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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Jun 25. 2018

골방에 들어 온 거리의 문화

한국 축구와 한국 사회

한국은 도심 집중화와 개발 수준, 인구 밀도가 높아 젊은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이 인도어 문화다. 이걸 떠받치는 건 세계 최고 수준의 온라인 인프라다. 해외의 아웃도어 문화가 수입돼 고급 레저 문화가 되거나 인도어 문화로 전유된다. 대표적인 게 힙합과 해외 축구다.


유튜브 시대를 맞아 변모된 점이 있지만 힙합은 태생과 바탕이 거리(스트릿) 문화다. 한국에선 랩과 비트 같은 음악적 요소가 힙합으로 통하지만, 그라피티, 사이퍼, 블록파티, 믹스테이프 판매 같은 힙합의 문화적 요소가 얼마나 있었냐는 거다. 요즘엔 유명 래퍼들이 사이퍼를 종종하지만, 역시 영상으로 제작돼 유튜브에서 공유되는 ‘인도어 문화’로 재현된다. 한국의 ‘거리’는 온라인 커뮤니티였고, 지금은 CJ 힙합 예능 촬영장과 인스타그램 팬덤 네트워크로 확장됐다. 한국형 배틀랩에서 '방구석 래퍼'라고 적수를 모욕하는 관용어가 자리잡은 것은 한국 래퍼들 역시 아웃도어 문화를 인도어 문화로 재연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자격지심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투사하며 자신 분리려는 것이다.


해외 축구는 좀 더 양상이 극적이다. 유럽 리그의 토양은 생활 축구 인구와 관람 문화 일상화다. 축구가 곧 삶의 일부란 말이다. 한국의 해축 팬들이 축구를 공기처럼 누리는 유럽 남자들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축구의 대륙 남미의 아이들은 다섯 살 때부터 길거리에서 볼을 찬다. 한국에도 조기 축구 동호회가 있지만 사실상 병영 문화의 연장선이다. 이들이 곧 해외 축구 팬덤으로 치환되진 않는다. 볼 차고 경기장에 가는 대신 유튜브로 해축 선수 '스페셜 영상'을 보고 축구사이트에서 하루 종일 키배나 하는 거다.


실생활과 접점이 없는 유럽 축구에 자신의 삶을 오버랩하려다 보니 그 간극을 매우기 위한 자의식이 범람한다. 가본 적도 없는 해축 연고지를 고향처럼 외치고, 해축 선수에 낯 뜨거운 애칭을 붙이며 과몰입(호날두='우리형')한다. "히얼 이즈 어나더 올드 트래포드" "제발 한국인이면 맨유 응원합시다" "콥은 북런던 일에 상관 마시죠?" "암, 맨유가 부르면 와야지" 같은 길이길이 회자되는 해축 팬들의 '명언'이 다 이렇게 탄생했다.


어떤 스포츠든지 생활권과 인프라를 기반으로 해야 선수층이 두껍고 세대가 순환되고 최대치도 높다. 이 점에서 한국과 유럽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이러니까 한국 축구는 안 된다”는 게 아니다. 서로 잘할 수 있는 분야가 다르단 말. 한국에서 호날두가 나올 수도 없지만, 유럽의 일류 게이머가 한국 아마추어 게이머한테도 안 된다. 축구 전용 구장, 유스 클럽, 프로리그 문화 같은 '아웃도어 인프라'는 유럽이 두텁지만, 피씨방과 인터넷 랜선 망, 프로 게임 리그 및 선수단 문화 같은 '인도어 인프라'는 한국이 월등하니까. 옳다 그르다 이전에 사회 환경이 다르다.




