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야왕> (2013)
어둠, 심연, 죽음, 그리고 여성. 그들은 하나이다. - Wolfgang Lederer
인류 역사의 양피지엔 ‘여성-괴물’의 기록이 점점이 뿌려져 있다. 신비한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해 선박을 좌초시킨 사이렌. 촘촘한 뱀 다발 머리칼에 검치호 같은 이빨이 박힌 메두사. 원시 신화에선 이빨 달린 질, 거세하는 성기 바기나 덴타타Vagina Dentata의 도상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근세 유럽의 마녀들은 어떠한가. 그것들은 식인과 살인, 거세, 태풍과 화재, 저주와 돌림병의 사악한 원흉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큘라>에 시녀처럼 등장하는 여성 뱀파이어들도 떠올려보라. “모든 인간 사회는 충격적이고, 공포스럽고, 끔찍하며, 비천한 여성괴물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바바라 크리드, 『여성괴물』monstrous feminine)
2013년 7월 26일, ‘남성 인권’ 보장과 ‘역차별’ 철폐를 주장하던 시민단체 대표가 ‘단돈’ 1억을 위해 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허망한 죽음은 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다. 강물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칠흑 같은 물길을 일으켜 다만 고요히 흘러간다. 그때, 나는 수면에 뜬 그림자를 보았다. 우리 사회에 드리운 불길하고 위험한 얼룩을. 저 기이한 파문을 자아내는 심연 속에서, 지금 떠오르고 있는 하나의 유령을. 무엇을? 바로 여성 혐오misogyny, 반여성주의antifeminism라는 망령을!
인터넷의 여항을 거니노라면 문득 아득해지곤 한다. 사치와 낭비로 치장하는 ‘된장녀’, 내 남자에게 감사할 줄 모르고 삿된 요구를 퍼붓는 ‘보슬아치’, 이 남자 저 남자 등쳐먹으며 팔자 고칠 궁리나 하는 ‘김치녀’, 깜냥도 없이 어깃장을 일삼는 여성가족부 ‘꼴페미’. 그곳은 염치없고 상식 없고 ‘더치페이’ 없는 ‘무개념녀’의 군상이 성토당하는 소굴이다. 나는 지금 일간베스트 저장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좌우를 막론하고 숱한 남초 커뮤니티에서 여성 혐오는 기승을 부린다. 놀라운 것은, 출처를 확인할 길 없는 허황한 풍문들이 별다른 의심도 없이 승인돼 버린다는 사실이다.
여성 혐오misogyny는 뿌리 깊고 유구하지만, 2013년 한국에선 젊은 남성들이 대오를 이룬 채 전에 없던 노성을 터트리고 있다. 근래 방영된 일군의 드라마는 의미심장한 징후를 품고 있다. 거기서 남성과 여성의 위상은 도치돼 있으며, 남근적 환상이 굴절되고 이지러져 있다. 이제 여성 혐오의 지반과 장르의 계보를 아우르며 텍스트 비판을 수행할 것이다. SBS 드라마 <야왕>은 명명백백한 여성 혐오 텍스트다. 앞으로의 글은 이것을 증명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주다해는 사람 잡는 마녀야. 마녀는 사냥을 해야 해!” (<야왕> 18회)
1913년, 일본 근대 장편소설 <금색야차>를 번안한 소설 <장한몽>이 발표되었다. 우리가 아는 ‘이수일과 심순애’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었다. 둘은 사랑하였지만, 여자는 부를 가진 남자 품으로 떠난다. 애정과 재물이 밀고 당기는 트라이앵글 안에서, 홀로 남겨진 남자는 배신의 아픔에 사무친다.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리도 좋더냐?”
1978년, MBC 주말 드라마 <청춘의 덫>이 전파를 탔다. 역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었다. 둘은 사랑했지만, 이번엔 남자가 여자를 떠난다. 다이몬드에 눈이 먼 심순애는 지조 없는 행실을 뉘우치고 성공한 정인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70년대 한국에서 윤희(<청춘의 덫> 여주인공)가 자수성가할 방도는 없다. 그녀는 이수일처럼 일확천금을 상속받을 수 있는 적자도 아니다. 여자는 의연하게 삶을 건사하는 대신 복수를 택한다. 똑같이 사랑으로 권세의 동아줄을 엮고, 천벌이 아닌 사람의 벌을 집행한다. 안타깝게도, 시대는 윤희의 징벌을 허락지 않았다. 반인륜적 이야기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드라마는 강판당했다.
