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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Oct 08. 2018

인격의 도착

미야와키 사쿠라

<프로듀스 48>을 보면서 케이팝이 일본 아이돌 산업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빌려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시아 음악계의 대세는 케이팝이고, 제이팝은 갈라파고스가 되었으며, 일본 아이돌의 실력은 형편없다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트와이스 시대 이후 케이팝 아이돌 산업의 특징은 팬덤 시장의 강화와 팬덤과의 유사 인격적 소통, 아이돌의 캐릭터 상품화다. 이 모든 추세는 일본 아이돌 산업이 한 발 앞서 선보였다. AKB 그룹을 대표하는 총선 시스템은 오타쿠들 화력으로 승부가 나고, AKB의 슬로건 ‘만날 수 있는 아이돌’은 팬들과의 대면적 소통을 뜻한다. 팬들을 향해 여는 모바일 방송 ‘쇼룸’은 한국의 ‘브이 라이브’, 팬들과 만나 환담을 나누는 ‘악수회’는 ‘팬 사인회’와 대응한다. 앨범 구매자를 팬 사인회에 당첨시키는 한국 기획사들의 판촉 시스템 자체가 앨범 구매가 곧 악수회 티켓 구매인 AKB 시스템과 동일하다. 재작년 론칭돼 케이팝의 트렌드를 이룬 <프로듀스> 시리즈 역시 10년 전 시작된 AKB 총선거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새삼 깨달으며 생각보다 방송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한국 아이돌과 일본 아이돌은 같은 아이돌이지만 직종이 다르다. 한국 아이돌이 무대에 특화된 퍼포머라면, 일본 아이돌은 팬덤과의 소통을 전문으로 하는 엔터테이너다. 케이팝 산업은 과거에 구축된 트레이닝 시스템에 더해 팬덤의 역할이 증대되는 판세로 굴러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 아이돌이 품은 문화적 특성은 흥미로웠고, 그들만의 장점이 있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중 단연 인상적인 건 미야와키 사쿠라다.   


사쿠라는 AKB 그룹의 에이스이며, <프로듀스 48>의 주제곡 ‘내 꺼야’ 센터로 뽑히며 내정 논란을 불렀다. 이 점 만으로도 화제의 중심에 섰지만, 그런 외적 요소보다 눈길을 끄는 건 실로 풍부한 매력이다. 미야와키 사쿠라의 매력이 ‘갭 모에’, 의외성이라고들 한다. 사쿠라는 열도의 시가지에 핀 벚꽃 같은 용모로 등장했지만, 방송이 진행되며 덜렁대는 진면목이 탄로 났다. 도도해 보이지만 소탈한 행동, 의욕 넘치지만 어설픈 실력, 옷차림에 무관심한 성격, 얼굴을 함부로 굴리는 표정이 신선함과 친근함을 끌어냈다. 이처럼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 사쿠라의 매력이지만, 이것만으론 충분한 설명이 아니다. 사쿠라는 단순히 의외성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의외성의 요소가 굉장히 다양하고 그것들이 순환 관계를 이루며 캐릭터성을 계속해서 교체한다. 콧대 높은 미녀인 줄 알았는데 허당이라 재미있고, 그런가 하면 어느 틈에 분위기 있는 비주얼로 카메라를 바라 보고, 거기 넋 놓고 있자면 불현듯 푼수로 돌아가 있다. 게다가 그 외모 또한 가만히 보면 예쁘다는 형용을 벗어난 여백을 품고 있다. 이미지의 대칭점(팬들의 표현으로는 ‘미야와키상’과 ‘꾸라’)을 오가며 신선함과 익숙함을 끝없이 반복해서 선사하는 것이 사쿠라의 진가이고, 사쿠라는 자신이 가진 매력 요소를 의식하고 본능적으로 조율할 만큼 영리하다는 인상이 든다.      


사쿠라의 캐릭터는 캐릭터의 개념을 초과하는, 캐릭터라는 대상화된 개념이 온전히 수렴하지 못하는 이질적 요소로 구성돼있다. 미녀인데 친구 없는 '아싸'고, 아이돌이지만 밤새워 게임하는 오타쿠이고, 모델 같은 셀카를 게시하지만 몇 만 원짜리 백 팩과 샌들을 닳을 때까지 쓴다. 이것들 하나하나는 익히 정형화된 캐릭터이고, 그렇게 상충되는 요소들이 하나로 묶인 캐릭터 역시 낯설지 않다. ‘아재 같은 처자’ ‘공대생 미녀’ ‘미녀 오타쿠’가 그렇다. 하지만 사쿠라의 경우, 그것들이 만들어진 이미지를 넘어 몸에 붙은 성격이라고 확신케 하는 정황이 캐릭터를 파고들수록 속출하며 캐릭터 이상의 느낌을 주고, 유형화된 캐릭터성을 벗어나는 인격적 요소가 캐릭터와 충돌하는 동시에 공존한다. 이따금 선보이는 속 깊은 생각, 사회에 관한 진지한 발언, 강단 있는 줏대와 몸담은 현실에 관한 성찰이다.      


