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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Mar 22. 2024

인과관계없는 묫바람

<파묘> (박재현, 2024)

<파묘>의 도입부에서, 화림과 봉길을 차에 태워 가는 의뢰인 박지용의 회계사는 박지용 가족을 이렇게 형용한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인 사람들, 그러니까 “밑도 끝도 없는 부자”. 차후 박지용 가족이 친일파 후손임이 밝혀지는 극 중 사실에 비추면 저 말은 의뢰인의 출신에 관한 궁금증을 차단하려는 의도라고 해석될 수 있다. 한편, 태어날 때부터 부자란 표현은 부의 대물림이 마치 유전적 형질의 계승처럼 자연화된 현상으로 여겨지는 이데올로기에 부합한다. 어떠한 사회경제적 원인과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밑도 끝도 없이” 부자는 부자고 빈자는 빈자다. <파묘>는 이 자연화된 관념을 상기시킨 후 그에 대한 반론으로 한국 사회 계층 형성의 기원과 인과 관계를 제시하는 영화다. 알다시피 그 답은 ‘친일 잔재’다. 해방 후 청산되지 못한 친일 세력이 독재 정권 및 재벌·언론으로 변하고 서로 융합해 한국 사회 기득권 계층이 되었다. 이것이 한국 민족주의 사관의 정설이자 민주화 진영의 통설이 된 사회관이다. 이 통념을 소환하고 강화하기 위해 박지용 가족의 거주지가 미국으로 설정돼 있다. 국민적 적개심을 사는 현대판 매국노 ‘검은 머리 외국인’이 덧대져 있다.


<파묘>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행위가 있다. 속에 있는 것을 토하는 행위와 음식을 먹어 삼키는 행위, 게워냄과 섭식의 대구다. 영적인 존재를 몸에 덮어쓰거나 목격한 후 등장인물들은 격렬하게 토한다. 강령술을 한 봉길은 엑토플라즘처럼 대량의 액체를 입에서 쏟고, 무덤에서 혼자 오니를 목격하고 돌아온 상덕은 구토를 한다. 반면 백 년 동안 묻혀 있던 악지에서 해방된 악령은 자식을 찾아가 탁자 위 음식을 게걸스레 집어삼킨다. 게워낸다는 것은 위장 속 이물질에 대한 리액션이다. 영화에서는 몸과 영혼에 삽입된 외부의 존재, 트라우마를 새긴 경험에 대한 반동이다. 그 원인은 영적인 대상과 사건이므로 토한다는 신체적 행위를 통해 배출할 수 없다. 반대로 악령은 몸이 없는 존재이므로 아무리 먹어 치워도 허기를 채울 수 없다. 이렇게 어긋나 있는 영과 육의 대응은 그 자체가 쇠말뚝이자 문제의 배후 역할을 하는 오니가 제거된 후 제대로 된 인과관계를 찾는다. 봉길은 검은 피를 토하며 침입한 오니의 기운을 배출하고, 일행은 상덕의 병실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피와 살이 될 양분을 섭취하고 회복한다.


항간에서 말하듯이, <파묘>는 그 자체가 한국 사회의 과거를 파서 꺼내는 파묘와 같은 영화다. 그런 형식으로 연출돼 있다. 그 말은 한국 사회가 역사를 제대로 매장하지 못한 ‘묫바람’에 걸려 있다는 것이고, 현재의 사회 문제는 쇠말뚝으로 표상되는 역사의 잔재가 빚는 귀신병이 된다. 이것은 사회를 특정한 역사적 시점으로 소급해 인과관계를 환원하는 태도다. 공동체가 직면한 현실에 기원을 설정하고 사회악이 거기에서 태어났다고 믿는 건 재미있고 이해하기 쉬운 논리지만 아쉽게도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는 없다. 2020년대에 민족의 대를 끊을 기세로 추락하는 출생률이 일제가 남긴 잔재 탓은 아닌 것이다. 실은 그러한 환원적 논리는 쇠말뚝 같은 터무니 없는 매개체가 없이는 성립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과 단순화가 심하다고 말해야 옳다. 다소 느닷없이 마무리되는 엔딩은 이상과 같은 인과 관계 부재의 증상이다. 오니와의 사투 끝에 쇠말뚝을 제거했음에도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변한 것도 없다. 어떤 공적인 것도 회복되거나 발전하지 않았고 인물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흩어졌다 결혼식장에 모인다. 당연하다. 애당초 쇠말뚝 때문에 훼손된 것이 아무것도 없고 감독 역시 훼손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적 사명감으로 발전된 주제의식이 클라이맥스 이후 갑작스레 사라지고 서사가 사적 차원으로 내려앉은 채 끝나 버리는 것이다. 이 영화 전후반부가 어색하게 접합된 느낌을 주는 이유도 한국형 오컬트 물에 일본 오니가 등장하는 장르적 이질감을 넘어 장르적 사건으로서의 파묘가 사회적 주제로서의 파묘로 이행하는 비약이 남긴 이물감에 있다.


<파묘>는 연출하기에 따라 좀 더 깊은 호흡의 사회 탐구가 될 수도 있었다. 감독의 전략은 이 사회에 남은 과거의 잔재들, ‘쇠말뚝’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니를 통해 최대한 알기 쉽고 자극적인 형상으로 일본적인 것 자체를 소환하는 것이었다. 한국적인 것을 성찰할 기회는 민족적 소속감만 호출해 외적을 향한 적개심을 독려하는 것으로 대치되었다. <파묘>에 문제가 있다면 민족주의 같은 이념의 과잉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수단화한 연출의 과잉이라고 봐야 한다. 사회적 메시지는 지극히 파편적이고 직설적인 대사로 발설될 뿐 유의미한 이념적 태도로 구조화되지 않는다. 배역 이름을 독립운동가 이름으로 짓고, 한반도 모양으로 포스터를 다시 촬영하는 등 민족주의에 입각한 각종 이스터 에그와 마케팅 방식은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어 ‘의미 깊은’ 입소문을 부르는 것 말고는 영화 내적인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다. 오니가 화림과 대치해 “(한국과 일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라고 부르짖을 때 그 말은 흡사 극장에서 한일전을 개최하고 싶어 하는 제작진의 노골적인 호소처럼 들린다. 이미 쇠말뚝 미신이 기각된 현실을 의식한 듯한 “99퍼센트가 가짜라도 1퍼센트는 어떡할 거냐!”란 대사는 사실 판단을 믿음의 문제로 바꿔 치는 어법이다. 영화가 현실의 이념을 불러오거나 이념에 편승하는 케이스는 적지 않다. 하지만 어떤 이념을 부추기기 위해 정립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을 구부리고 교란한다면 그건 일반적인 케이스 보다 특별히 나쁜 태도다. 이런 태도를 가진 영화가 천만 관객을 목전에 두며 상업적 대성공을 거둔 것은 한국 영화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학습 사례가 될까. 장재현 감독 자신은 과연 쇠말뚝이 진짜라고 믿기는 하는 걸까? 극장을 빠져나오며 떠오른 궁금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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