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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Dec 11. 2015

그날 밤

<건축학개론>의 그날 밤


<건축학개론>은 남성들의 아련한 추억에 손짓을 건네는 첫사랑의 서사다. 그런 기획의 클라이맥스이자 큰 논란을 뿌린 장면이 ‘그날 밤’이다. 그날 밤, 서연과 선배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첫째, 서연은 선배와 몸을 섞었다. 이것은 서사 흐름 상 자연스러운 판단이다. 따라서 이 경우가 해석의 정론이다. 서연은 승민이 종적을 감춘 종강파티에서 선배가 술을 권하자 미묘한 미소를 띤다. 마치 선배의 유혹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문에 차후 장면에서 성폭행의 뉘앙스는 깎여나가고, 그 모든 사태를  지켜본 승민의 상처가 부각된다. 첫사랑에 실패한 아픔을 나눠가진 모든 남성의 공감을 끌어낸다.


둘째, 서연은 선배와 몸을 섞지 않았다. 서연이 선배와 자취방에 들어 간 이후 장면은 통째로 편집돼 있다. 원론적으로,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장면은 상상의 재량이 주어진다. 관객은 자신의 바람에 따라 서연이 ‘순결’을 지켰으리라 믿을 수도 있다. 다음날 아침, 서연은 큰 동요 없는 얼굴로 자취방에서 걸어 나온다. 간밤에 성관계를 치렀거나 취중에 범해졌다면 표정에서 마땅한 징후가 보여야 할 텐데 이 점이 분명치가 않다. 가능성이 많진 않지만, 둘 사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추론도 기각되지 않는다. 영화 종반, 서연은 승민에게 고백한다. 내게도 너는 첫사랑이었어. 둘 사이 엇갈림이 해소되면서 '그날 밤'의 뉘앙스도 궤도를 살짝 이탈한다. 명확한 연결고리는 없더라도 그녀가 끝까지 선배를 거부했을 것이라 심증을 품을 근거는 된다.



 자, 영화를 본 당신은 어떤 해석을 택할 텐가? 해석? 그렇다. 어차피 이건 모두가 짐작이요 추론일 뿐이다. 왜? 감독이 아무런 판단의 준거를 채워 넣지 않고 ‘열린 장면’으로 비워두었기 때문이다. 술을 권하고 간음을 시도한 폭력적 서사 설정을, 창작자가 무게중심을 잡으며 책임지지 않고 관객  저마다의 욕망에 맡겨버린 것이다. 승민은, 의식을 잃은 여성이 추행당할 위기에 처한 현장을 목격하고도 도망쳐 버렸다. 만약, 정말로 선배가 서연을 범했다면 누구보다 아프고 슬픈 사람은 승민이 아니라 서연이다. 즉, 이 상황에서 공식적 피해자는 승민이 아니라 서연이다. 그런데도 영화는 서연이 아니라 승민을 연민하고 그에게 감정 이입하도록 유도한다. 한정된 러닝타임을 떼어내 승민의 서러운 오열을 절절하게 묘사한다. 그로 인해 승인되는 것은, 유복한 선배에게 첫사랑을 빼앗기고, ‘썅년’에게 순정을 배신당한 어린 남자의 ‘피해자 서사’다. 그 위험천만한 상황과 승민의 처신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몰각되고 로맨스의 신파를 자아내는 도구로 소비되는 것이다.



IZE 편집장 강명석은 <건축학개론>을 “남성들이 작성한 자기반성문”이라 호평한 바 있다. 자신을 사랑한 여성을 ‘썅년’이라 매도한 오해가 해소되는 전개에 착안한 의견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사의 알리바이에 지나친 위상을 부여한 해석의 오류다. 이런 주장이 간과하는 건 영화에 드리운 가부장제도의 실루엣이다. 라스트 신, 제주도 고향집 장면을 보자. 서연에게 피아노는, 오직 아버지의 소망이요 자신은 원하지 않되 어깨 위에 짊어진 짐이었다. 그러나 서연은 버릴 수 없는 삶의 부속물처럼 피아노를 받아들이며 고향에 정착한다. 내내 커리어우먼처럼 세련된 그녀의 옷차림이 어느새 발목을 덮는 긴치마로 바뀌어 있다. 조신한 본새로 나이 든 아비를 수발하며 너무도 안락하게 미소 짓는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그렇다면 90년대의 온갖 오해는 누구를 위해 준비된 것일까. 남근(돈과 아버지)이 거세된 듯 빌빌거리던 승민이 자신의 ‘지배력’을 확인하는  엔딩은 누구를 위해 마련된 성찬일까. “아. 내가 이 여자에게 첫 남자였다!” <건축학개론>은 여성들에게 화해를 건네는 척 90년대 ‘승민들’의 판타지에 복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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