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스 투표 조작 사태에 관해 말해지지 않은 것들
현재 <프로듀스> 사태를 대표하는 프레임은 “공정한 경쟁에 걸린 국민의 기대감이 배신당했다”는 것이다. 일부 정치인과 검경, 언론은 이 프레임을 강조하며 사건을 논평하고 있다. 사태의 핵심은 물론 투표 조작이다. 데뷔의 꿈을 이루려던 연습생, 시청자를 농락한 사건임엔 틀림없으며, 유료 투표라는 금전적 문제도 걸려있다. 이건 물론 사회의 불공정 이슈와 상통하지만 허와 실도 존재한다. 그것을 가려내는 것이 사태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합당한 시사점과 해결책을 도출하게 되는 징검다리가 될 것 같다.
<프로듀스>는 시즌1부터 소위 ‘피디 픽’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몇 년 전 방영된 <아이돌학교>의 투표 조작 의혹은 공공연히 말해지는 가십이었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프로듀스>를 시청하는 사람 중 이 방송이 공정할 거라 기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프로듀스 X 101> 마지막 방송이 끝나자마자 탈락자 팬덤이 직접 표를 검산했고 마각이 들통난 것이다. 현 사태는 사회에 폭넓게 퍼져있던 선의가 배신당한 사건이라기보다 특정한 분야에 뿌리 깊게 박혀 있던 불신이 현실화된 사건에 가깝다. 오디션 방송은 십 년이 지났고 몇 년 전부터 확장력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시즌2 이후 대중성이 줄었고 시청률도 떨어졌다. 그럼에도 방송의 코어 팬덤은 줄지 않았지만 시즌3부터는 '아이돌 팬덤만 보는 방송'이란 냉소가 신문 지상에 가득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공정한 경쟁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배신당했다고 한다면, 제작진 스스로 ‘국민 프로듀서’란 이름을 남발한 대가이긴 하겠으나, 수사적 비약이고 현실과 맞물리지 않는 면이 있다.
물론 그럼에도 투표 조작은 공정성의 가치를 해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문제가 있다면 수사적 과잉이 흘러넘쳐 역효과를 내는 면도 있다는 사실이다. 잔뜩 팽창한 도덕적 징벌의 어법이 투표 조작을 일으킨 책임자가 아니라 엑스원과 아이즈원에게 쏠리면서 본질이 뒤바뀌었다. 경찰 수사는 지난 7월에 시작돼 11월이 된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았고 그동안 공중파 메인 뉴스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수사가 늘어지는 동안 언론은 의미값 적은 동어반복의 기사를 무수히 생산했고, <프로듀스> 사태는 만성적 이슈가 되어 다른 사회 현안을 침식하고 있다. 이 모든 정황이 사안의 중대성이란 명분으로 정당화되는 경향이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장기간 미해결된 사회 의제로 다루어질 사안인지는 동의하기 힘든 면이 있다. 도리어 지지부진한 수사 전개는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 진상위의 피로감을 가중하고 있는데, 재발 방지와 같은 후속 조치로 논점을 옮기기 위해서라도 더 빨리 결론이 나왔어야 했다.
오디션 방송의 문제점이 과연 <프로듀스>나 엠넷에만 머무는지도 의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다방면의 이권이 깊이 개입될 만큼 흥행하고 롱런한 사례가 엠넷의 오디션 방송 외에 드물다고 해야 한다. 여타 방송사 역시 엠넷을 따라 오디션 방송을 론칭했었다. 대부분 흥행에 실패했고 그 나름의 도덕적 스캔들을 일으켰다. 역시 아이돌 오디션 방송이었던 JTBC <믹스나인>은 인격모욕적 심사평이 도마에 올랐었고, 데뷔조의 프로듀싱을 맡기로 약속했던 주체가 사라지면서 데뷔조는 뽑혔는데 데뷔하는 사람은 없는 초유의 사태를 낳았다. 올해 초 방영된 MBC 힙합 서바이벌 방송 <킬빌>은 경연에서 우승한 래퍼를 미국 유명 프로듀서 DJ 칼리드와 작업하게 해주며 빌보드 차트를 정복하겠다는 알 수 없는 취지의 기획이었다. 그마저도 칼리드와 연락이 끊어져 버리며 방송이 중단되고, 우승자는 나왔는데 우승의 수혜는 받지 못하는 황당한 사태가 생겼다. 래퍼 비와이는 언론 인터뷰 등에서 제작진의 책임 있는 대응이 없었다는 취지로 깊은 상실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아가 공중파 가요 순위 프로그램들 또한 투표 집계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에 수차례 휩싸인 적이 있고 결과가 번복된 적도 있다.
