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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Sep 12. 2018

유령이 된 경쟁사회

오디션 방송의 이데올로기

엠넷의 아이돌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듀스> 시리즈의 세 번째 시즌, <프로듀스48>이 지난 달 종영되었다. 국민 프로듀서 대표를 맡은 이승기는 실의에 빠져 우는 연습생들에게 두 차례 조언을 건넨다. 실력으로 소화할 수 없는 경연곡 ‘붐바야’를 배정받은 붐바야 2조, 순위가 추락해 탈락에 처한 연습생 고토 모에에게 이승기는 이렇게 말한다.


“내 경험상, 하려고 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 마음이 보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때문에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후반 10분까지 3:0으로 지고 있는 축구 경기가 있다고 해요. 여러분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뛰는 경기를 보고 싶잖아요. '거친 파도가 노련한 뱃사공을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끝까지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럽고 명석한 억양으로, 나름의 화술을 구사한 조언이지만, 요점을 추리면 결국 이 말이다. 답이 없으니 ‘노오력’하는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언젠가 김무성이 아르바이트 노동자 처우에 베푼 ‘조언’과 닮았다. “인생의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지, 방법이 없어요.” 그럴 것이다. 둘 다 시스템을 바꿀 권한이 없거나 의사가 없는 사람들이 시스템을 긍정하며 그 내부에서 한 훈시니까. 이승기는 실력이 부족한 팀에게 연습 시간을 늘려 주자거나, 경연 곡을 난이도가 낮은 곡으로 바꿔주자는 말을 할 수 없었고 하지 않았다. 유리하든 불리하든, 아니 실력이 낮고 인기가 없을수록 페널티를 주고, 알아서 상황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방송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존의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는 사회에서는 그 어떤 골똘하고 진심어린 조언도 “열심히 해라”로 귀결된다. 경쟁으로 구축된 시스템 자체를 손질하는 대안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력이 강조되는 사회일수록, 대안적 상상력을 억압하는 상투성이 지배하는 사회다. 상투적 교시가 수사법만 바뀌며 금과옥조로 전수된다. 이미 노력이란 답을 알고 있지만 노력할 전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기운을 짜내는 격려로 전달되며 상투성에 감응하게 한다. 사람들 마음속에서 노력은 삶에 대한 최종적 해답으로 내면화된다.


그래서 노력의 기만성을 마음껏 비웃으면 되는가? 방송에서, 정말로 아이러니한 대목은 따로 있었다. 저 상투적 미사여구로 범벅된 말이 자기 예언적 결과를 낳고 말았다. 붐바야 무대의 퀄리티는 턱없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컬트적 인기를 불렀다. 해당 조는 경연에서 승리했고, 직캠 조회 수가 백만까지 솟았다. 조원들 개인은 팬덤을 거느리게 됐으며 그 중 한 명은 데뷔에 성공했다. 반드시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하려고 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 마음이 보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광경이 실현되었다. 이것이 노력의 가치가 승인되고 추종되는 메커니즘이다. 모든 노력이 성공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성공한다. 그걸 지켜 본 더 많은 사람이 희망의 가닥을 붙잡고 몸과 마음을 바친다. 이런 선순환이 있어야 각자도생으로 운영되는 경쟁사회는 존속할 수 있다. 그 가학성에도 불구하고 오디션 프로들이 구름 같은 참가자를 불러들이는 이유가 그렇다. 오디션에서 우승하면 가수로 데뷔하거나 몸 값을 높일 수 있고, 우승은 못해도 유명해질 수 있다. 트레이너의 모욕과 ‘악마의 편집’에 당해도 자신을 알릴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보상을 얻는 대가로 무언가를 희생하는 기브앤테이크가 노력의 정수이다. 물론 이를 미끼로 가혹한 방송 연출과 인권을 때리는 가학성이 정당화되고, 시청자들 가치관과 해로운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


문제는 방송보다 현실이 나쁘다는 사실이다. 오디션 프로 또한 공정하지 않다. 제작진이 점 찍은 대로 참가자 마다 서사와 분량 배정에 차이가 나고, 이는 출발점을 다르게 만든다. 하지만 경쟁을 통해 이익이 배당되는 보상 구조가 거기엔 있다. 현실에선 그것이 고장 났다. 경제 성장률이 정체되어 파이가 줄었고, 대졸자에게 주어지는 양질의 일자리도 줄었으며, 고용 안정성이 해체됐고, 고용 시장에서 학력에 따라 얻는 대학 프리미엄도 약화되었다. 경쟁에서 승리해도 보상이 불투명한 사회가 되었다. 보상이 적고 잠정적이기에 경쟁이 끝나면 다시 새로운 경쟁에 뛰어드는 평생 입시사회가 펼쳐졌다. “노력하면 답이 나온다”는 말을 기만으로 만드는 것은 저 말 자체의 상투성이 아니라 노력을 퍼부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 현실이다. 이런 판국에 오디션 프로그램이 신자유주의 경쟁 질서를 전파한다는, <슈퍼스타 K> 시절 문화비평은 공자 왈 맹자 왈이다. 현재 오디션 프로가 사회에 미치는 효과의 핵심은 이거다. 나쁜 프로그램이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을 넘어 나쁜 사회와 분립된 해방구로 기능한다.


<프로듀스48>은 이전 시즌에 비해 유독 ‘흙수저픽’이 많았다. 미야자키 미호, 타케우치 미유, 이가은, 권은비, 이채연이 그랬다. 이채연을 뺀 나머지는 이십대 중반에 이르렀고, 오랜 연습생 기간을 거쳤거나 데뷔했었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이채연 역시 과거 오디션 프로에서 탈락했고, 실력은 있으되 평범한 외모가 핸디캡이다. 이들은 모두 최종 순위 발표식까지 데뷔조에 드는 높은 순위를 기록했고, 끈끈한 팬덤의 화력을 등에 업었다. 어떤 방송이든 이런 참가자가 한두 명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데뷔 인원 열두 명의 과반수를 점한 건 특이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이번 시즌을 대표하는 시대정신이 있었다. 현실에서 내 삶이 보답을 얻을 가능성이 없으니까, 날 닮은 누군가가 성공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던 것 아닐까? 팬덤 별로 금품 살포까지 불사하며 과열된 이번 시즌 투표 양상엔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 같다. 


한국 사회에 오디션 프로가 도래한지 십 년이 됐다. 재미있게도 오디션 프로는 경쟁을 통한 사회이동이 활발하던 시기가 아니라, 그 시기가 다 끝나고 사회이동이 정체된 시대에 왔다. <슈퍼스타 K>는 당신이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선전하는 대국민 오디션이었다. 이제 아마추어만을 대상으로 열리는 오디션 방송은 없다. 프로 래퍼, 아이돌 기획사 연습생 같은 특수 계층이 참가하는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밤하늘에선 노력과 성공의 환상이 재생된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신진대사가 정지된 경쟁사회의 유령처럼 미디어를 배회한다. 나이 든 시청자는 나이 많은 아이돌 지망생에게 한을 퍼부으며 대리만족을 풀고, 어린 시청자는 '바닥에서 정상으로' 가는 래퍼의 꿈을 쫒아 사회적 예외구역으로 도피한다. 누군가는 오디션 참가자들을 죽이고 살리는 여론 권력을 게임 플레이하듯 즐기며 경쟁 제도의 권력자가 된 착각에 젖을 것이다. 가령 오디션 프로가 롱런한 지난 십 년이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심화된 십 년과 정확히 일치하는 건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구구한 추론에 앞서 말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다른 고민할 필요 없이 노력을 하면 답이 나오는 단순하고 명료한 상투성을 그리워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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