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작가 김용 작고
'천룡팔부', '소오강호'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등을 쓴 중국의 무협 작가 김용이 작고했다. 김용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저 이름들은 들어봤을 것이다. 우리 나이로 95세였으니 천수를 채운 셈이다. 그가 쓴 소설에 나오는 백발의 무림 태두들만큼 오래 살았다. 나에게 김용이 쓴 소설이 훌륭한지 평가할 문학적 감식안은 없다. 다만, 많은 사람처럼 어린 나이에 그의 소설에 빠져든 독자로서 말하자면, 그후로도 그만큼 재미있는 소설은 읽은 적이 없다. 그의 소설은 한국 무협지처럼 허황하지 않았다. 산과 강을 뒤엎는 초식도, 열 갑자가 넘는 내공도 없다. 김용의 무협지에선 손에 잡히는 인물들이 손에 잡힐 만한 상상력의 비약과 함께 완결된 세계를 이뤘다. 개별적으로 발행된 작품들이 연대기적으로 연결되며 하나의 역사를 이룬다는 사실이 또한 독자의 상상력을 북돋는 점이었다. 무협지는 늙음의 판타지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두뇌가 느려지고 근력이 쇠하지만, 무협지에선 나이가 들수록 강해진다. 세월에 따라 쌓이는 내공 때문이다. 김용은 내공의 존재를 입증한 작가였을까? 노년에 이르러 작품을 개정하면 할수록 이야기가 재미없어졌다는 점에서 그렇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무협지의 신필 또한 무협지가 디딘 허구성의 밑바닥을 감추지는 못한 셈이다. 아무려면 어떨까. 한 명의 작가가 쓴 십 수 편의 장르 소설이 저마다 고전의 지위에 오르고, 국적과 나이를 불문한 무수한 독자에게 이야기가 줄 수 있는 가슴 벅찬 느낌을 가르쳐 준 것은 놀라운 신공임에 틀림없다. 그가 빚어낸 무림 비급으로 치면 독고구검이나 구음신공 쯤 될까? 거듭되는 원작의 열화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가 그의 말년의 말년까지 새 작품을 집필해주길 고대했던 이유일 것이다. 김용의 소설에 관해선 예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다. 조만간 쓸 생각이다. 지금은 오래 전 트위터에 남겼던 쪽 글을 옮겨 붙인다.
김용 소설의 인물 유형은 '대협'과 '소인'이다. 이 둘이 끝과 끝에 있고, 나머지는 그 사이에서 스펙트럼을 이룬다. 대협은 무공이 뛰어나고 사적 욕망이 아닌 공적 대의를 위해 산다. 소인은 무공도 보잘 것 없고 사욕을 쫓는 약삭 빠른 인물이다. 대협의 전형은 곽정이고, 소인의 전형은 위소보다. 소봉은 곽정의 세익스피어적 버전이고, 양과는 소인에서 대협으로 성장한다. 즉 어린 시절엔 위소보였다가 불혹에 이르러 소봉이 된다. 영호충은 이 스펙트럼의 중간에 있다. 방탕하되 의협심이 신실하다. 이들은 제각각 매력적이지만 제각각 안타깝다. 대협은 강하고 순결하지만 공과 사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억압하고 소멸시키는 방식으로 공사의 갈등을 해소하거나 둘 중 하나에 흡수된다. 소봉은 자신을 키워준 송나라와 핏줄을 내려 준 거란국을 양자택일 해야 하는 기로에서 자결했고, 곽정은 원나라 군대를 막지 못하자 양양성에서 순국했으며, 양과는 무림의 영욕을 등지고 신조와 함께 사라진다. 반면, 소인은 일신의 안위를 도모하며 상황 상황을 영악하게 헤쳐간다. 그만큼 무협지 주인공의 재현 관습에서 일탈한 인물이기에 낯설고 얄밉다. 이렇든 반장르적 인물을 장르 서사에 세워 장르를 재구축한 점이 김용 소설(녹정기)의 특별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