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영화배우 정우성은 이런 발언을 했다. 난민 문제에 관한 악성 댓글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패턴 안에서 움직이는 것 같”으며 ”작전 세력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그들만 밝혀내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라고. 나는 예멘 난민을 변호하는 그의 행동이 올바르다고 지지한다. 하지만 이 말은 이상했다. 난민을 향해 인종주의적 거부감을 토하는 건 특정 세력의 치우친 사상이라기보다 한국인의 보편적 여론에 가깝지 않을까. 게다가 이 말은 “공작의 관점에서”를 운운하던, 그가 요즘 친해졌다고 하는 음모론의 대가의 말버릇과 닮았다.
음모는 물밑에서 모략을 꾸민다는 말이다. 음모론의 밑변은 진영논리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로 그어진 진영이 있을 때 그 너머를 겨냥하는 모략이 성립한다. 역사적으로 저명한 음모론들은 반유대주의, 매카시즘 같이 명백한 적대 구도 위에 있거나, 달 착륙 음모론, 911 음모론처럼 세계를 혹은 비극을 기획한 ‘그들’이 있다고 폭로한다. 다만, 음모론이 무지몽매한 반지성주의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는 음모론적 사관이 알 수 없는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발로라 평하면서도 민중의 지적 능력이 낮아 세상을 단순화하는 음모론에 이끌린다고 말했지만, 다 같이 들고일어나 ‘목을 칠’ 과녁이 알기 쉽게 마련되지 않는다면 혁명 같은 사건은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전상진이 ‘음모론의 시대’에서 적었듯 음모론에는 저항적 성격 역시 있다. 박권일은 음모론을 그저 “몰이성과 비합리와 광기의 병리적 표출”로 치부해버릴 순 없다고 말한 적 있는데, 음모론은 공인된 지식에 대항해 세계를 해명하는 다른 버전의 지식을 추구하려는 열정이기도 하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자명한 현실을 부정하려는 충동이기도 하기에 합리적 지성일 수도 없겠지만. 적대 구도와 공인된 지식의 전선 안과 밖으로 구성되는 음모론은 집단적 폐쇄성을 강화한다. 그것이 종종 집단 외부를 향한 공포를 내부로 투사해 동일자를 단결시키고 타자를 솎아내는 데 쓰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진영논리는 음모론의 토양이고, 음모론은 진영논리의 먹이다.
한국에서 음모론이 본격적으로 부상한 건 2000년대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누군가의 가설이 광대역으로 퍼지고 가설을 접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감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황우석 사태, 디워 논쟁, 광우병 쇠고기, 타진요 논란, 천안함 폭침설이 줄지었다. 이 음모론들은 낡은 시대와 새 시대를 아우르는 한국 사회 적대 구도를 반영했다. 민족주의와 반미 감정, 인터넷 대중과 지식인 엘리트, 검은 머리 외국인을 향한 증오심, 10년 만에 복권한 보수 정권을 향한 불신. 이때까지 음모론은 사건이자 내러티브였다. 개별 음모론이 연도 단위의 텀을 두고 나타났고, 하나의 가설로서 잡다한 논리와 팩트, 이야기 구조로 엮여있었다. 고로, 음모론자들이 제기하는 주장과 사실관계의 진위를 논하고 타파하는 반성적 거리감을 갖출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또한 정치적 진영논리가 지금만큼 공고하게 퍼져있지는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 세대는 보수 정당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진영 또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을 들었으니. 음모론들은 시일이 흐르며 하나씩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음모론에 혹했던 사람들은 짐짓 더욱 크게 비웃으며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도 했을 것이다.
2010년대 들어 음모론은 내러티브에서 애티튜드로 바뀌어갔다. 의회 의석이 적었던 민주당은 장외 정치로 시민들을 동원했고, 정권 교체의 지고한 깃발 아래 진영 구도가 고착되었다. 스마트폰 보급과 함께 사람들은 밥 먹고 걸어 다니고 잠자리에 눕는 삶의 모든 시간에 가십에 노출되었다. 정치 팟캐스트가 등장했고 ‘나꼼수’는 귀가하는 사람들 귓구멍에 ‘가카’의 ‘눈 찢어진 아이’를 퍼트렸다. 음모론의 콘텐츠를 제작하고 퍼트리는 이데올로그, 김어준과 주진우는 영웅이 되었다. 음모론은 세상을 이해하고 사회에 참여하는 태도가 되었고, 그것을 검증할 수 있는 반성적 거리감은 매립되기 시작했다. “진짜 적을 앞두고 내무반에 총질하지 말라”는 말이 거의 유행어가 되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내무반 총질’이 격발 되기도 하는 과도기였다. 김어준과 그 도당은 무리한 발언 등으로 논란에 휘말려 인기가 추락했다. 그러나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이 일패도지하며 정권교체가 절체절명의 과제가 된 박근혜 정권 이후엔 야권 진영의 폐쇄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재작년 터진 박근혜 게이트는 이 흐름에 결정타를 먹였다.
