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은 왜 제목이 서울의 봄일까 궁금증이 드는 영화다. 서울의 봄은 박정희 사후 한국에서 민주화를 향한 희망이 열린 독재 권력의 공백기를 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에선 그런 희망을 인지할 수 있는 민주화의 흐름이 보이지 않는다. 서사 무대는 군 내부로 철저히 제한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 학생들의 모습, 혹은 민주주의를 향한 그들의 기대감은 재현되지 않는다. 대신, 서울의 봄을 무산시킨 존재, 전두광의 반란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민주화 항쟁 대 신군부가 아닌, 반란군과 진압군의 대결을 통해 민주화의 옛 기억을 소환한다. 이 어긋난 대당관계는 이태신을 위시한 일부 진압군 세력을 도덕적으로 미화하는 것으로 지탱된다.
영화에선 두 가지 욕망이 엿보인다. 하나는 상업 영화답게 가능한 많은 관객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이것은 천만 영화를 눈앞에 둔 현재 이뤄진 상태다. 다른 하나는 현실 정치에서 산업화 진영에 넘어간 권력(마치 짓밟힌 ‘서울의 봄’처럼)을 민주화 진영이 수복하는 데 개입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곧 있을 총선은 그 명시적 전선이다. 두 욕망은 모순된 것이다. 특정한 정파 색을 드러낼수록 그와 다른 정파적 성향을 가진 관객들을 향한 확장성은 제한된다. 이 모순이 미봉된 결과, <서울의 봄>은 민주화의 역사적 광경이 화면에서 지워져 있지만 민주화 진영의 존재를 암시하는 영화, 진압군 일부 장군이 민주화 진영을 대리하는 영화가 되었다. 이는 이태신 역의 모델 장태완이 군사 정권이 끝난 후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된 역사적 사실과 조응한다.
반란군과 진압군은 지극히 단순한 선악 이분법으로 맞세워져 있다. 타락한 군인 대 깨어있는 시민, 아니 ‘깨어 있는 군인’들의 도덕적 대결 구도가 전시되고, 정파를 막론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군인 정신, 원칙주의, 애국심 같은 보수적 가치가 직설적으로 설파된다. 반면 장태완의 실제 이미지와 상반되게 연출된 이태신의 지적인 분위기와 이상주의자 면모는 어딘가 모르게 학생 운동가를 연상케 한다. 결말에 이르러 전두광이 승리하고 ‘깨어 있는 군인’들이 밀실에 끌려가 고문받는 광경은 남영동에서 고문당하던 민주화 운동가들의 이미지를 슬며시 불러와 덮어쓴다. 전두광의 광적인 웃음소리가 극장을 울리고 관객에게 울분을 떠넘기며 영화의 막이 내릴 때, "한 번도 정의가 승리하지 못한 역사"라는 민주화 진영의 도식적 역사관이 현현한다. 반란군 세력은 문민정부에서 내란 수괴 혐의로 처벌받았음에도 엔딩 크레디트엔 그들이 영전한 이력만 나온다. 역사의 단죄를 받지 않은(것처럼 보여준) 악인들은 관객의 가슴에 응어리를 남긴다. 응어리가 해소되는 논리적 선택지는 현실에서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김성수 감독은 출세작 <비트>와 <태양은 없다>에서부터 MTV스러운 이미지를 연출하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분에서 그의 재능을 찾자면 스타일리시한 연출이란 지점에 머물지 않는다. 감각을 증폭하고 왜곡하는 편집과 촬영의 기교를 통해 액션에 강렬한 정동을 불어넣을 줄 알았고, 이것이 연출가 김성수에게서 주목할 지점이다. <비트>의 오토바이 질주 신과 <태양은 없다>의 이명 신이 대표적인 예다. 전작 <아수라>는 이러한 장점이 칼을 갈듯이 표현된 영화였다. 영화 내내 스크린에선 파토스가 들끓으며 수런거렸고, 비범한 연출을 파편적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서울의 봄>에선 이러한 기질이 액션이 아닌 드라마를 통해 발휘된다. <아수라>가 폭력의 끝없는 반복을 통해 관객의 심장을 움켜잡고 주물렀다면, <서울의 봄>은 관객의 감정을 반복해서 지분거리며 탄식과 분노를 쥐어 짜낸다. 그건 잘못된 역사를 막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역사의 현장을 참관하는 일이며 궁극적으로 전두광이 아니라 우리 편의 '트롤 짓'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차장 등 무능함과 보신주의로 일관하는 리더 집단의 작태는 우연하게도 나라의 리더 집단을 뽑는 내년 총선과 사다리 타기처럼 연결된다.
