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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May 13. 2019

광기의 돌림노래

일본 연호 발언 비난 사건

얼마 전 트와이스 사나가 당한 사건을 두고 “여자 연예인을 향한 여성 혐오와 민족주의, 뒤틀린 소비자 심리가 일으킨 사건”으로 규정하는 의견이 자주 보였다. 이건 상황을 도식화한 생각이다.


사건의 전개 과정을 짚어보면 사나를 향한 비난은 소위 ‘여초 커뮤니티’에서 주를 이뤘다. 반대로 ‘남초 커뮤니티’는 거기 대항해 사나를 보호하려 했고 그로부터 진영 대결이 펼쳐졌다. 물론 여성도 여성을 혐오할 수 있다고 반론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 상황이 스테레오 타입의 여성혐오와 반대로 가고 있으며 혐오의 주체가 뒤섞인 상태란 점은 직시해야 한다. 민족주의와 엮여 좀 더 익숙한 방식으로 여성혐오가 표출됐더라면, 남성들은 사나를 옹호하는 대신 “역사도 모르고 일본 연호나 SNS에 쓰는 머리 빈 여자”라고 모욕했을 것이다. 실제로 똑같은 전례가 있었다. 또 다른 여자 아이돌, 설현과 티파니가 안중근의 얼굴을 몰라보고, SNS에 욱일기 스티커를 실수로 올렸다는 이유로 ‘역사의 심판’을 당하지 않았는가. 남초 커뮤니티는 징벌의 진두에 있었다. 반대쪽에서 바라봐도 상황은 뒤틀려있다. 여초 커뮤니티에선 “왜 여자가 여자를 공격하는가”란 비판에 “사나만 여자인가, ‘위안부’ 피해자들도 여자였다”라고 오히려 여성의 피해자 됨을 강조하는 논리가 발견된다.


왜 이런 역전 현상이 생긴 걸까. 남자들 주장대로 한국 여자들 마음속에 예쁜 일본 여성을 향한 배타심이 있어 불이 붙은 걸까, 아니면 어제는 ‘한국 여자’의 역사의식을 욕하던 남자들이 ‘일본 여자’ 속된 말로 ‘스시녀’에게는 관대한 이중 잣대를 세운 걸까. 길게 써 봐야 황색 신문 기자가 될 것 같다. 좀 더 눈에 보이는 사실을 짚어 보자. 이번 사건에서 전통적 양상의 여성혐오는 오히려 사나가 변호받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 “여자들이 사나를 미워하는 이유: 예쁘고 귀엽고 섹시하니까” “여초 커뮤니티는 연호가 뭔지도 모르는 무식한 가짜 애국자들, 사회악의 온상지”처럼 문제의 근원을 여성성으로 돌리는 일반화 말이다. 실제로 남초 커뮤니티 베스트 게시물에 오른 레퍼토리들이다. 그러니까, 사나가 여성혐오에 의해 비난받은 것이 아니라 그 비난에 맞불이 붙는 과정에서 민족주의 이슈가 젠더 갈등으로 전치된 사건이라 평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민족주의 자체에 대한 성찰은 소외되고 있다.


민족주의는 특정 성별과 집단을 넘어 한국 사회가 사육하는 괴물이다. 이 사회는 늘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영웅에 굶주려 있고, 자긍심에 오점을 묻히는 자는 처단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설현과 티파니, 사나를 대하는 남초 집단의 표리 부동함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은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오남용을 여성성과 등치 하며 특정 집단의 문제로 타자화하고 있다. 누차 글을 썼지만, 인터넷 상에서 반일 감정, 혐일 감정은 위험 수위에 달해있고 젊은 세대로 갈수록 증세가 심하다. 사회의 극우화가 진행되는 신호로 이해할 수 있지만, 대일 외교를 파탄 내며 반일 여론을 조장해 온 정부의 통치 노선이 현 사태의 밑거름이 됐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피해자 민족주의다. 가해자로서의 역사를 지우고 과거의 권력을 수복하려 하는 일본의 민족주의와 대칭이다. 근대화의 대열에서 낙오됐던 역사가 세계화를 향한 결핍으로 발현되고, 식민 지배 가해자를 향한 증오심이 공격성을 정당화한다. 군국주의 시대 이전부터 사회적 관습이었던 연호를 거론한 것이 어째서 천황 숭배에 군국주의적 발언인가. 연호 교체에 따른 소감을 말한 것이 어떻게 강제 징용 피해자 앞에 사죄할 일이 되는가. 왜 일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이 무시무시한 논리의 비약을 가능케 하는 건 우리가 당한 고통 앞에 논리적 개연성은 사소한 것이 되고 모든 것을 도덕적 흑백논리로 빨아들이는 피해자 자의식의 과잉이다.


어떤 의미에선 과거사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가 자신만이 피해자인 세계관을 공식화하려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현실에 책임은 지지 않고 책임을 요구하고 항변하고 단죄할 수 있는 권리를 구성하기 위해서. 같은 여성이란 정체성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가 당한 고통을 전용하며 또 다른 여성을 향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그 여성이 거대 폭력의 피해자란 사실을 명분으로 여성 집단을 싸잡아 혐오하는 일반화를 정당화한다. 피해자란 사실이 가지는 도덕적 지위를 정당방위 삼아 정당방위를 넘어서는 가학의 권력을 원하는 것이. 저마다 상대 진영에 가해자의 이름을 떠넘기며 순결한 피해자가 되고, 현실의 나쁜 결론은 모두 그들의 탓으로 소급된다. 남초 집단이 민족주의의 광기를 여초 집단의 미개함으로 타자화하고, 어떤 논평가들이 사나를 향한 비난이 (남성 집단의 소행임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여성혐오라고 관성적으로 정의한 데는 이런 내막이 있었을 것 같다. 이번 사건의 바닥에 깔려있는 감정 기제는 소비자 심리가 아니라 진영 논리와 피해자 의식이다.


민족주의와 젠더 문제, 진영 논리와 피해자 의식은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코드다. 이것들이 엮이고 교차하고 맞서고 자리가 뒤바뀌며 살풍경을 그려냈다. 사태를 극복하고 재발을 막으려면 저 코드들이 배열된 구도를 정확하게 확인하고 논점 하나하나의 시시비비를 가리되 그것을 종합하는 가치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 사안에 한해 논란을 벌인 주체가 누구인지와 그 안에 물든 특수한 병증을 직시하면서도 민족주의가 낳는 폭력의 보편성을 인정하고, 여성이 여성을 혐오할 수도 있지만 그 숙주가 남성에 의해 입법된 여성혐오임을 이해하고, 피해자 의식의 과잉을 우려하면서도 피해자의 입장을 조소하지는 않는 균형 감각 말이다. 이건 지적 능력에 달린 문제라기보다 내 가치관에 따라 현실을 단순화하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윤리의식의 문제다. 여론을 구성하는 익명의 개인들이 제각각 이런 구불구불한 판단을 거쳐 합의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언론사와 오피니언 리더의 역할인데, 개인 매체의 범람으로 모두가 오피니언을 발행하고 언론의 위상과 퀄리티가 추락한 오늘날, 그런 구심점은 유명무실해진 것 같다.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점을 선명하게 비판하며 최소한의 하한선을 긋는 데 집중하는 것이 사실상 최선인 셈이다.


한국 사회는 오늘의 가십에 몰두하느라 어제의 교훈을 망각하고 진영과 진영이 잣대를 공유하지 않으므로, 민족주의는 주체와 객체를 바꿔 돌아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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