최순실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부리며 국가 대소사를 관장했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 폭로됐다. 압도적인 스펙터클의 진실, 허구보다 허구 같은 진실. 그 아무리 허황한 가설이라도 심리적 거부감을 없애고 이치를 따지는 반론을 외면하게 하는 지렛대가 설치됐다. “그게 말이 되냐?” “왜 안 돼? 최순실 게이트는 말이 돼서 일어났냐?” 이 사건은 주권 농단이라는 형식적 차원을 떠나 사회심리적 차원에서 현실과 서사를 자리바꿈 하는 심층적 변화를 일으킨 공전의 사건이다. 정치권의 장막을 들추는 누아르 영화들은 그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과 경쟁해야 했으며, 사람들이 볼거리로 넘기던 영화 속 장면과 설정들이 현실과 빼다박았다고 밝혀지며 소름을 자아냈다. 관객과 군중은 물론, 사회비평가, 영화 비평가들은 이 영화들에 현실의 비의가 담겨있는 것처럼 경악하고 격찬했다. 리얼리즘은 현실의 복사가 아니라 현실을 이루는 원리에 관한 탐구라는 관점은 추방당한 지 오래다.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인터넷에선 노무현 사망 이후 문재인 당선까지의 사건이 담긴 사진들이 누아르 무비 톤의 게시물로 엮여 열광을 부르며 공유되었다. 세상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복수라는 내러티브로 구성된 서사 자체가 되었다.
문재인 집권 이후 한국 사회는 구조의 일각이 재편되었다. 짧게는 십 년, 길게는 해방 이후 사회를 지배하던 민주화 대 산업화의 진영 구도가 종식되었다. 박근혜 게이트 이후 우파 세력의 헤게모니가 궤멸되고 지지율이 주변화된 것이다. 적대 구도는 소실되어 가지만, 정권 교체의 성전이 벌어진 십 년 동안 담론장에 기입된 진영논리, 음모론의 애티튜드는 남아있다. 새누리라는 거악이 퇴락하자, 사회엔 젠더 갈등이라는 새로운 갈등축이 세워졌고, 적대 구도가 분화되는 동시에 진영 내부로 향했다. ‘기레기’라는 악의 축이 호명됐고, 안희정과 이재명 같은 비문 차기 대권 후보를 향해 학습된 진영논리가 어금니를 박았다. 이런 전선의 난립 속에 인터넷 당원은 여당의 당권에 마저 개입하는 정치 세력이 되었고, 언론의 의제 설정 기능은 도태되어 국민 청원과 인터넷 커뮤니티, SNS를 통해 인터넷 여론이 의제를 직접 세팅하는, 만인 대 만인의 여론전 시대가 왔다.
국민 청원 주소를 뿌리고, 포털 사이트 댓글 좌표를 뿌리고, 댓글 숫자와 리트윗 숫자, 청원 서명인 숫자를 채우는 화력을 동원한다. 여론전과 화력 동원은 정치 행위는 물론 각종 사회 이슈, 심지어 아이돌 팬덤을 아우르는 사회적 소통 행위의 전 방위를 지배한다. 이것은 물론 정치권을 아울러, 사회 참여적 행위가 ‘우리’의 대의를 표상하는 우상을 지목하고 그를 지원하는 혹은 그에게 지갑을 열어 주는 팬덤-소비자 문화로 바뀐 것과 유관할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인터넷 커뮤니티의 폐쇄성은 지옥으로 굴러 떨어졌다. 베스트 게시판에는 ‘성대결’과 정치권 정파 대결을 선동하고 정권을 비판하는 언론 기사를 효수하며 화력을 징병하는 게시물이 난무하고, 여기에 대한 이견은 조직적으로 확립된 매뉴얼로 척살당한다. 이런 폐쇄성이 낳은 공용어가 바로 “작전세력”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표현을 조사해보면 틀림없이 “오늘따라 게시판에 알바들이 설치네요” “가입일과 지난 게시물을 보니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알겠네요” 정도일 것이다.
세상은 피아식별로만 구분되며, 우리의 정당성을 훼손하려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틀림없이 존재하는 여론 조작 세력이 있다는 것. 이 세계관 속에서 논쟁은 상대의 순수성, 소속 진영을 의심하는 댓글 하나로 일축되고, 내 주장의 정당함 또한 상대를 불신하는 것으로 획득된다. 이 모든 음모론의 애티튜드는 인터넷이 사회 여론이 조직되는 유일한 담론장이 돼 실제로 여론 조작이 성행하는 환경, 그것을 전문으로 수행하는 ‘브로커’까지 구속된 현실이 지지하고 강화해준다. 이것은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습속이고, 진위 여부를 따져볼 내러티브가 존재하지 않는 심리적 경향이기에 논파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음모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비판이 현실의 비현실성에 의해 기각되는 시대, 공인된 앎으로부터 다른 버전의 앎을 추구하는 음모론이 아니라 ‘작전세력의 총질’이라는 공인된 앎을 사수하기 위해 다른 버전의 앎을 거부하는 음모론의 시대, 음모론을 계도할 사회적 자산이 사라졌으며, 음모론 이외의 다른 사회 참여적 행위 양식이 사라지는 시대. 다시 말해, 음모론의 바깥 지대가 지워진 시대. 이것이 바로 포스트 음모론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