이런 사례들엔 방송국들이 지닌 보편적 권력과 방송 윤리는 물론, 주최 측이 참가자, 기획사에 대해 압도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갖는 오디션 방송, 가요 프로그램의 보편적 문제가 있을 것 같다. 현재 CJ E&M을 질타하는 여타 방송국과 지상파 방송이 남의 집 불구경 하듯 이 사안을 보도해선 안 되며 그 자신을 성찰의 대상에 포함해야 할 이유다.
정치인들과 검경, 언론은 사태에 목청을 키우며 불공정 사회를 척결하는 열쇠처럼 한목소리로 지목한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불공정한 사회는 <프로듀스>라는 방송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 일각으로 서 있었을 뿐이다. 많은 청년을 좌절케 한 것도 지금껏 청년 실업난을 해결하지 않은 정치인과 관료들이다. 젊은이들이 제기하는 단발성 민원에 유튜브를 켜고 암행어사처럼 응답하기는 쉽다. 쉽지 않은 건 어떤 이슈화를 통해 유권자들이 주목하지 않는 평상시에도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하며 재벌기업의 문어발 사업 확장과 수직계열화를 규제하는 제도를 세우는 일이다. 현 사태는 일개 방송 PD와 기획사의 유착을 넘어 자사의 오디션 방송 데뷔 그룹을 자사의 레이블에서 운영하는 수직계열화의 토양에서 태어났는데, 정치인들이 이 구조를 견제하는 법안을 진작 마련했다면 투표 조작은 이만한 규모로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정 사회의 키워드가 걸린 사안이니 엄중 수사하겠다”는 준열한 선언은 어떻게 보면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오디션 방송에 그 책임을 전가하며 내 손으로 공정성을 일으켜 세우고 있노라 퍼포먼스를 하는 것일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이슈가 기층에서부터 조직되고 재생산된 양상을 보아야 한다. <프로듀스> 논란은 공중파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상태지만, 이슈를 적극 소비하고 유통하는 것은 기존 <프로듀스> 시리즈 팬덤, 나아가 전체 아이돌 팬덤 리그 구성원이라 짐작된다. 일례로 특정 아이돌 팬덤 커뮤니티는 압도적 버즈량으로 해당 논란을 재생산하고 있고 커뮤니티마다 엑스원과 아이즈원의 해체를 종용하는 동일한 게시물이 무더기로 공유되었다. 이러한 이슈화 양상이 느린 걸음의 수사 전개와 맞물려 끊임없이 사태를 선정적으로 달구고 논점을 프로듀스 그룹의 존속 여부로 몰고 간다. 그리고 그 바깥에 있는 기자들이 커뮤니티 내부의 주의주장을 받아쓰며 사회 전체의 여론처럼 공식화하여 착시가 일어난다. 여기에는 프로듀스 그룹이 방송을 통해 팬덤을 규합하며 전체 팬덤 시장에서 방대한 지분을 차지한 채 데뷔해 여타 아이돌 팬덤에게 그들을 견제할 동기가 생긴다는 배경이 작용하는 것 같다.
어디에서도 이야기되지 않는 쟁점 한 가지가 있다. 아이돌 산업에서 팬덤이란 집단은 어떠한 존재에 이르렀는가. <프로듀스 X 101> 탈락한 연습생 팬덤은 마지막 방송 직후 즉각 의혹을 제기하고 공론화하고 진상위를 꾸리고 변호사를 선임해 사회 전방위적으로 부당함을 호소하며 엠넷과 단호히 전선을 그었다. 이 모든 결행이 팬덤 내부의 조직력과 결속력, 실행력을 통해 이루어졌고, 해명은 필요 없다며 빳빳하게 고개를 들던 엠넷은 결국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내몰렸다. 정치인과 공중파 언론, 검경까지 발을 들이며 올 하반기 최대의 뉴스가 된 이 사건은 오디션 방송의 시청자, 아이돌 그룹의 팬덤이 불을 지피고 이끌어 온 것이다. 이제 아이돌 팬덤은 능동적 소비자나 열성적 서포터, 기획사와 힘겨루기를 하는 존재를 넘어 강력한 목적의식에 따라 자신들이 소비자로 참여하는 거대 플랫폼을 한순간에 폐기하고 사회에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엠넷 제작진의 또 다른 치명적 실책은, 그들이 몇 시즌 동안이나 함께해 온 시청자들의 힘과 습성, 그들이 연습생들과 맺은 애착감정 및 상실감의 깊이를 간과했다는 사실이다. 프로듀스 사태를 넘어 케이팝 산업 전역에 고요히 울리고 있는 전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