사쿠라는 글 솜씨가 좋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묻는 팬에게 “학교 공부는 스스로 원하는 목표를 세우고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의 연습”이라고 상담해줬고, 게임을 향한 편견엔 “우리는 당신이 다른 걸 하는 시간에 게임을 하는 것뿐이고 그것이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항의했다. 한 인터뷰에선 정치의 중요성을 말하며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일본 정치계 동향을 걱정했고, “사쿠라의 여자력은 어때?”라고 묻는 팬에게 “집안일은 여자라 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 인간력의 문제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의외라고 느껴질 만큼 솔직하게 마음을 열어 보일 때도 있다. 사쿠라는 항상 더 큰 스타가 되길 원하고 더 큰 기회를 얻길 바라는 야심가다. 하지만, AKB의 추락 세와 자신의 불투명한 장래에 자괴감을 토로하며 눈물지었고, 아이돌로서의 가능성을 억압하는 총선 시스템에 환멸감을 표한 적도 있다. 이건 성상품으로 대상화된다고만 여겨지는 일본 아이돌에 관한 통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소신 있고 자유로운 발언이다. 오히려 내가 사는 사회와 내가 품은 욕망과 슬픔을 말하는 한국 아이돌은 보기 힘들다.

  

사쿠라의 캐릭터는 한 인간의 외면과 내면, 의식과 감정,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꾸며진 부분과 꾸며지지 않은 부분의 총체이며, 그 중심에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주도하려는 주체성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계통으로 도상화된 캐릭터를 넘어선 ‘인격’이라 부를만한 유기체다. 사쿠라는 예쁘고 춤 잘 추는 아이돌이 아니라, 흥미롭고 복잡한 인격체로서 한국 아이돌 시장에 왔다. 예쁘지만 소박하고, 욕심 많지만 부족하고, 헐렁하지만 똑똑하고, 엉뚱하지만 진지하고, 오타쿠스럽지만 사회성을 갖춘, 이 모든 요소가 공존하는 것이 미야와키 사쿠라라는 사람이다. 때문에 그에게 관심을 두게 된 사람들이 알아갈수록 매력을 느끼고 인간적 호감을 품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쿠라는 한국 시청자들만 투표에 참여한 <프로듀스 48>에서 가장 강력한 팬덤을 규합했다.   

   

이건 근본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시스템 차이에서 비롯한다. 한국 아이돌이 하나부터 열까지 기획사가 관리하는 전문 인력이라면, 일본 아이돌은 트레이닝도 매니지먼트도 받지 못한 채 각개 약진하는 자영업자다. 일본 아이돌 산업은 자국의 게임, 코믹스 산업처럼 대상을 향한 수집 욕구와 애착 감정에 절은 오타쿠를 소비자로 삼는 캐릭터 산업이다. 나뭇잎 마을, 포켓몬 월드와 같은 수백 명의 멤버로 구성된 아이돌 월드가 있고, 거기 던져진 아이돌 개개인은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캐릭터로 구성해 판촉활동을 한다. 때문에 기획사가 정해준 유형화된 캐릭터(‘맏내’ ‘실세’ ‘걸 크러쉬’)가 전부인 한국 아이돌에 비해 훨씬 다채로운 캐릭터와 서사, 관계성을 구축한다(직업 활동에서 공과 사의 경계를 무너트릴 수 있다는 점에서 퍼스낼리티의 상품화는 위험요소 또한 있다). AKB 팬덤이 약소한 한국에서 제작된 방송에서, 연고도 없고 실력도 없는 일본 연습생들이 한국 연습생들을 앞서는 코어 팬덤을 얻게 된 이유였다. 물론 그들은 문화적 차이로 인해 한국에서 보기 힘든 캐릭터라 희소가치가 있었고, 이미 데뷔한 연예인이기에 그간 활동한 전사가 마련돼 있다는 유리함도 있었다. 사쿠라는 이런 바탕 위에서 개인의 역량으로 새로운 아이돌의 전형을 보여줬다.      