김성수 감독은 플롯을 다루는 데 서툰 감독이었다. <아수라>에서는 플롯을 거세하고 폭력으로 기승전결을 대신하는 해결책이 나왔다면, <서울의 봄>에선 역사적 실화를 플롯의 구조물로 가져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상당히 큰 틀의 허구를 품고 있다. 정상호 역의 실존 인물 정승화 참모총장은 영화와 달리 우국충정 때문에 전두환과 맞섰다고 볼 근거가 없다. 장태완은 강직한 태도로 반란군에 저항한 극소수 장군이었음은 분명하지만, 영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완전한 가공의 행적과 인물 설정을 꾸며 넣는다. 상관인 정상호 총장의 수경사령관 보직 임명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상식적으로 부자연스러운 장면도 들어 가 있다. 이태신에게 무욕과 청렴결백, 군 조직과 스스로 거리를 두는 반영웅 이미지를 불어넣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영화에선 반란군 일당이 내내 수세에 몰린 것처럼 표현된다. 반란이 무산될 위기가 반복해서 이어지지만 번번이 무산되는 것이 무산된다. 이렇듯 빌런이 위기를 겪고 회생하길 되풀이하다 최종적 승리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반복과 점증의 구조가 <서울의 봄>이 관객 정동의 목줄을 끌고 가며 플롯을 전개하는 양상이다. 반란이 실패할 뻔한 분기점은 크게 봐서 네 번 등장한다. 전두광이 국무총리 공관에서 체포될 뻔한 장면, 이태신이 행주대교를 홀로 막아 2 공수 여단을 회군시키는 장면, 이태신이 출동시키는 데 성공한 8 공수 여단이 철수하는 장면, 이태신이 병력을 끌고 전두광과 대치하며 포격을 지시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들은 모두 완전한 허구이거나 허구가 가미 됐으며, ‘트롤’들이 오판으로 전두광에게 살 길을 내주는 결말로 이어진다. 관객을 탄식으로 몰고 가는 목적은 기계적으로 달성되지만, 현실성의 비약과 작위적 전개가 돌출되고 ‘트롤’을 맡은 인물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으로만 묘사돼 유치하다.
맞은편의 이태신과 정상호, 김준엽과 공수혁을 보자.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반란을 막으려 하는가. 그들이 군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된다. 반란군이나 보신주의자들과 다른 ‘진짜 군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갔을 때 생긴다. 출동하는 이태신의 얼굴 너머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이 카메라에 잡힐 때, 그들이 지키려는 대상은 군대의 상명하복 체계를 넘어 나라의 안위라고까지 웅변된다. 정말로 반란을 용납할 수 없고 국가의 정통성을 수호하려 한 의인이라면 왜 그 점에서 신군부와 다를 것 없는 박정희 군부에는 충성했는가? 개개인의 소명의식은 그보다 상위의 사회적 가치와 어떻게 공존하고 상충되며 개인은 그 사이에서 어떤 실존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 역사의 맥락을 도려낸 채 반란군과 진압군의 구도에 역사를 욱여넣으면서 단선적 선악 구도가 그 안에 깔린 근본적이고 까다로운 질문들을 밀어냈다.
진압군에게 민주화 세력이 투영된 결과 이태신이 지키려 한 대상은 마치 ‘서울의 봄’인 것처럼 착시가 일어난다. 민주화가 상징하는 가치도 이태신이 걸머진 범정파적인 보수적 가치, 때론 민주주의와 충돌할 수도 있는 애국심과 군인 정신 등으로 뒤틀린다. 대선마다 제작된 민주화 진영의 프로파간다 영화들은 군사 독재의 맞은편에 민주주의라는 상투적이라 신물이 올라 오지만 오답이라곤 할 수 없는 가치를 세워 놓기라도 했다. <서울의 봄>은 그들과 같은 욕망을 공유하지만 그것을 어긋난 가치구도로 표현하며 내용 없고 허구적인 선악 이분법을 노정한다. 5.18 생존자들이 전두환 암살을 기도하는 판타지를 재현한 <26년> 같은 영화보다도 역사관이 퇴행적이다.
이태신과 전두광은 서로의 거울 같은 존재다. 거울을 보는 나의 오른손이 거울 속 나의 왼손인 것처럼 지향하는 가치가 대극에 있을 뿐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론과 캐릭터는 유사하다. 이태신도 전두광처럼 무대포이며 전두광 보다 한 술 더 떠서 사살과 정밀 포격 명력을 주저 없이 내릴 만큼 화끈하고 근본주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태신이 전두광의 맞수가 될 수 있다. 이건 흔히 선한 진영의 인물들이 품는 답답함, 절차적 가치판단에 얽매이는 우유부단함을 구겨 던진 모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넷우익들이 전두환을 ‘전땅크’라고 모에화하는 기질 자체다. 결국 이 영화에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트롤’들의 훼방을 일소하고 강력한 초동 대응을 전개하는 것이었고, 관객의 탄식은 그걸 해낼 수 있는 이태신 같은 강한 지도자에 대한 결핍감, '정의로운 전두광'으로 흐른다. 어쩌면 이것이 <서울의 봄> 천만 관객을 이룬 국민들이 품은 '범정파적' 갈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