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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Sep 20. 2018

인간의 목숨, 동물의 목숨

대전 동물원 퓨마 사살 사건

대전 동물원 퓨마 사살 소식을 들었다. 퓨마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목소리를 비웃는 사람도 많다. 한 차례 포획 시도가 실패했고 시각이 야간이어서 사살은 정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인명 피해를 예방하려는 단호한 조치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동물의 목숨보다 무겁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이 동물의 목숨이라고 경쾌하게 지워버려도 괜찮다는 뜻은 될 수 없다. 사람만큼은 아닐지라도 다른 생명에도 무게가 있다. 퓨마는 사육사의 실수로 우리에서 풀려났다고 하는데, 사람의 잘못은 동물의 목숨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덮어버리면 사라지는가? 오히려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써보며 포획해서 데려오는 것이 잘못을 제대로 책임지는 방식 아닐까? 퓨마는 대형 고양잇과 동물 중 호전성이 덜 한 종족이라는 사실, 퓨마를 사살하던 순간 엽총이 아닌 마취총을 겨눌 여유는 없었을까라는 가정을 떠올리면, 과연 경찰 측이 다른 수단을 충분히 검토했는지 아쉬움이 든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보다 인지 능력이 우수한 종족이다. 이 사실을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식의 우열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지구를 운영하는 입지에 있는 인간이 자기 보전 능력이 떨어지는 다른 생물들에 일정 부분 책임을 가진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인간은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먹으며 살아간다. 다른 종족을 향한 이타심은 선택적으로 발휘되기 마련이다. 누군가 "퓨마 한 마리 죽이는 건 불쌍하고, 네가 주말마다 먹는 치킨을 위해 닭들이 떼죽음 당하는 건 괜찮으냐?" 되묻는다면 확실히 반론할 논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동물권 문제가 현실적으로 복잡하고, 타인이 나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추지 못했다고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해선 안 될 이유이지만, 저 일침이라고 올바른 건 아니다. 논리적으로 타당할 뿐 실천적으론 해로운 일침이라서 그렇다. 설령 모든 생물을 향해 이타심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생물에게도 이타심을 발휘하지 않는 것보다는 이롭다. 그리고 이 선택적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현실을 돌아보는 태도에, 내 곁의 생명을 함부로 때리지 않고 더 많은 종족을 향한 이타심을 계발하고 생태계를 보전하는 시발점이 걸려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말 못 하는 짐승이라는 '약자'를 대하는 한 인간의 의식세계를 알려주는 잣대이기도 하다. 설령 경찰의 판단이 온당했다고 해도, "한낱 동물 목숨에 호들갑이나 떠는 위선자들"이라 비웃으며 잇몸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추한 이유다.  그들은 문제의식을 갖추지 못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문제의식을 짓뭉개는 이들이므로. 


재작년에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인천 공항 활주로에 풀려난 개가 운항 안전을 위해 사살된 사건이다. 그때 쓴 글을 덧붙인다.




사람이 아닌 생물은 사람과 평등하지 않다고 주장할 사람이 많을 테고, 실제로 사람과 동물은 불평등하다. 인류라면 예외 없이 그 불평등에 의존해 살아간다. 먹고 자고 입는 모든 방면에서 그렇다. 그런데 공항 활주로에 풀려 난 개를 처리하는 방법이 죽여서 제거하는 것 밖에 없었을까. 많은 승객을 실은 비행기의 안전한 이착륙과 개 한 마리 목숨을 저울질하면 후자가 가볍다. 몇십 분 혹은 한 시간가량의 시간 지체와 비교하면 어떨까. 그 정도 시간 동안 공항직원들이 개를 몰아내고 유인하거나 견주를 불러와 붙잡는 게 불가능했을까? 공항 측 실수로 케이지에서 풀려났다고 하는데 그 정도 노력을 감수하는 게 불합리할까? 사람과 동물은 평등하지 않으니 개의 목숨은 인간의 편의와 신속하게 교환하면 그만인 것일까? 내 윤리적 직관으론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않다. 사살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야 한다. 동물과 사람이 평등하지 않다는 건 동물은 이유가 있으면 죽일 수 있지만 사람은 이유 불문하고 죽여선 안 된다는 정도의 차이일 텐데, 충분한 이유 없이 동물을 죽여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을까. 정육점에서 파는 고기 몇 근처럼 비닐봉지에 담은 반려견의 사체를 벼락같이 접했을 견주의 충격을 생각해도 마음이 쓰리다. 인천 공항은 그에게 마음의 상해를 가한 것이다.  


누군가는 반문할 것이다. 만약 반려견이 아니라 비둘기와 시궁쥐, 혹은 귀뚜라미라 해도 같은 상황에서 같은 기준으로 말하겠냐고.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애완용 동물이 아니라도 내키는 대로 죽여선 안 되겠지만, 강아지처럼 귀엽고 친근하지 않다면 심리적 저항이 훨씬 약할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사람이 아닌 것의 생명을 존중하자면서 사람과 닮았고 사람과 가까운 것의 목숨에 우선순위를 매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논리적으론 모순일지 모르겠으나 실천적 차원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진 모르겠다. 가능한 모든 생명을 존중하자는 윤리적 명제가 있고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대접할 순 없다는 현실적 압력이 있다면, 선별적으로나마 동물의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은 수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다. 위선이라고 못마땅해할 순 있겠지만, 여기서 위선을 비웃는 것에 어떤 윤리적 실천적 의미가 있는가. 모든 동물의 고통에 평등하게 가책을 느끼지 않는 거? 동물을 고민 없이 죽여도 된다고 믿는 사회의 밑바닥엔 동물을 넘어 생명에 대한 경시가 고여있다. 일단 인간의 경계를 한 치라도 벗어나 생명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 경계를 점점 확장하며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이다. 유기견을 가정에 맞아들인 사람들이 더 많은 종의 동물이 당하는 불행에 관심을 갖고, 가장 낮은 수준의 채식주의를 시작한 사람들이 더 높은 수준의 채식주의로 나아가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털 달린 동물의 가죽을 벗겨서 사치의 상징으로 걸치고 다니는 관습에 문제의식을 고취해 온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의 잣대를 벗어나 살아가기 힘들다. 그것이 그 잣대 안에서의 고민을 비웃거나 포기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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