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화 시대의 불길한 속삭임
<조커> (토드 필립스, 2019)
영화 <조커>의 개봉과 함께 미국 사회는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경찰은 극장가 순찰과 경계 근무를 강화했었다. 미국은 총기 난사 등 대량 살상 범죄와 모방 범죄의 전례가 익히 존재하는 사회다. <조커>에선 억압받는 하층민 남성의 광기가 잔혹 범죄를 향해 폭주한다. 영화는 걸작이라는 극찬은 물론 주인공과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비난을 불렀다. 한국에도 미국의 논란이 영화와 함께 옮겨왔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소비되는 일면이 있다. 넷우익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 DC 인사이드에 올라와 그 밖으로 공유되는 관객 후기들을 보면,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신을 조커와 동일시하면서도 ‘우리는 (혹은 너희는) 조커도 될 수 없다’는 식의 자조 섞인 풍자, 자신을 조커에 과도하게 동일시한 이들의 게시물이 놀림거리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조커>가 일종의 ‘밈’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달까.
<조커>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든 배트맨 시리즈 3부작의 영향권에 있다. <조커>는 배트맨 코믹스가 원작이고 여타 DC 히어로 무비와 독립된 영화다. 하지만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가 가장 거대한 대중문화가 된 시대에 동세대 관객들에게 새겨진 고담시의 이미지엔 가장 최근에 제작돼 크게 흥행한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가 빗기어 있다. 특히 조커가 등장했던 <다크 나이트>에 대해선 일종의 프리퀄 무비로 이해하는 독법도 있다. <조커>는 정신 질환을 가진 소시민 아서 플렉이 어떻게 광기에 찬 악당의 대명사, ‘웃는 남자’가 되었는지 설명하는 탄생설화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장르와 성서에 걸쳐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선악이 혼재된 자경단의 딜레마가 외부로 현현한 배트맨의 반쪽이었고, 브루스 웨인을 어둠의 기사로 유폐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사라진다. 조커는 자신의 입이 찢어지게 된 사연을 두 번 설명한다. 그것은 매 번 다른 이야기다. 관객은 조커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고, 사연은 미지의 공백으로 남아 조커가 뿜는 귀기, 악의 화신과 같은 관념성을 빚는 심연이 된다. <조커>는 이 공백을 채워 넣으며 조커의 과거를 고정한다. 조커가 탄생한 배경은 장르적 클리셰를 넘어 양극화와 사회 안전망 부재 같은 사회경제적 환경이며 조커는 히어로 영화의 아이콘에서 ‘나와 같은’ 루저 아서 플렉으로 인간화한다.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 역시 당대 사회상이 반영된 영화였다. 2012년 개봉된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선 양극화된 미국 경제와 금융 위기, 월가 시위가 표상으로 연출된다. <조커>는 장르 서사에 현실이 투영되는 수준을 넘어 리얼리즘의 문법에 치우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아서 플렉은 조커로 진화하고, 사회적 드라마의 등장인물이 히어로 무비의 신화적 세계관에 등재되는 추상적 비약이 일어난다. 다르게 말하면, <조커>는 기존의 배트맨 시리즈를 물구나무 세운 영화다. 고담시를 수호하는 백만장자 부르스 웨인의 이야기가 고담시에서 기신 거리는 하층민 아서 플렉의 시점으로 전복된 것이다.
<조커>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다. 미국의 히어로들은 전통적으로 사회를 수호하는 한편 사회와 불화하는 내면 갈등을 품고 있었다. 히어로 서사를 리얼리즘을 거쳐 재구성하는 것은 할리우드의 영화의 새롭지 않은 경향이다. 다만, 히어로들의 경우 자경단의 딜레마, 자신이 품은 과잉된 힘을 인간적·사회적 갈등의 씨앗으로 품는다. <조커>는 남보다 사회적으로 힘이 없어 고통받는 인물이 도시를 혼돈에 빠트리는 ‘힘’을 얻게 되는 결말로 끝난다. 그는 영화 내내 수난에 수난을 거듭하며 관객의 연민과 동일시를 끌어내지만 <조커>는 추락이나 몰락의 서사가 아니다. 엔딩에서 모든 것이 아서 플렉의 망상일 수도 있다는 식으로 결말이 닫히지 않지만, 플롯을 요약하면 결국 한 유약한 인간이 신화적 악당으로 변모하는 승천의 서사다. 폭주하는 조커가 행하는 살인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일으킨다.
백인 하층민 남성이 기득권의 위선을 향해 증오를 해방하는 <조커>의 플롯에선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한 러스트 벨트 노동자들이 연상된다. 한국 역시 활로 없는 경제난과 좌절감이 만연한 상태이기에 자신을 조커에 대입하는 남성 관객들이 보이는 것 같다. 다만 고담시는 장르적 공간이지만, 슬럼가가 공존하는 미국 대도시를 연상케 하는 현실적 공간이기도 하다. 인구밀도와 도심화 수준이 높은 한국에는 고담시 같은 우범지대가 드물고, 그 현실을 바탕으로 창작되는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와 배다른 계보의 서사들이 창작되고 소비되어왔다. 무엇보다 한국에선 총기 소지가 금지되어 있어 사회에 대한 개인의 테러 행위가 감행되기 힘들다. 서두에서 말한 일부 한국 관객의 풍자적 태도는 영화를 마주하는 장르적·지역적 현실의 거리감에 대한 자의식이 은연중에 표출된 것이며 미국과 미묘한 온도차가 생긴 건 아닐까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정말로 위험한 건 모방 범죄의 위험일까? 조커는 잔혹한 살인으로 도시를 공포에 몰아넣고 안티 히어로의 지위로 승천하지만, 현실에서 누군가 조커와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한다면 기다리는 건 인생의 파국이다. 우리는 혹은 너희는 조커도 될 수 없다는 건 옳은 진술이다. 단, 그런 파국을 피하고 가학의 승리감만 맛볼 수 있는 안전한 길이 한 가지 있다.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억압을 자신의 아래쪽으로 흘려보내는, 또 다른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혐오다. 아서 플렉의 정체성이 백인 남성이며, 영화가 백인 하층민 남성의 폭력성에 사연과 페이소스, 카타르시스를 입혀주는 사실은 불길하다. 조커에 정치적 뇌관이 도사리고 있다면 사회 최하층을 향해 소요 사태를 선동하기 때문이 아니다. 하층부에 속해 있지만 최하층에 있지는 않은 사람들에게, 사실은 당신도 조커처럼 세상이 두려워하는 위험한 존재일 수 있다고, 그들이 가진 권력을 자각케 하는 은밀한 속삭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점에 있다. 정말로 위험한 건 조커를 흉내 내는 자멸적 폭력이 아니라 조커의 폭력이 일상화되고 제도화되는 것이다.
아서 플렉과 폭도들의 분노는 고담시의 기득권을 향한다. 그러나 아서 플렉이 망상을 품고 있다면, 현실에서 사람들은 제각각 사회적 망상을 통해 억압과 피억압의 권력관계를 굴절시키고 절대적 피해자의 자리를 점유하고는 한다. 남성, 자국인, 노동자, 성다수자, 다수 인종 등으로 계열화되는 보편적 약자들이 여성, 소수인종, 난민, 이주민, 소수파 종교의 신자, 성소수자 등 특수한 약자를 기득권으로 규정짓고 그들이 나의 생존권을 빼앗아 간다고 분노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 저기 너머에서 익숙한 세계적 극우화 시대의 풍경이다.
<조커>가 개봉하기 전부터 조커들의 세상은 이미 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