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의 피부색
<인어공주> (롭 마샬, 2023)
디즈니의 <인어공주> 실사 영화가 원작을 ‘파괴’한다는 주장은 생각이 꼬리를 물게 한다. 각색은 원작을 다시 창작하는 것이다. 상상력과 재해석으로 수행되고 필연적으로 다시 쓰기와 고쳐 쓰기를 동반한다. 소설 원작을 ‘고증’에 입각해 시각화하는 것도 재현 매체를 바꾸는 각색의 묘미겠지만, 원작을 비틀고 전복하는 것은 각색의 특권이요 각색이 주는 쾌감이다. 각색을 수행하는 창작자들은 원작의 가치관이 오늘날에도 전시하기에 유효한지 판단할 책임도 떠안는다. 그럼에도 각색 때문에 원작이 ‘파괴’되었다고까지 할 때, 도대체 어떤 부분이 복구 불가능할 만큼 멸실되었다는 건지 궁금해진다. 다름 아닌 피부색이다. 빨간색 머리칼의 백인 미녀로 인식 돼온 인어공주 역을 흑인 배우가 맡았으며 그가 아름답지 않다는 비난이다.
이건 인물의 외모에 관한 설정이다. 그의 정체성과 연관될 수 있기에 중요하다면 중요하겠지만 인어의 정체성은 애초에 백인이 아니다. 인류라고 할 수조차 없는 존재다. 인간이 되고 싶은 인어의 사랑 이야기가 꼭 아름다운 외모로 재현돼야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인어공주 에리얼의 외모를 묘사한 문장들은 북유럽 백인이었던 작가 안데르센의 당대적·지역적 관념을 반영했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에도 유구히 전승되어야 하는 작가의 전언이나 유산일까? 사실 원작에 결정적 변형을 가한 건 실사 판 <인어공주>가 아니라 전작에 해당하는 1989년 작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다. 원작에선 에리얼이 왕자와 이어지지 못하고 정령이 되지만 애니에선 해피엔딩을 맞고 상당한 각색이 이뤄졌다. 오늘날 많은 이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와 에리얼에게 품은 관념도 실은 이 작품이 연원이다.
애니 판 <인어공주>는 사랑하지만 실사 판 <인어공주>는 용서할 수 없다면 원작을 수호하려는 이들의 태도로 걸맞지 않다. 주인공의 외적 정체성이 바뀌는 것이 작품의 구조와 얼개가 바뀌고 그렇게 바뀐 이야기가 원작의 오리지널리티를 잠식하는 것보다 더 큰 훼손이라고 믿는 난센스다. 하얀 피부와 아름다운 얼굴이 그토록 맹렬히 불가침의 성상으로 수호된다면 그건 곧 특정한 피부색과 우월한 외모의 신성화다. 그것이 어두운 피부색에 대한 분노와 조롱으로 표현될 때 인종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논리가 있을까? 그들이 파괴되었다고 규탄하는 것의 정체는 사실은 원작이 아니라 원작에 드리워진 자신들의 다수화된 고정관념이다.
나는 원작 파괴를 비난하는 이들이 정작 원작을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확신한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무엇을 말하는 이야기일까. 그것은 인어와 인간이 사는 서로 다른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며, 서로 다른 종의 사랑의 불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혀를 잘라 바치고 지느러미를 다리로 바꿔도 사랑은 실패하였고 인어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동화로서는 무서울 만치 깊은 결여와 심연을 이루는 건 두 종을 구분하는 경계의 절대성이다. 『인어공주』는 바다와 육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펼쳐지는 동화인 한편 세상의 경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소수자들의 소망과 절망에 관한 알레고리다. 만약 저들이 안데르센이 양성애자였고 동성에게 실연을 겪고 절망했다는 ‘나무위키’에도 나오는 사실을 찾아봤다면, 이 동화를 인종적 소수자의 버전으로 각색하는 것의 개연성을 깨닫고 잠시 침묵하기라도 했을 것이다.
나는 북미 문화 산업의 ‘정치적 올바름’에 미심쩍은 마음이 있다. 소수 인종을 위해 영화 속 주인공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건 그 산업의 권력과 물적 토대를 소유한 진정한 주인공인 백인들이다. 이 현실이 그들이 누리는 체제에 숨은 구조적 부도덕을 고발하고 있는지 표면적 도덕성을 강화해 주는지 궁금하며, 그렇게 재현되는 타자의 모습엔 역시 백인들이 품은 스테레오 관념이 투영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인어공주> 자체에 지지를 표명하는 글이 아니다. 하지만 호불호를 표하는 걸 넘어 <인어공주>를 공격하는 언동들은 그런 위선을 감지하는 것이 배부르게 느껴질 만큼 추악하고 천박하다. 주연 배우 할리 베일리의 외모를 조롱하는 글, 흑인을 범죄자에 빗대는 전형적인 인종차별로 흑인 인어공주를 희화화하는 글, 이런 글들이 밈이 돼서 국경을 넘어 떠돈다.
그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한국 외에도 곳곳에 존재한단 사실에 안도감이 드는가? 그건 지구상에 차별을 내면화한 불량배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 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은 정치적 올바름이 세상을 망친다고 분개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이 나타난 배경, 차별의 실존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혐오의 유희가 ‘원작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덮어쓰고 연대의식을 구축할 때, ‘검은색’은 하얀색 동화의 순결함을 더럽히는 오염 물질로 규정당하고 인종차별은 당당히 외칠 수 있는 규범의식으로 승천한다. 정치적 올바름이 도덕을 앞세워 예술의 상상력을 억압한다고 비난하던 이들이 각색의 존재 의미까지 무시한 채 자신들이 인식하는 원작과 어긋나는 창작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요구한다. 이것이야말로 상상력에 대한 억압이며 세계는 이런 색깔로만 존재해야 ‘올바르다’고 규정하는 중세적 도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