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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Feb 05. 2019

연출가형 아이돌의 탄생

아이즈원, 미야와키 사쿠라

2013년 열다섯 살 미야와키 사쿠라는 긴 머리를 서걱 잘라냈다. 이후 단발에서 어깨까지 닿는 기장을 오가는 헤어스타일은 지금까지 고수되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이 변신은 신체 성장과 후배들 입단으로 이미지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같은 그룹 HKT48 선배 사시하라 리노와 상담을 하며 결정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이 대목이다. 연예인이 스타일링 콘셉트를 바꾸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결정이 멤버들 사이 의견 교환으로 이뤄지는 법이 없다. 그룹 색깔과 활동 노선에 따라 기획사 스태프들이 의논하고 결정해준다. 만약 한국에서 아이돌 멤버들끼리 뚝딱 스타일링 콘셉트를 짰다면 그들이 기획사 소관을 넘어설 만큼 커다란 스타가 되었다는 뜻이거나 반대로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무너진 증거로 통할 것 같다.                




아이돌이 어떤 연예인이냐는 물음에 막상 답하려면 성가시다. 가수, 연기자처럼 별개의 임무가 있는 직종이라기보다, 관습적으로 형성된 가수의 하위 직군으로 통하고 때론 직종을 넘어 막연한 개념, ‘우상’으로 회자된다. 사람들이 말하는 아이돌은 저 둘 사이에서 얼마간 부유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이 어린 팬들이 열광하는 나이 어린 그룹 가수, 이 정도가 사람들이 떠올리는 아이돌의 모습일 텐데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따져보면 반례가 많다. 언젠가부터 30대 이상 계층이 아이돌 팬덤 구성원이 됐다.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에 이른 아이돌도 있거나 있었으며 그룹을 재결성한 마흔 줄에 이른 왕년의 아이돌도 흔해졌다. 그룹 활동과 솔로 활동을 병행하는 케이스, 아예 솔로 가수로 활동하지만 아이돌로 분류되는 가수들도 있다. 아이돌의 정의는 물렁물렁하고 아직도 변형되고 확장되는 면이 있다. 다만, 한국형 아이돌, 케이팝 아이돌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지반은 무대 위 퍼포먼스와 활동 사항 전반을 통제받는 기획형 가수다. 바로 이 기획 상품, ‘만들어진 가수’라는 사실이 아이돌의 정체성에 그어진 전선이다. 기획사 시스템의 물적 토대와 일치하는 외연이면서, 아이돌은 인형이라고 폄훼하는 아이돌 산업 바깥의 아이돌에 대한 규정이며, 산업 내부자들이 극복하기 위해 인정투쟁을 벌여온 대상이다.      


케이팝 아이돌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퍼포먼스형 아이돌이다. 춤과 노래를 병행하고, 고도의 합을 맞춘 군무를 추는 기능적 특성이다. 트레이닝 시스템을 확립해 연습생을 키워내는 기획사 시스템의 산물로 케이팝 아이돌을 아우르는 정체성이다. 아이돌 이전에도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댄스 가수는 있었다. 다만, 당시 가요계는 지금 같은 기획사 체제가 아니라 가수들이 음반사에 소속되는 체제였고, 프로듀싱과 매니지먼트가 훨씬 느슨했다. 90년대 아이돌 문화의 효시로 추존되는 서태지와 아이들은 신드롬에 가까운 팬덤을 몰고 다녔지만 ‘만들어진 가수’가 아니라 (미국에서 음악 장르를 수입해서) 문화계 트렌드를 창조하는 존재였다. 동 시기 활동한 듀스 역시 노래와 안무, 패션까지 직접 고안하는 ‘댄스 음악 싱어송라이터’였다. 나머지는 구체적 팬덤 기반 없이 대중을 상대로 활동했고, 남녀 혼성 그룹이 주를 이루는 등 아이돌에 이를 만한 시장이 분화되지 않았다.


