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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Mar 15. 2021

구심점으로서의 아이돌

미야와키 사쿠라

미야와키 사쿠라에겐 팬들과 소통하는 일상적 채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팬들에게 메일을 보내는 모바일 서비스 ‘아이즈원 프라이빗 메일’이다. 나머지 하나는 일본에서 활동할 때부터 매주 진행해 온 라디오 방송 ‘사쿠노키’(오늘 밤 벚꽃 나무 아래에서)다. 사쿠라는 두 채널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 하루하루의 일과, 동료들과 겪었던 일, 지금 좋아하는 관심사 같은 신변잡기는 물론, 때로는 머리를 맴도는 생각, 아이돌로서 품고 있는 고민과 같은 내밀한 이야기를 전한다. 스스로 느끼기에 무대에서 빛났던 순간, 반응이 컸던 SNS 사진에 관해 수다를 떨며 기뻐할 때도 있다. 많은 케이팝 아이돌은 아이돌 개개인의 사적 채널은 닫아놓고 그룹의 공식 계정으로 소통한다. 사쿠라는 물론 사쿠라의 팬들에게도 프라이빗 메일과 라디오로 소통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케이팝의 산업 지형 속에, 사쿠라가 이채로운 부분 역시 크고 작은 내면 풍경을 열어 보이는 인격적 표현행위다.     


사쿠라의 별명 ‘걸꾸라쉬’가 그렇다. 걸 크러쉬는 강하고 스타일리시한 여성상을 뜻하는 아이돌 콘셉트다. 사쿠라가 걸 크러쉬를 잘 소화하거나 어울리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붙은 별명은 아니다. 오히려 동 떨어진 이미지였고 강한 콘셉트를 소화하기엔 서툰 모습도 보였지만, 그래도 도전하고 싶다고 의욕을 웅변하며 좌충우돌한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가리키는 별명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건 ‘꾸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쿠라의 소박한 모습과 걸 크러쉬라는 콘셉트 사이의 갭이고, 동경하는 콘셉트를 해내고 싶다고 시시콜콜한 욕심을 부리는 곰 살 맞은 주체성이다. 어쩌면 이런 부분이 제이팝 아이돌로 수년 간 활동하다 한국에서 데뷔하게 된 케이팝 아이돌 사쿠라의 여정을 요약해주는 힌트 일지 모른다.     


새로운 환경에 도착해 이전에 해보지 못한 힘 있고 멋있는 콘셉트에 빠져든다. 자신의 이미지와 콘셉트 사이엔 ’갭‘이 있으므로 바람은 충족될 수 없지만, 어떤 모습의 내가 되고 싶다는 ’지향성‘이 발휘된다. 데뷔 10년 차 아이돌 미야와키 사쿠라의 모험은 여전한 현재 진행형으로 유지되고, 사랑스럽고 활기 어린 성장 서사가 펼쳐진다. 케이팝 신에서 음악과 퍼포먼스, 비주얼의 정형화된 콘셉트로 통하는 걸 크러쉬가 사쿠라에겐 아이돌로서의 캐릭터와 인격적 자기표현을 구성하는 서사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 사쿠라가 작년 4월 단독 콘서트에서 긴 생머리를 붙이고 등장해 성숙한 무드의 댄스곡 ‘AYAYAYA‘를 연행해냈을 때, 팬들이 놀라움과 대견함을 느끼게 한 내러티브다.      


