의 테마가 무력해지며 <드래곤볼>의 목적은 그 테마를 빌미로 한 전투 장면 연출이 되고 전투력 에스컬레이팅이 정체성이 된다. 드래곤볼은 인물과 지구를 되살리는 용도로 특화된다. 레이더로 언제든 찾아낼 수 있고, 성능도 개조할 수 있으며, 나메크 성에 스페어까지 있는 '상용품'이다. 드래곤볼은 인물의 죽음과 서사 무대의 훼손으로 인한 설정의 변곡점을 지운다. 에스컬레이팅이 한 단계 끝날 때마다 서사의 배경을 복구하며 다음 단계 에스컬레이팅을 예비하는 '리셋' 버튼이 된다. <드래곤볼>엔 몇 가지 모티프가 있는데, 변태(프리더와 초사이언의 변신)와 융합(인조인간 흡수와 퓨전)그리고 가장 중요한 '회복'이다. 드래곤볼이 죽은 사람을 부활시켜 훼손된 설정을 회복한다면, 작중 아이템 선두는 인물이 죽지만 않았다면 무조건 회복시킨다. 죽음에 이를수록 더 강해지는 사이어인이 '빈사-회복'을 의도적으로 거쳐 파워업 하는 모티프에는 드래곤볼로 설정의 체력을 회복하는 전투력 에스컬레이팅 시스템이 상징화 돼 있다.
서사 안 편의 아이템 드래곤볼은 작품 특유의 '증폭-회귀-증폭'을 반복케 하는 서사 바깥의 연출 도구가 됐다. 이를 바탕으로 <드래곤볼> 시리즈는 고도의 동어반복에 머문다. 최근작 <드래곤볼 슈퍼>에선 우주 대항전의 우승 상품 '슈퍼 드래곤볼'을 써서 대항전에서 탈락하며 삭제된 모든 우주를 복원하는 결말로 저 공식 자체가 에스컬레이팅됐다. 드래곤볼은 동일한 전개의 후속작을 무한 양산하는 (영화 기자 김혜리의 표현을 빌면) 프랜차이즈 서사물의 '네버 엔딩 스토리'를 완전하게 재현한다. <드래곤볼> 시리즈가 꿈꾸는 '불노불사의 소원'을 이뤄주며 메타 텍스트 차원에서 말 그대로의 '드래곤볼'로 실재화한 것이다. 훌륭하지 않은 연출이 때로는 흔치않은순간을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