이후 H.O.T와 젝스키스, 핑클, S.E.S 등 어린 학생들을 캐스팅해 기획사가 모든 사항을 준비하는 아이돌 원류가 나타났다. 이들은 십 대들의 열광을 부른 한편 가수의 자질을 향한 비난과 부딪혔다. 90년대와 00년대 초반 가요무대에선 립싱크가 통용되었는데, 이를 향해 조성된 사회적 비판은 아이돌을 과녁 삼았다. 이 비판을 넘어 라이브를 소화하는 퍼포먼스 능력을 갖추는 것이 기획사들의 한 목표가 되었다. 트레이닝 시스템이 발달했고 연습생 기간이 길어지는 등 오늘날 기획사 체제의 하부 구조가 갖춰졌다. 00년대 중반 활동하고 데뷔한 아이돌, 좀 더 멀리 잡으면 보아를 포함해 동방신기, 빅뱅이 이 흐름이 낳은 성과다.


아이돌 산업의 인정 투쟁이 파생한 또 다른 유형은 아티스트형 아이돌이다. 퍼포먼스형 아이돌이 “아이돌은 실력이 없다”는 외부의 잣대에 대응한 결론이라면, 아티스트형 아이돌은 “아이돌은 만들어진 가수”에 내놓은 대답이었다. 자신의 노래를 작사 작곡하며 프로듀싱에 참여하는 케이스다. 이 또한 기원은 멀다. 아이돌 문화의 원형을 제시한 서태지가 싱어송라이터였고, 기획사 SM은 서태지의 향수를 쫓아 H.O.T 멤버들이 가사를 작사했다고 홍보했었다. 그리고 10년 후 아티스트 콘셉트를 전면에 걸고 등장한 것이 빅뱅의 지드래곤이다. 지드래곤의 아티스트 여정은 부침의 연속이었다.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노래가 거듭 메가 히트했지만, 종종 표절 논란에 휘말렸고, 포털 사이트 댓글 작성자들의 비웃음을 샀다. 지드래곤은 고행 끝에 히트곡 히스토리를 내리 쓰는 데 성공했다. 장르 음악 뮤지션들이 실력을 인정하는 코멘트를 주기도 했으며, 제2의 서태지라 부를 만한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아이돌 중의 아이돌, 혹은 아이돌을 넘어선 아이돌. 이것이 ‘만들어진 아이돌’이 아닌 ‘스스로 만드는 아이돌’ 지드래곤이 획득한 상징 자본이며, 그는 그러한 자의식을 전시하길 마다하지 않았다(“(엑소와 샤이니와) 다른 차별점은 저희가 저희 노래를 만든다는 점 (...) (엑소와 샤이니 팬들이) 화낼 순 있는데요.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을 거 같아요.”, 2016년 JTBC 뉴스룸 인터뷰). 이후 아티스트형 아이돌은 캐릭터 타입으로 보급되었고, 재미있게도 ‘진짜 아이돌’과 ‘탈 아이돌’의 모순된 방향을 동시에 가리키는 트로피로 구실한다. 솔로 아이돌로 데뷔한 아이유가 2012년 2집 ‘Last Fantasy’ 이후 아티스트 노선으로 선회하며 밟은 루트 또한 선대 예술가들의 뮤즈와 인디 가수 무드 걸치기, 작사 참여 지분 확장이었다. 2015년 ‘제제’ 논란은 팽창하는 예술가로서의 자기규정이 실제로 준비된 예술적 세계 인식을 초월하여 발생한 스캔들이었다.      


아이돌의 유형을 두 가지 더 추리면 엔터테이너형 아이돌과 캐릭터형 아이돌이 있다. 둘은 퍼포먼스형 아이돌 및 아티스트형 아이돌과 병렬하는 자리에 있다. 엔터테이너형은 무대 바깥에서 각종 방송에 출연하고 연기자로 데뷔해 개인 활동을 하는 케이스다. 00년대 후반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이후 아이돌 산업이 재 부흥하면서 이 유형이 양산되고 정립됐다. 말솜씨와 유머감각이 좋아 예능 프로에 출연하는 멤버가 그룹 별로 생겼고, 비주얼이 좋아 센터를 맡는 멤버는 드라마와 CF에 출연했다. 이 유형이 가장 각광받은 건 2010년대 중반이다. 수지, 설현, 혜리가 미스에이와 AOA, 걸스데이를 대표하며 주가를 올려 ‘걸그룹 트로이카’ 같은 이름으로 회자되었다.      


