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 (롭 마샬, 2023)
디즈니 <인어공주> 논란에선 두 가지가 이상하리만치 강조되고 있다. 하나는 영화의 흥행 추이가 마치 무언가에 대한 논거처럼 반복적으로 들먹여진다는 것이고, 하나는 영화의 만듦새가 무언가를 기각하는 논거처럼 도마에 오른다는 것이다. 상업 영화의 흥행과 만듦새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들이 현재 일어난 논란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건 아니다. 인어공주 역할에 흑인배우 할리 베일리를 기용한 ‘정치적 올바름’이 소요 사태의 버튼을 눌렀는데, 이런 가치 지향적 연출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로 그 내용의 타당함이 판명되진 않는다. 비록 그런 연출을 택한 동기에 상업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영화의 만듦새 역시 가치중립적 연출 요소이기에 영화에 얽힌 이념적 요소에 가치판단을 내려주지 않는다.
<인어공주> 비판자들 사이에선 <인어공주>가 흥행에 실패했다는 자료가 시시각각 중계된다. 한편 그들은 할리 베일리가 흑인이라 욕하는 것이 아니라 “못 생겼기” 때문에 싫은 것이며, 이 점이 캐릭터 성격과 이야기 개연성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어떤 영화 평론가들은 영화 완성도를 혹평하며 “논란이 아깝다”는 한 줄 평을 내렸다. 이런 입장들은 한 가지 방향의 결승점에 이인삼각으로 도착한다. 그건 ‘영화 자체’와 영화의 이념성을 분리하는 언술이며, 이념적 메시지를 ‘영화 외적인 것’으로 규정해 불순물처럼 간주하는 태도다. 그들에 의하면 영화의 가치는 실사화한 이미지의 아름다움, 이야기 개연성, 캐릭터의 매력 같은 만듦새에 걸려있다. 이런 스탠스의 귀결로 현재 영화에 가해지는 비난은 특정한 피부색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영화의 퀄리티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라고 합리화되는 것이다. <인어공주>는 사람들이 외면한 졸작에 불과하고 그 원인과 결과로서 영화에 담긴 메세지도 가치가 없다, 라는 것이 저들의 결론 같다.
그러나 영화가 품는 기획은 언제나 단순한 만듦새 이상의 것이며, 영화에 관한 논란은 사회적 현상이기에 만듦새와 별개로 독자적 논점이 된다. 저런 관점들은 ‘영화 자체’와 ‘영화 외부’를 깨끗이 분리할 수 있다고 믿는 낡은 환상이며 ‘영화 자체’에 집중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정작 영화에 결부된 가치와 현상들을 논외하고 부정하는 논법이다.
이 ‘영화 자체’라는 관념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른바 PC 영화들이 이야기를 성립시키기 위해 찾아낸 무대이기도 하다. 등장 인물의 사회적 정체성을 바꾸는 영화들은 히어로 무비나 각색된 동화 같은 판타지 서사 계열의 프랜차이즈 시리즈에 쏠려 있다. 사회의 소수자들을 영웅과 공주 같은 다수자로 탈바꿈시키려면 현실과 별개로 ‘영화 자체’의 세계관이 존재하는 판타지가 편리한 것이다. 혹은 판타지를 통해 소수자 문제에 얽힌 정치적 현실을 누락한 채 소수자를 소환해 정치적 올바름을 전시할 수 있다. 히어로 프랜차이즈 중 리얼리즘의 문법으로 주인공의 계층성을 클로즈업하고 현실의 비극성을 고발한 보기 드문 영화가 ‘백인 남성’이 주인공인 <조커>라는 사실은 곱씹어 볼 의미가 있다.
정치적 올바름은 ‘재현’의 힘에 대한 믿음 위에 있다. 그것이 실천되는 원리는 세계를 올바른 방식으로 재현하면 올바르지 않은 세계를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병신’이란 멸칭을 금지하고, ‘여배우’를 ‘배우’로 바꿔 부르고, 영화 속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던 흑인 캐릭터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준다. 현실은 재현에 앞서 존재하지만 재현을 통해 인식되기도 하며 오늘날 재현 매체의 힘은 날로 강해지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엔 가치 편향적으로 인식되는 현실을 가치중립적으로 재현하자는 취지도 담겨 있어 분명 유효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어떤 할리우드 PC 영화들은 관습적으로 주류화된 이야기, 사회적으로 주류화된 욕망을 투영하는 캐릭터를 그대로 둔 채 인물의 정체성만 반전시킬 따름이다. 이건 피부색과 성별을 바꾸면 ‘올바른’ 영화가 된다고 믿는 순진함이며, 현실의 권력관계가 소거된 가상의 대안 현실이다.
이런 유형의 영화들이 정치적 효과를 이루기 위해선 바로 그 관습적인 구성과 그에 대한 관객들의 관념에 반문을 던지고 재구성해야 한다. 그런 기획 없이 애니메이션 판 전작을 통해 ‘빨간 머리칼의 백인 미녀’로 캐릭터 애호의 대상이 된 에리얼의 자리에 할리 베일리를 가져다 놓았기에 그 부조화스러움으로 조롱할 ‘떡밥’을 양산해 준 측면도 있다. 이건 어쩌면 정치적 올바름의 명분만 챙기면서 전작이 구축한 이미지에도 기대려고 한 안이하고 보신적인 판단이 낳은 결과다. 문제의 핵심은 <인어공주>가 원작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원작을 더 적극적으로 해체하지 않은 것이며, 이념과 별개로 ‘영화 자체’가 미흡한 것을 넘어 이념적 기획을 ‘영화 자체’에 깊숙이 결착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조커> 개봉 당시 일어났던 논란과 비교하면 차이가 극명하다. <조커>의 주인공 아서 플렉은 하층민 백인 남성의 심벌로 인식되었으며 영화에서 그의 파국과 일탈이 표현된 방식이 현실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물론 미국의 사회상이 논점이 되어 찬반 격론이 오갔다. 반면 <인어공주>는 흑인 배우를 기용하는 ‘파격’을 감행했음에도 배우 기용의 적절성과 ‘영화 자체’에 비난이 고착돼 있다. 한국에선 할리 베일리를 향한 비난의 인종 차별적 성격을 지적하는 기사마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배역의 피부색이 이토록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흑인들이 처한 사회적 현실은 구체적으로 가시화되지 않는다. 할리우드 식 정치적 올바름의 한계와 ‘블랙 워싱’ 같은 말의 허구성을 이보다 역설적으로 드러낼 방법은 없을 것이다.