1995년엔 KBS 주말드라마 <젊은이의 양지>가 방영되었다. 또다시 남자가 배신하였고, 버려진 여인은 그저 무능하고 가련하였다. 야비한 과거를 꼬리 밟힌 남자는 죗값을 치르고 추락한다. 1999년엔 <청춘의 덫>이 돌아왔다. 못다 한 이야기의 끝에서, 남자는 회개하고 여자는 확고한 신분상승을 이룬다. 둘은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고 갈등과 미움을 봉합한다.
<장한몽>은 한국 근대 초기 신파극의 원조다. <장한몽> 서사는 면면하게 되풀이되며 변주되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안정적 이행을 거치지 않은 ‘압축 근대’ 사회의 여전한 반反근대성의 방증이라 볼 수 있을까. 서사의 전승 속에 이뤄진 남-녀 역할 맞바꿈과 상이한 결말은 젠더/섹슈얼리티 이념의 변천을 반영할 게다. 1999년에 돌아온 <청춘의 덫>이 제출한 나름의 진보적 결론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청춘의 덫>이 <장한몽>의 남녀 체위를 뒤집고 신파극을 복수극으로 이끌었다면, 2000년대에 들어선 또다시 반전이 발생한다. 나는 그 시발점이 2010년 SBS 드라마 <나쁜 남자>라 말하고 싶다. 뒤이어 2012년 KBS <착한남자>, 2013년 SBS <야왕>, KBS <상어>가 등장했다. 이 드라마들은 공히 복수극이며 ‘나쁜 남자’(또는 ‘착한 남자’)들은 복수를 위한 사다리 삼아 상류층 여성의 아랫도리에 올라탄다. 연인의 배신이냐, 가부장에게 버림받은 원한이냐, 복수의 동기가 다를 뿐이다. <장한몽> 서사는 또 다른 원형을 받아들여 포섭한다. 배신당한 남자가 신분을 숨긴 채 밑바닥에서 귀환하는 복수극이란 점에선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닮았다. 남근적 마력으로 여성들을 농락한단 점에선 ‘카사노바’의 자식이다. 특히 <야왕>에선 이런 세 가지 원형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이 드라마들의 기제가 대리만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는 점이다.
남성의 쾌락 원천은 페니스Penis다. 남성들의 관념 속에서 여성의 쾌락은 페니스, 남근에 종속된다. 포르노그래피의 정의는 다기하지만,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포르노그래피의 정석이 ‘쾌락에 의한 지배’라고 규정한다. 폭력도 권력도 재력도 아닌 쾌락. 남근에 의한 지배. 이것이야말로 “지배를 받는 쪽의 자발적인 굴복”을 끌어내는 궁극의 지배다. 포르노그래피는 근육질 배우들의 ‘근원적 탁월함’을 전시하며 여성을 정복하는 판타지다. 돈도, 스펙도, 배경도 없는 남성이 수컷들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모든 사회적 자원의 가치를 단숨에 제압하고 여성을 차지하는 남근이다.
남성 복수극의 주인공들은 유능하고 매력적이다. 그들은 매혹적 아우라와 능란한 연애 테크닉을 겸비하고 있다. 부도 지위도 없이(또는 그에 의지하지 않고) 남근적 마성으로 상류층 여성을 유혹한다. 여기서 남근은 합목적성의 삽과 괭이거나, 부와 지위를 끌어오는 갈고리다. 남자는 여자의 쾌락뿐 아니라 인격과 정서, 때론 사회적 자원까지 지배한다. 이런 관점에서, <야왕>과 그 형제들은 유사-포르노그래피이다. 포르노그래피 서사는 복수극의 플롯과 만나 카타르시스에 종착한다. <야왕>에선 복수의 대상이 자신을 버린 여성이며 명확한 응징에 성공한다. 이것이 가부장제도의 균열에서 비롯한 사태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가부장제도는 권위에 의해 작동한다. 그 핵심은 혈연단위 집단과 부계 전승의 권력, 재산 상속이다. 가부장제는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제도다. 한편, 근대적 의미에서 가부장 제도는 결혼 계약의 산물이다. 회의적으로 말하면 ‘내 여자’에 대한 권리 보장이며, 긍정적으로 보면 자발적 만남과 이별의 가능성을 지닌 결합이다.
