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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Aug 07. 2018

연출된 마녀사냥

영화 <더 헌트> 다시 보기

토마스 빈터베르크 감독의 <더 헌트>는 좋게 봤던 영화다. 5년 전 개봉했을 때 이런 평도 남겼었다('다음 번의 사냥감은 당신이다'). 하지만 글을 쓴 후로 무언가 미진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고, 글을 갱신하고 싶다는 생각이 늘 맴돌았다. 논조를 전개하는 방식을 보완하고 싶었는데, 차라리 논조를 갈아엎는 게 낫겠다. 지금 와서 보면 <더 헌트>는 미심쩍은 구석이 많은 영화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더 헌트>가 '이성에 의한 마녀사냥'을 다룬다고 해설했었다(신형철의 스토리텔링, '필사적으로 무죄 추정의 원칙을 고수하기').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하필 아동 성폭행이라는 소재를 택했다는 게 민감한 부분이다. 물론 왜 그런 소재를 택했는지 알기 쉽다. 약자를 보호한다는 관념 아래 인간의 도덕 감수성이 반사적으로 작동하는 사안에 도전하며 ‘이성의 확신’을 뿌리부터 의문에 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게 민감한 소재로 사유 실험을 진행할 때 창작자에겐 책임감이 필요하다. 소재가 지닌 도덕적 무게가 감소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장치가 필요하며, 어떤 방향의 확신을 의문에 붙이는 입장에서 그 반대 방향의 확신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더 헌트>는 실패했다. 토마스 빈터베르크는 주제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답을 내린 상태로 관객의 '답답함'을 부추긴다. 


영화 기자 김혜리는 <더 헌트>를 무섭게 보는 방법이 루카스가 클라라를 추행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장면들을 가려놓고 영화를 본다고 상상하는 것이라 말했었다(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물의 나라에서). 내가 하려는 말과는 전혀 다른 취지로 한 말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루카스의 결백을 명백하게 밝히고 시작하는 것이 이 영화의 단점이다. <더 헌트>는 흡사 한국 영화를 방불케 하는 신파인데, 루카스의 억울함을 '가슴으로' 호소하는 문법이다. 이 점들이 관객을 이미 판단을 내린 상태의 수동적 관찰자로 한정짓고 공분으로 끌고 간다. 또 다른 문제는 순수 선에 깃든 순수 악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선악 프레임이 고착된단 것이다. 영화가 여자 아이 클라라를 다루는 방식은 위험하다. 대여섯 살 먹은 아이가 몇 배는 더 산 아저씨에게 스킨십을 했다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누명을 씌운다. 아동 성폭력이 얼마나 절대적인 권력관계의 낙차로 발생하는지 상기한다면 무책임한 데다 작위적인 발상이다. 클라라의 표정과 행동, 말투는 때때로 아이의 그것이 아니다. 상황을 메타적으로 인지하고 음모를 꾸미는 성인의 실루엣이 스쳐갈 때가 있다(신형철의 비평을 읽어보면 그 역시 이 대목을 포착한 정황이 보인다. 몸을 사려 더 밀고 나가진 못하지만). 클라라는 할리우드 호러영화가 닦아놓은 '어린 악마'의 관습으로 연출된다. 루카스에게 스킨십을 거부당하자 모욕감에 찬 표정으로 노려보는 컷이 그렇다. 클라라는 여자 아이 자체가 아니라 통념적 성인 악녀, 시쳇말로 무고하는 꽃뱀의 위상을 품고 있다. 그 반대 편에서 돌팔매질에 난타당하는 루카스는 거의 숭고한 형상으로 심금을 울린다. 김혜리가 헌사를 꾸미듯 쓴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까다로운) 노력). 이 영화는 폭력이 발생하는 현실을 왜곡하고 단순화한다.


나는 아동 성폭행 사건에선 무고한 피해자가 있을 수 없다거나 그러한 사례를 서사로 다뤄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다뤄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루카스를 통탄스러운 피해자의 지위에 놓고 끓어오르는 '한'의 정서로 관객을 끌고 가는 것이 이 영화의 힘인데, 이건 현실을 향한 관찰의 호흡도 사유의 호흡도 아니다. 영화는 루카스를 공동체의 이방인이자 희생양, 독 안에 든 사냥감으로 형용하며 관객의 시점과 심정을 그 위에 오버랩시킨다. 만약 ‘이성의 확신’을 흔든다는 목적을 달성하겠다면, 관객을 루카스와 떨어트려 놓거나 오히려 루카스를 비난하는 마을 사람들의 자리에서 서사를 따라가도록 연출했어야 한다. 진실에 괄호를 쳐놓은 상태에서, 마을 사람들이란 타자가 아닌 관객 자신의 확신을 의문에 붙이거나, 관객이 괄호를 채우게 하여 스스로를 비판 대상에 포함시키도록 인도했어야 한다. 신형철은 <더 헌트>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좋은 이야기라고 평하지만, 루카스가 "복잡하게 좋은 사람"에도 이르지 못한 "단순하게 억울한 사람"이라서 문제인 것이다.

관객은 루카스라는 ‘소수자’에게 감정 이입하도록 인도되지만, 영화 바깥에서 진실은 그렇지 않다. 성범죄는 다수화한 사회구조에 의해 생산되고, 관객이 루카스에게 품는 연민 또한 다수자들의 그것과 가깝다. 현재 이 사회에서 ‘무고죄’를 향한 적개심이 얼마나 격렬하게 요동치는지 떠올리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더 헌트>는 사람들이 품은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연대의식에 이바지한다. 약자를 향한 감성적 판단을 거부하는 ‘이성의 이름’으로,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약자에게서 피해자의 지위를 가져와 대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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