10년대 중반 이후 가요계는 팬덤 산업으로 전환되었고, 엔터테이너형 아이돌은 퇴장하기 시작했다. 아이돌 그룹이 총체적 묶음 상품으로 판매되며, 그 안에서 멤버들 색깔과 그것들이 이루는 조화, 소위 ‘케미스트리’가 중요해졌다. 개인 활동은 줄어 들었고 스포트라이트를 집어삼켜 나머지 멤버를 소외할 수 있는 센터 멤버도 제한적으로 비중을 얻는다. 2015년 ‘모두가 센터인 걸그룹’으로 데뷔해 아이돌 그룹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준 트와이스가 정확한 모범 사례다. 케이팝 그룹은 고정된 센터가 존재하지 않거나 큰 의미가 없는 체제로 이행했고, ‘입덕 포인트’와 케미스트리를 연출하는 캐릭터 아이돌이 엔터테이너 아이돌을 대체했다.


와이스는 캐릭터 아이돌의 시대를 연 선두 주자다. 각각의 멤버가 자신을 설명하는 소품과 별명, 속성을 장착했고(모모: 족발, 사나: 시바견, 나연: 맏내 등등) 기동성 높은 실시간 인터넷 방송 브이 라이브를 무대로 팬들과 소통했다. 멤버들과의 케미스트리 연출, 팬들을 ‘조련’하는 능력, 캐릭터를 사랑스럽게 수행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나는 캐릭터 아이돌 중 발군이다. 물론 지금 활동하는 아이돌도 개별 스케줄을 소화하고 예능 방송에 출연하며 팀마다 간판 멤버가 있다. 과거에는 개인 활동이 팀 활동과 어느 정도 구분되는 성격이 있었다면, 지금은 개별 스케줄을 팀을 알리는 차원에서 소화하고 멤버 간 대외 노출 밸런스가 조율된다는 것이다. 불과 몇 해 전까지 수지와 설현, 혜리는 영화, CF, 드라마를 왕성하게 찍었지만, 쯔위는 어느 순간부터 팀원들과 함께 광고를 찍고 아이린은 웹 드라마에 한 차례 출연했을 따름이다.
      



케이팝 팬들은 일본 아이돌을 한국 아이돌의 ‘나머지’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한국 아이돌은 무대를 잘하고 일본 아이돌은 무대를 못 한다, 한국 아이돌은 글로벌 아이돌이지만 일본 아이돌은 갈라파고스에 갇힌 로컬 아이돌이다. 꼭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가만히 들춰보면 두 집단 사이에는 여집합만큼 교집합이 있다. 일본 아이돌이라고 해도 속성이 다 같지는 않다. 보이그룹을 운영하는 쟈니즈와 걸그룹을 운영하는 AKS는 다르고, 같은 AKS 소속이라도 AKB 48과 노기자카 46, 케야키자카 46은 다르다. 다만, 케이팝은 작년 여름 <프로듀스 48>에서 AKB 48을 통해 일본 아이돌을 만났고, AKB 48이 대표적 일본 아이돌 중 하나이기에 그들을 예로 들어도 좋을 것 같다.    

  

한국 아이돌과 48 그룹 아이돌이 별세계에 사는 이종족은 아니다. 앞서 한국 아이돌을 유형 별로 나누었는데, AKB 48에도 여러 타입의 아이돌이 있다. HKT 48의 사시하라 리노는 일본 여자 아이돌 랭킹 넘버원에 꼽히는 유명인인데, 팀 활동과 별개의 예능 방송 출연이 메인 활동이며, 이를테면 엔터테이너 아이돌이다. 또한 일본에도 아티스트형 아이돌이 있다. 사시하라 리노에 버금갈 만큼 유명한 NMB 48의 야마모토 사야카는 가창력이 우수하고 자작곡으로 앨범까지 발매한 싱어송라이터다. <프로듀스 48>에 출연해 한국에 얼굴을 알린 타케우치 미유 역시 송라이팅 능력으로 방송 팬들에게 어필했었다.      


하지만 정체성의 기반이 다르다. 한국 아이돌의 대전제가 무대 퍼포먼스라면 AKS 그룹 아이돌에게는 이 항목이 결핍돼있다. 거대 기획사가 아이돌 시장을 독과점 하고 있어 경쟁이 없는 생태계, 춤과 노래보다 악수회 같은 판촉 이벤트가 중요한 환경, 팬들이 지지하는 멤버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경쟁적으로 돈을 지출하게 하는 마케팅이 직접 요인이다. 그렇다면 퍼포먼스 대신 무엇이 일본 아이돌의 대전제를 이루는가. 바로 캐릭터다. 48 그룹의 정체성은 본점과 다수의 지부로 구성된 세계관, 그 세계관 속에 신진대사 하는 수백 명의 아이돌이다. 언젠가 쓴 글 ‘인격의 도착’에서 설명했듯, 그들은 퍼스낼리티를 가공해 캐릭터를 전시하여 팬을 확보하고, 이것이 48 그룹 특유의 오시멘(한국으로 치면 ‘원픽’) 문화를 이룬다. 48그룹 아이돌은 이 점에 특화된 전문 인력이고 팬들을 ‘입덕’ 시키는 전략과 요령을 단련한 장인이다.