사쿠라가 지닌 퍼포머로서의 재능 역시 표현력이다. 노래 분위기에 따라 얼굴 표정이 햇살과 얼음장 사이를 오간다. 밝고 앳된 노래 ‘Oh My’에선 ‘사랑스러움’이란 단어의 용례를 박자 단위로 잘게 나누어 끝없이 풀어내듯 1초마다 표정 연기가 바뀐다. 박자감이 강하고 멜로디가 시크한 ‘라비앙로즈’에선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 무표정에 가깝지만 프라이드와 서늘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팔 동작을 뻗고 카메라를 내려다본다. 노래 구간 구간의 멜로디와 박자감, 노랫말을 해석하는 이해력과 창의성이 있고, 그걸 얼굴과 몸짓을 거쳐 마음먹은 대로 재현하는 감각과 프로페셔널함이 있다. ’걸꾸라쉬‘란 별명과 무관하게, 실은 그에겐 어떤 무대든 소화할 수 있는 잠재력이 충만했었다. 사쿠라는 <프로듀스 48> 초반까지 퍼포머로서 정적인 유형의 재능은 탁월했지만 케이팝 식 댄스 기능은 전무했었다. 아이즈원 데뷔 전후 하드 트레이닝을 거쳐 짧은 시간에 댄스 기능이 크게 늘었고 그 과정을 지켜본 팬들은 드라마틱한 진폭의 감격을 얻었다.

  

사쿠라는 이따금 마치 소년 만화의 주인공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구쟁이처럼 좌충우돌하는 모습, 장난꾸러기 같은 활달한 모습, 무엇보다 아이돌로서 강한 상승 의지를 품고 있고 그것을 발설하기를 망설이지 않으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다. 사쿠라의 팬들은 팔색조 같은 일면들에 매력을 느끼고, 인격적 친근함에 젖으며, 사쿠라가 품은 지향을 공유하게 된다. 그곳까지 그를 데려가고 싶다는 마음, 그를 따라가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이를테면, 팬덤이 아이돌의 서포터를 자원하는 것을 넘어, 아이돌이 팬들에게 어떤 구심점으로서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관계성이 사쿠라와 팬들을 묶어주는 유대감의 열쇠고리다.  


2019년 11월 이후 아이즈원 활동 공백기 동안 트위터에는 “우리는 사쿠라와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라는 해시태그가 게시되며 실시간 트렌드에 올랐었다. 보통의 팬덤이 아이돌을 응원하기 위해 쓰는 해시태그에는 지켜주겠다거나 힘을 잃지 말라고 격려하는 문장이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저 문장에서 미야와키 사쿠라라는 이름은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추동하는 구심점의 자리에 들어가 있다. 팬들이 사쿠라에게 느끼는 지지자로서의 마음, 운명 공동체로서의 심리가 녹아있다.     


이건 사쿠라가 속한 아이즈원의 특수성과도 연결된다. 아이즈원은 활동 공백기 이후 컴백 앨범을 내며 초동 35만 장을 팔았었다. 오랜 공백기에도 팬덤이 흩어지지 않고 결속해 있던 건 아이돌과의 긴밀한 유대감이 없다면 상상하기 힘들다. 데뷔 이래 아이즈원의 활동 노선은 팬덤과의 유대감을 고백하는 데 특화돼 있었다. 걸그룹이 취할 수 있는 음악에는 무정형의 대상을 향한 사랑 노래나 당당함을 과시하는 ‘걸 크러쉬’ 등이 있다. 아이즈원의 노래는 자신이 무대 위에서 피어남을 느끼는 순간을 표현한다. 그러면서 사랑 노래의 전형성에서 벗어나 있거나, 사랑 노래의 문법을 취하는 순간에도 암묵적으로 호명하는 대상이 팬덤이다. 무대 위의 ‘내’가 있고, 나를 지켜보는 ‘너’를 부르며, '네'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노래한다. 너와 나, 1인칭과 2인칭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아이돌과 팬덤의 공동체가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케이팝 산업의 주된 수익원은 음반과 음원, 무대 행사 같은 음악 콘텐츠에서 팬덤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아이돌 굿즈로 바뀌었다. 미야와키 사쿠라와 아이즈원은 캐릭터 산업-팬덤 산업으로 재편된 케이팝 신에서, 팬덤과 아이돌이 어떻게 동반자가 되어 가는지 알려주는 사례다. (2020/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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