치정 복수극 <야왕>에는 가난한 남자 하류와 더 가난한 여자 주다해가 있다. 여자는 아름답고 총명하지만 표독한 성정과 위험한 야망을 품고 있다. 남자는 ‘남창’이 되길 불사하며 헌신하지만 여자는 떠난다. 자신의 꿈을 이뤄줄 다른 남자의 품으로. 하류와 주다해는 각각 전근대와 근대의 시공을 겹쌓아 가부장제를 전유한다. 주다해는 가부장 제도를 위협하되 해체를 도모하는 인물이 결코 아니다. 더 크고, 더 많은, 더 강한 가부장의 권력을 원할 뿐이다. 그녀에게 사랑은 삶을 도모하는 계약이며 거래다. 반면, 하류에게 결혼은 법과 계약이 아닌 인륜과 천륜이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거나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관계란 설정은 재미있다. <야왕>의 결혼은 계약과 제도가 아니다. 사랑이며 의리이다.
전근대적 중매결혼은 도덕과 관습이었다. 거래의 자유가 낮은 대신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익 분배가 보장되었다. 자본주의 시대 가부장제도는 물질적 토대에 기초한다. 성과 사랑은 자유시장경제의 상품이다. 결혼시장의 성세는 번창하고 있다. 가부장이 제공하는 급부가 클수록 그의 권위는 굳건해지며, 가족의 결속도 단단해진다. 문제는 사회 구성원들 경제적 여건이 점점 하향 평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남자 하류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오직 사랑과 헌신, 가치와 당위다. <야왕>은 불황의 질곡 속에서, 가부장제도 재생산 대열에서 낙오할 수 있다는 수컷들의 두려움을 토한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이브 세지윅의 호모 소셜homo social이란 개념을 소개한다. 호모 소셜은 성적 주체로 승인받은 남성들 간의 연대다. 남성의 성적 주체화의 지렛대는 여성의 성적 객체화다. 성적 주체로 승인받기 위한 조건은 ‘자기 여자를 소유하는 것’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를 ‘여성 혐오’라 정의한다. 히코사카 다이는 『남성 신화』에서 전시 집단강간의 목적이 남성 간 연대감 고양이라 주장한다. 남성 집단의 연대는 여성이란 ‘공통의 희생자’를 먹잇감으로 성립한다. 그렇다면, 치정 복수극 <야왕> 또한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주다해는 자유롭게 남성을 간택하고 헌신짝 취급하며 성적 주체화를 어지럽히는 ‘마녀’다. 주다해가 거쳐 간 세(네) 명의 남자가 있다. (주다해가 살해한 양부)-하류-백도훈-석태일. 남자들은 연적에게 우정을 느끼거나, 결국엔 주다해에게 등을 돌리고, 범죄의 증거물, 사체로서 돌아오며 파멸의 포위망을 구축한다. 이것은 모든 남성이 ‘공통의 희생자’를 처벌하며 정체성을 승인받는 집단 제의가 아닌가.
한편, 의미심장한 것은 하류의 복수가 개시되는 임계점이다. 경제적 착취와 외도, 별거, 살인죄의 전가. 주다해의 숱한 패악에도 묵묵히 인내하던 하류는 그들의 딸 은별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드디어 심판을 거행한다. “주다해, 내가 널 죽일 거야.” 극의 정황상 은별이 숨진 책임을 온전히 주다해에게 물을 수 없는데도 말이다. 가부장제도가 여성에게 마련한 자리, 어떤 상황에서도 방기해선 안 되는 최후의 보루는, 가족성원을 생산하고 양육하는 어머니의 역할, 모성이다. 그녀는 가부장제의 역린을 거슬렀다. 그것이 주다해의 죄목이다. <야왕>은 가족 단위 시청자들이 딛고 있는 근본적 합의 위에 복수극의 무대를 설치한다. 이것은 상징적 질서를 일탈한 ‘괴물’을 처단하는 전근대적 가부장의 단죄이다.
<야왕>의 주다해는 군중의 공분을 들쑤시는 악녀다. 지금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자. “혹시 드라마 <야왕>을 보셨습니까?” 백이면 백 이렇게 답할지 모른다. “아, 주다해. 그 나쁜 년?” <야왕>은 지극히 작위적인 시추에이션으로 주다해를 몰아넣고 극단적 선택을 강요한다. <야왕>은 이성 파트너를 교체하는 주다해의 배신을 따라 계단 구조로 설계돼있다. 주다해는 헌 남자를 버리며 새 남자를 만나고, 그때마다 그녀의 악행도 새로운 지평을 연다.