AKS는 소속 가수를 서포트하는 체계가 약하고, 이렇다 할 매니지먼트도 트레이닝도 제공하지 않는다. <프로듀스48>에 참여한 AKB 48 멤버들은 춤과 노래를 배우고 남에게 헤어 메이크업을 받은 것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AKS는 큰 틀에서 ‘푸시 멤버’를 정하고 나머지는 적자생존에 맡기는데, 미분화된 운영 방식으로 인해 수 백 명의 퍼스낼리티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캐릭터와 ‘케미스트리’가 자율적으로 창출되는 역설이 일어난다. 달리 말해, 아이돌 스스로 자신의 매력을 궁리하고 연출하는데 활동 비중이 쏠려있다는 뜻이다. <프로듀스 48> 트레이너들은 일본인 연습생들이 “실력은 부족하지만 무대에 능숙하고 표정이 좋다”는 평가를 내렸고, NMB 48의 무라세 사에와 시로마 미루는 풍부하고 강렬한 표정 연기로 경연 최상위권에 들었다. 이런 점들이 48 그룹 아이돌이 활동을 통해 습득하는 강점이다.
 
이상의 특질은 팬덤/캐릭터 산업으로 재편된 케이팝의 현황과 교차로에서 만난다. 어떻게 보면 케이팝의 오늘은 48 그룹의 어제다. 다만, 캐릭터 산업의 운영이 케이팝의 경우 기획사가 모든 방면에 개입하는 하향식으로 이뤄진다면, 48 그룹은 아래에서 캐릭터 콘텐츠가 창출되는 상향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차이다. 이것을 기획형 아이돌과 반反기획형 아이돌 혹은 반半기획형 아이돌의 대립항으로 맞세울 수 있다. 재미있게도 한국 아이돌에게 ‘만들어진 아이돌’을 벗어난 ‘탈기획’이 궁극의 목적지라면, 48 그룹은 이미 소속사의 기획이 미치지 않는 상태로 아이돌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서두에서 밝힌 미야와키 사쿠라의 일화는 이런 배경에서 도출되었다.      


이 말이 AKS를 칭송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AKS의 운영 방식은 어떻게 보면 방치에 가깝고, 그럼에도 소속 가수의 인권에 억압적 성격이 크다. 가령 과거 미네기시 미나미가 연애 사실이 밝혀져 삭발로 사죄한 사건과 최근 NGT 48에서 벌어진 괴한 사건은 척결해 마땅한 치명적 악습에 불과하다. 나는 무엇을 이상향으로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사실들을 비교 대조하고 시사점을 끌어내려 한다.        

   



미야와키 사쿠라는 HKT48 시절부터 캐릭터 플레이에 강한 아이돌이었다. 그는 사시하라 리노와 야마모토 사야카처럼 확실한 특기 분야가 있지 않고, 시마자키 하루카처럼 여배우 계열의 마스크를 지니지는 않았다. 사쿠라의 무기는 무대에서 예쁜 용모를 보여주는 정통파 아이돌의 자질과 함께 그것을 스스로 헝클어 버리는 엉뚱함이었다. 운동치, ‘집순이’, 허술한 야심가, 게임 오타쿠 같은 아웃사이더 계열 캐릭터의 복합 및 예능 방송에서 보여주는 코믹한 표정과 슬랩스틱이 그의 무대 밖 캐릭터를 이룬다. 무대 위와 무대 아래, 이 간극이 사쿠라의 대명사처럼 회자되는 ‘갭 모에’의 원천이고, 그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감각이 사쿠라가 지닌 재능이다.


