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진스가 지난 2일 공개한 ‘OMG’ 뮤직비디오는 먼저 공개된 ‘Ditto’ 뮤직비디오에 스스로 보내는 답장처럼 보인다. ‘Ditto’ MV가 ‘희수’라고 불리는 인물이 실존하지 않는 뉴진스 멤버들을 카메라로 쫓는 망상이라면, ‘OMG’엔 뉴진스 멤버 하니가 ‘희수’에게 편지를 보내는 컷이 삽입돼 있고 멤버들은 망상증에 걸린 채 정신병동에 수용돼 있다. 도식화한다면, 희수는 뉴진스 팬들을 상징하고, MV 두 편은 팬과 아이돌의 시점을 왕복하며 서로의 관계를 허상 혹은 환상이 비낀 현실처럼 그려낸다. ‘Ditto’에선 이것이 90년대, 00년대 호러 영화를 레퍼런스로 귀기스럽게 표현이 됐고 ‘OMG’에선 망상적인 동화처럼 연출돼 있다.
MV 두 편에 담긴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팬들이 해석하기 나름이고 어려운 일도 아니다. 논란이 된 건 ‘OMG’ MV 마지막 장면이다. 뉴진스 멤버가 MV에 관해 키보드로 ‘불편함’을 토하는 트위터 유저 옆에 나타나 “가자”고 말한다(“뮤비 소재 나만 불편함? 아이돌 뮤비 그냥 얼굴이랑 안무만 보여줘도 평타는 치”). MV 배경은 정신병동이고 저 멤버는 자신이 정신과 의사란 망상에 빠진 환자 역할이다. 즉, 악플러에게 (정신병동으로) “가자”고 비꼬는 것으로 보인다. 다르게는 악플러 역시 “우리와 함께 가자”라고 포용하는 뉘앙스로도 보이는데, MV 설정을 생각하면 중의적 장면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할 것 같다.
저 장면은 줄거리와 별 상관이 없고 엔딩 크레디트가 나온 후 삽입돼 사족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사족이 들어간 데는 맥락이 있는 것 같다. 데뷔 당시 앨범에 실린 ‘Cookie’ 가사에 성애적 맥락이 있다는 논란이 있었고, 소속사 어도어 레이블 명의로 해명을 하는 입장문이 나왔었다. 저 마지막 장면은 ‘예술’을 위한 표현 요소에 과민하게 구는 ‘불편러’들을 향한 회심의 반격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론 ‘OMG’ MV의 정신병동, 정신질환이란 다소 민감한 소재에 대한 반응을 예상하고 미리 말문을 막는 선제적 대응일 수도 있다.
이 장면을 보며 든 생각은 두 가지다. 먼저, ‘Cookie’에 대한 논란은 멤버들이 아니라 노래를 만든 기획자와 제작자들을 향한 것이었다. 비록 그 논란 배후에 뉴진스를 시작부터 곤경에 빠트리고 싶어 하는 악의가 섞여 있었을지라도 그들조차 노래 가사를 멤버들이 썼다고 생각했을 리 없다. 안 할 말로 ‘욕’은 어른들이 먹었는데 대꾸는 멤버들이 자기 얼굴을 들이밀고 하게 만든 셈이다. 이건 권한과 행위에 대응하는 책임감 있는 모양새가 아니다. 물론, MV를 만든 입장에선 그런 뜻으로 넣은 장면이 아니라 ‘과민한’ 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의도가 아니라면 오해를 자초하는 부주의한 연출이다.
물론 이건 작은 문제다. MV에서 정신질환을 묘사한 태도에 비하면 말이다. 정신 질환은 특정한 질병이고 장애다. 고통을 겪는 많은 사람이 실존하는데, 귀엽고 기발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필터나 미장센처럼 사용하는 건 신중한 발상은 아니다. 무엇보다, 악플러를 정신질환자로 비유하는 건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고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에 편승하고 조장하는 것이다. 정신질환자라서 악플을 쓰는 것도 아니고 정신병동은 나쁜 사람들이 가는 수용소가 아니다. 이렇듯 가벼운 조크의 형식으로 누적되는 편견들이 정신질환자들이 병력을 떳떳이 말하지 못하고 자책감을 품게 하며 병원으로 향하는 길을 멀게 만든다.
수전 손택은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은유로 말해지는 질병들이 질병의 이미지를 어떻게 오염하고 환자들에게 낙인을 찍는지 설명한다. 정신질환은 거의 욕설과 동의어로 쓰이는 비유를 통해 의미 오염과 낙인 효과가 꾸준히 재생산된다. 정신질환은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신체 장기에 이상이 생기는 질병이고 그 장기가 뇌일 뿐이다. 이 병에 대한 관습적 수사와 추상적 인식을 벗기고 다른 질병과 나란히 놓고 본다면, 예컨대 심장병이나 뇌졸중을 ‘힙스터’스러운 아이템과 (내가 만든 MV를 욕하는) 악플러를 향한 손가락질로 썼다고 생각하면, 무엇이 부적절한지 좀 더 직관적으로 와닿을 것이다.
‘OMG’ MV 마지막 장면은 텍스트 바깥에서 놓인 문맥 역시 문제적이다. 논란이나 반발이 있을 거라 예상하기 어렵지 않음에도 굳이 이 장면을 집어넣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아마도 트위터는 ‘불편러’들 소굴이며 창작에 관한 참견은 히스테리의 표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미 존재하고, 그 인식을 반영해서 보여주면 통쾌해하며 호응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편견에 의해 호위를 받으며 악플러는 ‘정신병자’라는 또 다른 편견이 전시되고 합리화되고 있다.
음악 평론가들이 뉴진스를 찬미하는 글을 보면 "우리도 홍상수, 이창동을 가지고 싶다"는 결핍 같은 것이 보인다. 그건 SM에 몸 담았을 때부터 기획자로 명성을 떨친 어도어 민희진 대표를 향한 경애의 감정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케이팝에 '거장'이 없다면, 제작자들에게 만드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윤리적 상상력이 없기 때문이다. 윤리는 표현을 제약하는 족쇄가 아니며 ‘예술’과 떨어질 수 없다.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비천한 것을 볼 때 반사적으로 ‘추하다’고 뱉는다. 반대로, 작품을 소비가 아닌 성찰의 대상으로, 예쁜 것에 불과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해 주는 것이 윤리다. 윤리감각의 다른 이름은 마음의 심미안이다.
문화는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고 그래서 사람들의 의식을 물들이는 힘이 있다. 케이팝과 하이브를 성장시킨 슬로건 역시 '선한 영향력'이지 않은가. 그 영향력은 당연히 반대 방향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표현의 맥락을 짓뭉갠 채 ‘불편함’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동의한다. 하지만, ‘OMG’ MV에 관한 비판 역시 그런 것이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다’이다. 문화를 선도한다고 불릴 자격이 있는 창작자라면, 트렌드에 대한 감수성뿐 아니라 윤리적 감수성 역시 세상보다 반 보 정도는 앞서 갈 이유가 있다. 편견은 성찰되지 않는 낡은 통념이다. 그것에 편승하기보다 깨트릴 때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