재미있는 것은 하류의 복수가 주다해를 막다른 구석으로 몰아넣으며 실린더처럼 악행을 추동한다는 점이다. 주다해는 점점 더 악업의 수위를 높여가고 그에 따라 죄책감도 희미해진다. 다해-양부가 일방적 피해자 관계였다면, 다해-하류는 애정으로 묶여 있되 반자발적으로 배신하는 관계다. 다해-백도훈은 입신을 위한 정략과 애련한 고마움이 뒤얽힌 관계다. 다해-석태일에 이르러선, ‘퍼스트레이디’를 쟁취하기 위한 완벽한 도구적 거래관계가 성사된다. 그녀는 기둥서방을 갈아치우며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남자 잡아먹을 년man-eater이다. 총 24회를 거쳐 플롯은 한 계단씩 오르며 더 센 악행을 재현하고, 그 총합은 무시무시한 수준으로 누적된다. 탐욕을 위해 순정을 배신하는 허영으로 가득 찬 타락한 존재. 그러므로 “주다해 그 나쁜 년”이란 말을 이렇게 바꾸어도 위화감이 없다. “아, 주다해. 그 ‘김치 년’?”
전통적 프로이트 이론에서 거세하는 자는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거세된 자다. 논문 『메두사의 머리』에서 프로이트는 말한다. “…메두사의 잘린 머리의 경우에 해석은 쉽게 그 자신을 드러낸다. …이는 거세되었기 때문에 위협하고 쫓아내는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재현이다.” 남성을 향한 여성의 적개심을 야기하는 것은 ‘페니스 선망’이다. 바바라 크리드는 『여성괴물』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에 도전하며, 거세하는 질 ‘바기나 덴타타’를 내세운다. 바바라 크리드에 따르면, 여성이 두려운 것은 그녀처럼 거세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거세하기 때문이다. 바바라 크리드는 공포 영화가 ‘거세당한 존재로서의 여성’과 ‘거세하는 자로서의 여성’ 모두를 재현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전자는 “상징적으로 거세되었기 때문에 사이코 괴물”로 변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정당한 운명을 부당하게 박탈”당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괴물이 된다. ‘거세하는 자로서의 여성’은 정신 질환자이거나, 자신을 강간한 자들에게 복수하는 여성이다.
보육원에서 자랐으며 지독한 가난에 시달린 주다해의 성장배경은 상징적으로 거세당한 여성괴물의 관습적 재현과 닮았다. 주다해의 결핍은 권력을 추구하는 강력한 동인이다. 그녀는 어떤 여성성이라 공인되는 것과 거리가 먼 남성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자신이 거세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가부장제의 호명Interpellation을 거부한다. <야왕>에는 통속적 남근의 기호가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하류가 처음 몸담고 일하는 곳은 커다란 ‘마구간’이다. 주다해는 거기서 양부를 살해하고 암매장한다. 그 기억은 악몽처럼 귀환하고 그녀는 도망친다. 남근에 대항하며 지배력에서 벗어나려 한다. 백도경은 백학그룹의 장녀이자 자신의 아들(이지만 동생이라 호적에 등재한) 백도훈에게 거의 동물적 모성을 퍼붓는 인물이다. 그녀는 ‘승마클럽’ 사업에 빠져 있고, 승마를 낙으로 여기며, 자신의 ‘애마’를 신줏단지처럼 아낀다. 말하자면 남근 숭배. 그녀는 투철한 모성의 담지자, 가부장의 충직한 하인이다. 주다해와 사사건건 맞서고 대결하는 인물이 백도경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거세하는 자로서의 여성을 말하는 슬래셔 무비는 성적으로 학대당한 여성 사이코패스의 복수극을 다룬다. 주다해는 어린 시절 양부에게 성추행당했다. 자의든 타의든, 그녀는 거듭해서 ‘남근’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그녀의 마지막 종착지, 석태일은 전통적인 가부장의 언동을 재현하는데, 주다해와 손잡은 후론 비굴한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수중에서 놀아난다. 고개 숙인 남근. 우리는 주다해가 무너진 가부장제도의 피해자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녀는 고아였다. 그녀의 양부는 올바른 가장의 역할을 저버린 비열한 남근이다. 가부장제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주다해의 일그러진 욕망도 없었을 것이다. <야왕>은 다른 의미에서 또한 복수극이다. 자신을 저버린 가부장‘들’을 향한, 거세하는 여성-괴물, 주다해의 복수극이다.