한국에는 퍼스낼리티를 드러내며 활동하는 아이돌이 적다. 기획사의 매니지먼트 체계가 느슨하던 00년대엔 그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관능미의 아이콘이면서 사적인 치부도 서슴지 않고 뱉는 이효리였다. 매니지먼트 체계가 고도화된 10년대에 들어선 아이돌의 SNS 활동과 개인적 발언이 엄격하게 통제됐다. 10년대 중반 이후엔 소셜 미디어를 통한 개인 방송이 본격화되고 팬덤과의 접촉이 증대되면서 아이돌 산업의 추세가 바뀌었고, 한 방향에서 연출되는 사적 소통의 환상과 캐릭터성을 팔고 있다. 한편 여성 아이돌 중엔 팬미팅과 인터뷰에서의 토막 발언, 인스타그램 ‘좋아요’를 누르는 등의 파편적 형식으로나마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 문제를 우회적으로 발언하는 케이스가 조금씩 늘고 있다. 사쿠라는 이런 과도기에 한국에 도착한 ‘외래종’이다. 자신의 활동을 직접 기획하며 활달하게 자신을 표현하던 그가 꽉 짜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에서 어떤 모험을 하고 어떻게 진화할지는 흥미로울뿐더러 더 큰 시사점을 줄 수 있는 포인트다.     


그간 한국 여성 연예인들은 여성향 콘텐츠의 부족으로 몇 가지 대상화된 역할만 얻을 수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여성이 중심에 서는 콘텐츠, 새로운 여성상의 필요성이 주창되고 있지만, 제약된 역할로부터 맞은편에 있는 자리로 탈주하는 방식으로 실천되며 역할의 폭이 반대로 한정될 수 있다는 함정이 있다. 사쿠라는 이 점에서 한국 대중문화계 여성 캐릭터에 다양성을 더해 줄 수 있다. 좋아하는 취미에 몰두하고, 벼락 인기에 들떠 자랑도 하고, 세상의 큰 문제를 말하기도 하며, '걸 크러쉬'를 해보고 싶다는 시시콜콜한 집착도 부리고, 장래를 향한 야심과 고민이 있으며, 서툴러서 실패도 한다.  ‘여신’도 ‘여동생’도 ‘센 언니’도 ‘여전사’도 아닌, 어떠한 잣대 없이 스스로 세상을 느끼며 살아 생동하는 인격체다. 여성들에게 ‘롤모델’이나 ‘워너비’가 돼 줄 수는 없지만, 나보다 부족해서 귀엽기도 하고 나보다 잘 나서 대견하기도 한, 나와 같은 세상에서 지지고 볶는 친구 같은 존재다. 이 점이 사쿠라가 자신과 같은 또래의 일이십 대 여성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이유일 것 같다. 어쩌면 한국 문화계에 부족했던 건 이처럼 온전하고 풍부한 인격으로서의 여성이었을지 모른다.      


AKB48은 구매력을 지닌 중노년 독거남들의 놀이터로 전락했다. 일본은 여성을 성 상품화하는 악습이 강한 나라일뿐더러, AKB 멤버들은 늙은 남성들의 수요에 맞춰 스스로를 상품화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쁜 구조 안에 있다고 해서, 거기서 살아가는 이들의 존엄까지 부정당할 수는 없다. 구조를 벗어나 주체로 설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 구조를 헤쳐 가기 위해 품는 결의는 그 자체로 주체성을 구성할 수 있고 때론 구조의 성격과 배치되는 긍정성을 빚어낼 수도 있다. 가령 <프로듀스 48>에서 최종 합격한 혼다 히토미처럼 “올 해는 승부의 해다. 난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으니 도와 달라.”라고 팬들에게 요청하는 수준의 능동성을 재현하는 여성 캐릭터를 한국 문화 산업에서 별로 본 기억이 없다. 마찬가지로, 시스템 안 편에 있으면서도 시스템을 반성적으로 내려다보며 문제의식을 가질 수도 있다. 구조에 대한 진정한 성찰은 구조의 영향력을 인지하면서도 개인이 품는 가능성을 긍정하고 구조와 개인 사이 되먹임을 정밀하게 관찰하는 데 달려있다. 개인을 곧 구조와 동일시하는 이분법은 오히려 구조의 작용에 관한 더 이상의 사유를 포기하는 도식적 통념이다.     


케이팝과 레드벨벳의 아이린을 좋아하는 사람. 일본의 아이돌로 자라왔지만, 그 안에서의 한계와 부조리에 번민하다 인생을 바꾸기 위해 동경하던 케이팝의 나라에 온 아이돌. 미야와키 사쿠라가 도전하는 아이돌 인생 2막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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