AKB 48 1대 총감독 다카하시 미나미는 사쿠라를 “프로의식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은” 아이돌이라 평했다고 하는데, 사쿠라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이다. 사쿠라는 HKT 48 입단 직후 빼어난 글솜씨로 주목받았고 말솜씨와 순발력이 좋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부터 강한 상승 의지를 드러냈고, 하이터치회 같은 팬 대면 이벤트를 하루 종일  소화하면서도 지친 기색 한 점 드러내지 않을만큼 성실하다. 이 모든 소질은 스스로의 장단점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능력, 그것을 적재적소에서 실행하는 능력과 통한다. 그가 <프로듀스 48>로 동해를 건너온 후 케이팝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장면들 또한 이런 소질이 길어 올렸다.

      

<프로듀스 48>에서 사쿠라를 대표하는 장면, 아니 <프로듀스 48>의 대 주제를 대표하는 장면은 최종 12화에서 탄생했다. 마지막 열두 번째 멤버 선발을 앞두고, 2위에 확정된 사쿠라가 순위 발표를 기다리는 이채연에게 “함께 데뷔하고 싶다” 울먹이며 손짓을 한다(“채연, 항상 지탱해줘서 고마워. 함께 데뷔하고 싶어.”). 진행자 이승기가 2위로 선발된 소감, “지금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냐” 묻자 나온 대답이다. 보통은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해 준 사람들, 가족과 친구, 기획사 대표 등을 거명할 것이고, 실제로 먼저 소감을 말한 1위 장원영은 같은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그만큼 사쿠라의 이채연 호명은 틀에서 벗어난 리액션이었고, 사실은 위태로운 코멘트였다. 12위 후보로 남은 건 이채연 만이 아니었다. 그들 중 한 명에게 ‘합격하면 좋겠다’ 말하는 건 상황의 초점을 한쪽으로 옮겨놓는 행동이다. 이채연이 떨어질 수도 있었고, 그 경우 이채연도 사쿠라도 이채연 대신 합격한 연습생도 어색한 입장이 되었을지 모른다. 통제된 연출 아래 움직이는 한국 아이돌이라면 이렇게 많은 불확실성이 걸린 행동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시청자들은 사쿠라의 말에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호기심을 품었다.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정말로 이채연이 합격하게 될지가 방송의 최종 관심사로 채택됐다. 그리고 이채연의 이름이 불렸다. 오열하며 무너지는 이채연의 모습이 카메라를 채웠다. 방송 직후, 사쿠라가 낯설고 힘겨운 트레이닝을 헤쳐 가는 데 이채연에게  도움을 받았고 두 사람이 친밀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사쿠라가 이채연을 부르던 순간은 한일 연습생의 우정을 다룬다는 방송 기획을 완성했고, 백 일에 걸친 큰 서사를 닫는 클라이맥스로 남았다. 일개 출연진이 방송 흐름에 즉흥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이 품은 개별적 서사에 방송의 서사를 통합하고 재편하는광경이었다. 물론 이 상황의 주인공은 사쿠라 혼자가 아니다. 이채연, 나아가 하나하나의 벽돌로 방송을 떠받친 모든 연습생일 것이며, 사쿠라는 다른 뜻 없이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었다고 밝혔다. 사실이겠지만, 한국 방송 환경에서 이례적인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던 건 그가 지닌 천성은 물론 한국과 다른 환경에서 활동하며 몸에 붙은 행위 양식 때문이란 점도 부정하기 힘들 것 같다.

     

사쿠라가 의외성과 돌발성을 보여준 사례는 또 있다. 지난달 MBC 아이돌 육상 대회 촬영 현장에선 ‘핫도그’가 키워드로 나돌았다. 보이그룹 세븐틴 팬들 앞자리에 앉은 사쿠라와 최예나가 팬들이 먹는 핫도그를 한 입 얻어먹었다고 한다. 사쿠라가 핫도그를 물끄러미 보자 팬이 건네줬다는 이야기, 세븐틴 기획사가 팬들에게 음료를 나눠줄 때 사쿠라가 손을 들어 함께 받아 마셨다는 일화가 알려지며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웃음소리가 퍼졌다. 팬들과의 접촉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아이돌이 팬들과 마구 어울리며 음식까지 얻어먹는 광경은 상상하기 힘들다. 심지어 자신의 팬도 아니고 다른 그룹 팬이었는데 말이다. 바로 그런 천진함과 엉뚱함이 사랑스러움을 일으킨 것인데, 사쿠라는 운신 가능한 경계를 지각하고, 호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채로움을 주는 한계치까지 나아가 자신을 표현하는 영민함과 활달함이 있는 것 같다. 스스로를 캐릭터화해 팬들과 소통하는 아이돌에게 이건 희소하고 강력한 재능이다.  