드라마 <야왕>은 오늘날 가부장제도의 쇠락을 영사한다. <야왕>의 가족들은 모조리 모성이 작동하지 않거나 편부 가정이다. 여기서 괄호 쳐진 것은 여성, 아내, 모성의 자리다. <야왕>은 주다해를 부정적 여성상의 전형으로 묘사하는 한편 그 대립항에 이상적 여성상을 붙박아둔다. <야왕>에서 유의미하게 관측되는 편집 기법을 꼽자면 인물 간 숏의 전환이다. 주다해를 잡은 장면이 끝나면 대개 석수정의 숏이 따라 붙는다. 석수정은 순종적이고, 다정하고, 시아버지에게 싹싹하고, 허영 따위 모르는 ‘개념녀’다. 이 숏의 이행은 여성괴물에서 현모양처로의 이행이다. 반면, 백지미는 알콜 중독에, 도박 중독에, 사치와 낭비에, 나이를 먹고도 오빠의 호주머니나 털어먹는 게으르고 나약한 ‘보슬아치’다. 주다해와 암암리에 공모하여 가족을 무너트릴 궁리를 하는 가부장제의 트로이 목마다.
<야왕>의 결말은 여러모로 곱씹어 볼 의미가 있다. 하류의 복수는 드디어 성공한다. 드라마는 주다해를 죽여 버린다. <야왕>은 1회가 23회로 연결되는 플래시백-액자구조를 취한다. 드라마 1회가 시작하며 하류는 주다해와 청와대에서 대면한다. “주다해, 다 내려놓고 네가 있던 원래 자리, 달동네로 돌아가.” 악녀는 돌아가지 않는다.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질주하다 쓰러진 채 불귀의 객이 된다. 드라마는 이 흉흉한 결말을 무마하려 애써 온기어린 후일담을 보여주려 든다. 아빠와 엄마, 은별이. 세 가족이 살던 달동네 집에서 홀로 남은 하류의 환상이 재생된다. 은별이가 엄마를 찾는 순간, 이미 죽어버린 주다해가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연다.
그리도 지키려 했지만 지킬 수 없었던 단란한 가족은 모든 것이 부서진 후에야 허락된다. 다소 어둡게 말하면, 떠나간 계집의 숨통을 끊어서라도 ‘원래 자리’로 끌고 올 만큼 이 원념은 지독하다. 이것은 가부장제도의 대안 질서가 부재한 현실을 반영하는 분열적 결말이다. <야왕>은 현실의 도피처로서 이상화된 관념, 해피엔딩을 택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 없다. 전근대적 향수와 근대적 난관이 실키는 첩경 속에 가부장제는 위기를 맞았다. ‘무능한’ (예비)가부장은 낙오의 위협에 처했지만, 비루한 감투를 내려놓을 수도 없다. 숱한 (상상적)‘역차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경제력이 사실은 남성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여권 신장이 이루어져 남녀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평등하다면, 권위를 이양하고 책임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가부장제의 재편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고용불안의 끝없는 터널 속에 남성은 한 발짝 앞서 간다. 이것은 과도기적 혼란이 아닌 항구적 불균형에 가깝다. 이곳에 대안은 도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야왕, 하류의 목적은 재건이 될 수 없다. 심판이며 복수이며 처단이며 원한의 분출이다.
주다해는 근본을 버리고 각이한 계급의 남성을 착취하며 권력의 꼭대기를 향해 등반한다. 갈수록 추악해지는 욕망과 역치를 갱신해가는 악행 속에 어느 순간 여성-괴물이 된다. 그리하여 하류의 심판은 권선징악-사필귀정의 윤리적이고 자연적인 정의가 된다. 이 치정 복수극이 결과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신분상승을 향한 여성의 욕망이다. 남성연대의 발흥, 무너져 가는 가부장 질서, 불황과 ‘역차별’에 치이며 고개 숙인 남근. ‘능력남’에게 기생하는 ‘된장녀’를 향한 원한. SBS 드라마 <야왕>의 최종 시청률 25.8%. 그 한 움큼의 무의식이 귓가에 어른거린다. “주다해는 사람 잡는 마녀야. 마녀는 사냥을 해야 해!”
배신과 욕망의 화신, 그녀‘들’을 쓰러트려라. 야왕. (2013/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