한국은 근대화 후발 주자에 개도국 출신 국가다. 반만년 역사 문명국의 자부심과 중국을 사대하면서도 주위에 여진족과 거란족, ‘왜놈’ 따위 '오랑캐'를 거느린 지정학적 역사도 있다. 강대국을 선망하고 약소국을 멸시하는 '일진 시다바리' 의식 같은 게 강하다. 우리 수준이 서구 일진들과 어울릴 만한지 '알고 싶어 하는' 세계화의 열망이 그렇다. 해외 인사들한테 틈만 나면 "두유 노우 연아킴?" 같은 '질문'을 퍼붓는 현상은 한국의 클래스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의존 심리다.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 역사가 서구 중심의 사대주의 역사로 재편되며, 동남아시아 후진국(오랑캐)들과 구분 짓기 하고 서구 열강에 동일시하는 '탈아입구'의 열망이 발현했다. 이 구도에서 일본은 한 발 앞선 인접 국가로서, 식민지 지배 역사와 어울려 호승심과 적개심을 일으킨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세계화의 열망을 충족하는 가장 빠른 길은 재능 있는 선수 몇 명 혹사하는 엘리트 체육이었다. 인프라 만들고 저변 넓히고 선수 복지 향상하고... 이런 모범답안은 비용이 큰 데다 효과가 느리다. 축구에서도 일본과 세계화를 위해 선택한 길이 달랐다. 일본은 90년대까지 월드컵 본선에 한 번도 진출하지 못했다. 94년 월드컵에 단기 목표를 세팅하여 J리그 출범하고 해외 선수 영입하고 자국 선수 유학 보내며 장기적 계획을 세워 저변을 쌓아 올렸다면, 한국은 K 리그 중단하고 대표 팀에 장기 합숙을 몰아주는 단기적 극약처방으로 세계화를 달성했다.


아마도 양국이 근대화를 추진한 역사적 경로와 그에 따른 사회적 관성의 차이 같다. 일본은 동아시아 최초로 서구 문명을 번역한 국가다. 19세기 말 부터 탈아입구를 지향하며 명치유신이란 구조적 개혁을 거쳐 열강의 반열에 오른 역사적 경험이 있고, 한국은 해방 이후 박정희로 대표되는 효율 지상주의를 통해 고작 2,30년 만에 압축 성장을 이뤘다.


한편 한국은 사회 제도와 관료층, 정치인 등 공적 부문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사회다. "후진적 시스템을 뛰어넘은 영웅적 개인과 바짓가랑이만 붙잡는 적폐 집단"의 플롯이 사회 전 분야에서 작성되고 스포츠 종목도 마찬가지다. 은반 위에 김연아와 빙연이 있다면, 그라운드엔 박지성과 축협이 있고, 네트 아래엔 김연경과 배구 연맹이 있다.


예전에는 한국과 세계 축구의 기량을 비교할 기회나 잣대가 부족했다. 유럽리그 중계도 안 해주고 유튜브가 있어 스페셜 영상을 볼 것도 아니고. 4년마다 월드컵에서 붙는 게 끝이었으니. 한국 축구의 우수한 선수 몇몇이 실은 월드클래스라는 상상적 공감대가 '위태롭게' 형성됐었다. 왜 위태롭냐면 차붐과 허정무 정도를 빼곤 해외에서 실적을 낸 실례가 없었으니까. '알고 보면' 월드클래스인데 한국 구단들이 우물 안 개구리라 해외 진출을 못했다, 라는 영웅 서사. 최순호, 홍명보, 유상철, 안정환으로 이어지는 비운의 축구영웅 계보다. 바다 건너 찾아온 '파란 눈의 초인' 히딩크가 축협과 맞대어져 영웅시되는 것도 정확히 이 서사 구도에서다.


유벤투스와 바르샤에서 최순호, 유상철을 원했다, 한국 구단들이 안 놔줬다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오래전부터 떠돌았다. 해외 해설자가 세계 올스타전에 출전한 홍명보를 보고 "그라운드에 말디니가 두 명입니다!"했다는 무협지가 있거니와(실은 "저 선수가 수비 지휘를 하네요 말디니가 두 명인 가요?ㅎㅎ" 비아냥이었단 말도 있음). 오히려 요즘엔 이런 그라운드 전설이 씌어 지기 어렵다. 실력이 되면 얼마든지 유럽에 가고 실력이 투명하게 검증되니까. 안정환이 페루자 구단주의 인종차별만 아니었다면 빅 클럽에서 뛰었을 거라 믿는 사람이 많은데, 그 반대 포지션으로 욕먹는 박주영이 유럽에서나 대표 팀에서나 보여준 클래스가 더 높았다. 검증할 수 없는 과거의 전설이 검증 가능한 현재를 냉소하는 용도로 한층 미화된다.




글을 쓰다 보니, 지난주에 쓴 글과 상충돼 보일 수 있는 논조를 취했는데, 한국 축구와 한국 축구가 기반을 둔 한국 사회에 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선에서 다면적 소감을 끼적인 것뿐이다. 그때는 축구 협회를 중심으로 축구계 내부를 향해 이야기를 풀었다면, 지금은 사회 환경을 중심으로 반대 방향에서 이야기를 풀었다. 어찌 됐건 현재 대표 팀을 둘러싼 문제의 구심점이 축구 협회란 사실엔 재론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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