    

당일 현장의 또 다른 화제는 사쿠라와 레드벨벳 아이린의 만남이었다. 사쿠라는 사소한 일상을 통해 아이린의 열렬한 팬임을 고백해왔 만남을 향한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를 아는 팬들은 언제쯤 조우가 성사될지 관심을 기울지만 스케줄이 엇갈려 번번이 무산된 끝에 드디어 같은 장소에 다. 사쿠라는 아이린과 말을 나누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이린 뒷자리에서 수줍어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간단한 리액션 하나로 한국과 전 세계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Sakura_1st_win 해시태그를 올렸다. 경기에 한 번 출장하지도 않고 아이돌 육상대회 화제의 중심에 서는 괴력을 발휘한 것이다. 아이돌이 다른 아이돌을 연모하는 오타쿠라는 사실 자체가 특이한 일이라 많은 사람이 호기심을 가졌을 것 같다. 오랜 시일 퍼스낼리티를 넘나들며 축적된 독특한 전사가 극적인 타이밍을 만났고 때 맞춰 한 번 밀어주는 것만으로 서사적 스캔들로 승화했다.  


얼마 전 첫 단독 출연한 예능 올리브 TV <모두의 주방>에서도 그랬다. 사쿠라는 먼저 장소에 도착해 한국 연예인들을 기다리는 긴장감을 세트와 소품 배치 속에 마치 1인극을 연행하듯 표현했다. 아무도 없는 세트를 움츠린 채 걸어 다니며 주위를 살피다 갑자기 켜진 스피커에 놀라 몸이 덜컥 휘청대고, 식탁 뒤에 숨어 눈만 빼꼼 내민 채 두리번거렸다. 보는 이 누구나 웃음 짓게 하는 모습이면서, 사쿠라 팬들이 익히 아는 귀엽고 허당스러운 개성이고, 그의 캐릭터가 액자 그림처럼 요약된 풍경이다. 사쿠라가 어떤 아이돌인지, 그의 매력이 무엇인지 누군가에게 알려주려면 저 장면들을 발라낸 ‘움짤’을 한 번 보여주는 것으로 족할 것 같다.     

 

사쿠라가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어떻게 보면 연극적이고 어떻게 보면 시추에이션 코미디 같고 어떻게 보면 리얼 버라이어티 같다. 엔터테이너로서 그런 혼성적 재능을 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사실 그 행동 하나하나는 조금씩 과잉돼 있고 장식적이다. 그가 보유한 캐릭터 요소도 높은 수준으로 유형화된 것이고, 자주 짓는 시그니처 같은 표정, 아래턱이 빠질 만큼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뜨는 표정도 만화적이다. 하지만 사쿠라에 관해 알아갈수록 캐릭터 요소들에 인격적 요소에서 비롯하는 진정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무엇보다 캐릭터 플레이가 주어진 상황에 느닷없이 배치되는 맥락이 재미있다. 자연스러운 리액션과 계획된 상황 연출이 중시되는 한국 연예계 신선한 맥락과 활력을 가한다.      


사쿠라는 시추에이션에 올라타 주인공이 되는 재능을 갖고 있다. 순발력 있게 시추에이션에 대응하며 현장을 캐릭터 플레이를 연행하는 무대로 재편하는 능력, 독자적 서사를 구성하고 그것을 자신이 속한 그룹, 무대, 방송의 흐름과 결부 짓는 능력이다. 이런 캐릭터와 서사 연출 능력이 케이팝 신에서 사쿠라가 지닌 특별함이다. 리얼 버라이어티가 이미 주어진 상황과 미션 속에서 ‘리얼하게’ 행동하는 장르라면, 사쿠라는 상황 자체를 흔들거나 스스로 만들어내곤 한다. 일찍이 한국에서 보기 힘들었던 유형의 방송 퍼포먼스다. 사쿠라에겐 무대를 메타적으로 내려다보는 시선과 주어진 요소를 운용해 자신을 표현하는 기획력이 있는 것 같다. 이건 다름 아닌 연출가의 정체성이다. <프로듀스 48> 마지막 방송과 아이돌 육상 대회 촬영장에서 있었던 사건은 방송 내부에서 또 다른 연출가가 되어 서브 콘텐츠를 제작한 것과 같다. 사쿠라가 이채연을 호명한 장면은 2019 MAMA JAPAN에서 아이즈원 무대 오프닝 영상으로 다시 쓰였고, 한일 합작 그룹 아이즈원을 나타내는 서사로 회자된다. 방송국이 출연자에게 역할을 배정하는 것을 넘어, 출연진이 엮은 서사가 거꾸로 방송국에 채택되는 ‘상향식 기획’이 일어났다.      


이는 ‘기획된 스타’ 케이팝 아이돌의 경계를 또 다른 방향에서 넘어선 사례다. 무대 위 퍼포먼스에 특화된 한국 아이돌이 ‘아티스트’를 갈망하며 자기 음악을 만드는 연출가를 꿈꿨다면, 미야와키 사쿠라는 기획사와 팬들에게 캐릭터를 부여받는 것을 넘어 스스로 캐릭터를 운용하는 연출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연출가형 아이돌이라 부를 만한 새로운 유형이 케이팝 신에 등재되었다. 한국 아이돌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혐오와 싸우며 그 전리품으로 외연을 넓히고 퀄리티를 다지며 성장해왔다. 반면 미야와키 사쿠라는 케이팝 아이돌이 아티스트로 통하는 일본에서 그들을 동경해 한국에 건너왔다. 아이돌의 정체성을 긍정한 채 거기 다가서고 안착하기 위한 여정을 하며 아이돌의 경계를 넓혀가고 있다. 이 역설과 대구 구조가 케이팝 신에 깔린 문화사적 텍스트를 더 풍요롭게 해주는 새로운 깊이다.


사쿠라는 케이팝이 퍼포먼스 산업에서 캐릭터 산업으로 재편되는 정확한 시각에 도착했다. 케이팝 외부에서 성장한 케이팝의 내부자, 생태계의 외래종으로서 시스템 안팎의 경계에 서 있다. 연출가형 아이돌 사쿠라는 시스템의 관성에 변화를 환기할 수도 있고, 매니지먼트 산업이 나아갈 방향에 예외적 참고 사례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아이즈원의 소속사 오프더레코드는 일본 활동과 결부 지어 사쿠라의 특수한 위치를 부분적으로 용인하고 활용한다. 한국에선 아이돌의 개인적 발언과 SNS 활동이 금기시되지만, 사쿠라는 HKT 48 시절부터 진행한 라디오 방송을 일본에 갈 때마다 녹음한다. 신변잡기와 아이즈원 활동에 관한 소감을 밝히는 등 준 개인적 소통 채널을 운영하는 셈이다. 설령 이런 사실들이 단순한 예외 사례로만 남는다 해도, 차후 그가 나아갈 궤적은 그 자체로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흥미로운 기록이 적힌 페이지로 남을 것 같다.


사쿠라는 <프로듀스 48> 방영 당시 실력이 부족하다는 논란에 올랐다. 하지만 데뷔 준비 기간을 거치며 퍼포먼스 솜씨가 가파르게 향상됐다. 군무의 조화를 이질감 없이 맞춰내는 한편, 자신이 맡은 파트에서 다채롭고 고혹적인 표정과 제스처를 연출해 그룹 전체 무대 퀄리티에 기여한다. 아이즈원 팀원들이 종종 인터뷰에서 사쿠라의 표정 연기가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건 빈말이 아니다. 이는 물론 미야와키 사쿠라가 지닌 자기 연출 재능의 또 다른 발로다. 사쿠라는 캐릭터 플레이도 완성돼있고 무대 퍼포먼스도 부족하지 않은, 한일 아이돌의 장점이 융화된 새로운 아이돌 모델로 성장했다. <프로듀스 48>로 시작된 한일 합작 프로젝트가 양국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한 일본 칼럼니스트는 신조어 ‘JK팝’을 창안하며 양국 아이돌 신의 콜라보에 기대를 걸었지만, 케이팝의 장점을 흡수하기에 AKS의 프로덕션 시스템은 경직되고 낙후돼있다. 하지만 그 융합과 진화는 적어도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이미 드라마틱하게 일어난 상태다. 다른 아이즈원 멤버들과 함께, 미야와키 사쿠라는 한일 아이돌의 우정과 성장이라는 슬로건을 재현하며 <프로듀스 48>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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